Orientation

April 28, 2017

주위에서 종종 책 읽기, 특히 철학적 책 읽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경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뭐 사실 어려움을 토로하기에 앞서 책 읽기 자체가 점점 희귀한 현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어려움에는 몇 가지 대표적인 이유들이 있지요. 책은 문자라는 기호를 매개로 특정한 정보가 담고 있습니다. 철학 책이라면 대개 어떤 이념이나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념이나 사상을 조형하는 방식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시처럼 은유나 상징, 운율과 이미지를 사용할 수도, 이야기나 비유에 담을 수도 있겠지요. 철학은 주로 논리라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많은 경우 철학은 자신의 주장을 보편적이고 타당하게 제시하고자 하는데, 논리는 이를 위해 철학이 가장 가깝게, 또 강하게 기대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철학적 책 읽기는 무엇보다 그 사상에 담긴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만, 철학이 담고 있는, 철학이 담겨 있는 고유한 논리를 온전히 쫓아가는 것은 종종 쉽지 않은 일로 느껴집니다. 교과서적 글쓰기가 아닌 경우라면 이런 어려움은 더욱 도드라지고요. (물론 지금 말한 교과서는 전형적이거나 모범적인 형식을 가리키는 의미에서의 교과서가 아니라, 특정한 내용을 순수한 전달을 목적으로 최대한 중립적으로 담고 있는 교본을 의미하는 교과서입니다.) 그래서 철학적 책 읽기의 어려움은 우선 그 논리적 흐름을 파악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종의 낯설음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런 낯설음은 단순히 논리를 쫓아가는 일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논리보다 더 낯설게 느껴지는 어려움이 있지요. 어느 철학이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계에서 온 사상을 담고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때로 도저히 사람이 썼다고 느껴지지 않는, 인간의 언어로 쓰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철학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철학이 자신의 시대를 넘어 역사 속 언제나, 어디에서나 동시대적이기를 꿈꾸지만 사실 이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때 영달과 명성을 누리던 철학과 철학자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시대가 변하면서 부침을 반복하거나 침전하기 마련이니까요. 모든 철학에는 그가 씨름했던 당대의 문제들이 있고 그가 대결하고 있는 입장과 관점들이 있으며 그가 계승하고 있는 전통이 있고 이를 위해 그가 동원하는 고유한 방법과 기술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남은 기록을 다시 펼치는 시점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시절 문제들은 어느새 흔적 없이 지난 일이 되었고 그가 대결했던 입장과 관점들 또한 사라지거나 모습을 바꾸었으며 그가 계승했던 전통 역시 철지난 유행처럼 변해 있는 경우가 많지요. 때문에 철학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현재화 작업을 의미합니다. 철학이 담고 있는 의미를 현 시점으로 불러내어 당대의 의미로 다시 읽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건 어떤 철학을 당대의 눈으로 재단하고 판단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뭐 여기까지 정도면 좋겠습니다만 또 있습니다. 한 사상은 그것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그 시점에 완전무결하게 나타나서, 변하지 않고 그대로 시간 속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방향으로 변화하며 모습을 바꿉니다. 한 사람의 사상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때로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어져 발전이나 연속을 이루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고, 때로는 전혀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로 모습을 바꾸거나 이어지지 않는 단절을 이루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요. 어떤 철학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것에 담긴 정보를 단순히 해독하는 것은 물론 그것의 고유한 변천이라는 맥락을 함께 살필 때에만 가능합니다. 예컨대 푸코의 사상은 정신병에 대한 연구로 시작해 임상의학과 정신질환의 관계로, 다시 과학과 지식의 관계로, 또 권력과 진리의 문제를 다루는 식으로 나아가는데, 순전히 정신의학의 관점에서 정신질환에 대한 푸코의 연구를 다루려고 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그것의 가치를 판가름하려는 시도는 터무니없는 접근이 되고 말 겁니다. 푸코가 문제를 설정하는 층위는 정신의학의 차원이 아니라 그의 사상이 전개하는 과정 속에서 파악해야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니까요. 또 거꾸로 푸코가 진리와 권력의 관계를 묻는 방식을 살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단순히 과학철학의 탐구 경로를 따른다기보다는 정신병의 역사적 변천, 정확히 표현하자면 역사적으로 사회가 특정한 대상을 광인으로 분류하고 취급하는 방식의 변천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서니까요. (그래서 한 토론에서 사회자가 그의 사상 속에 나타나는 불연속과 단절에 대해 묻자, 푸코는 자신은 그러한 단절(이 있다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한 적도 있지요.) 이처럼 한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과정 속에 놓이는지, 그 사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개념들이 어떻게 등장하고 변화하는지 함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뭐 책 읽기의 어려움을 논하자면 한참을 더 살펴볼 수 있겠지만 일단 이 정도로 해둡시다. 시작도 전에 벌써부터 질리겠군요. 이번 세미나에서는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다룹니다. 세미나 시작과 함께 일별한 책 읽기의 어려움을 조금 덜어본다는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인간의 조건>을 다루기에 앞서 아렌트는 누구인지, 아렌트 사상의 특징과 내용은 무엇인지, 또 그녀의 지적 생애에서 <인간의 조건>이 어디쯤에 놓여 있는지 먼저 간략하게 짚어봅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1906년 독일 하노버의 유대인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렌트의 가족은 1911년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주했고, 아렌트 역시 이곳에서 성장했지요. (칸트의 바로 그곳입니다.) 소녀 시절 아렌트는 칸트와 룩셈부르크를 동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1924년 독일의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하이데거를 만났고, 하이데거의 영향은 이후 아렌트 사상의 근간을 이룹니다. 1926년 아렌트는 하이데거와 결별한 뒤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그녀는 야스퍼스와 후설에게 사사하였고 아우구스티누스 연구로 1928년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듬해 마르부르크 대학 철학과 동기와 결혼했고, 이들은 1937년 이혼 전까지 함께 삽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자 아렌트는 파리로 망명합니다. 그리고 1940년 파리에서 하인리히 블뤼허와 결혼하지요. (이들은 1970년 블뤼허가 사망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1940년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아렌트는 이듬해 뉴욕으로 다시 망명한다.

 

아렌트의 지적, 학문적 활동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뉴욕에서 반유대주의 활동을 펼치던 아렌트는 1951년 <전체주의의 기원> 출간을 통해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며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요. <전체주의의 기원>은 공산주의의 이념과 스탈린주의의 폐해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냉전과 반공산주의 기조에 더불어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같은 해 아렌트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습니다. 아렌트는 1953년 프린스턴 대학 강의를 시작으로 강단에 섰으며, 1967년 뉴욕의 ‘뉴스쿨(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프린스턴, 버클리, 시카고 대학 등에서 강의했습니다. 1956년 시카고에서 ‘활동적 삶(vita activa)’을 주제로 강의했는데, <인간의 조건>은 바로 이 강의의 내용을 토대로 만들어졌습니다.

 

 

... (중략) ...

 

 

1963년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다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출간하며 논란의 중심에 섭니다. 2차 대전 종전 후 1960년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은 신분을 감추고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내던 아이히만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했는데, 아렌트는 잡지사 ‘뉴요커’의 특파원 자격으로 1961년 12월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취재합니다. 아이히만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유대인 학살 책임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무죄를 거듭해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사형은 이듬해 집행되었습니다. 아이히만은 나치에서 유대인 이주 책임자로 근무했는데, 나치가 진행한 유대인 이주 정책은 다름 아닌 점령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대규모 수용소로 이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출간하며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책의 부제에서 드러나듯, 아렌트는 재판 과정에서 목격한 전범 아이히만의 평범함에 주목합니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아이히만의 단정한 외모, 정중하고 교양 있는 태도, 국가가 부과한 명령을 지키는 것이 군인의 도리임을 항변하는 지적 능력까지, 아렌트가 목격한 아이히만은 흠 잡을 곳 없이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지요.

 

아이히만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자신은 그저 단순히 상부에서 주어진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할 때, 아렌트는 사유하지 않는 인간의 ‘근본악(das radikale böse, radical evil)’을 발견합니다. 아렌트의 관점에서 악은 뿔 달린 악마처럼 괴이하거나 현실에서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며 일상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감정들과 같이 도처에 존재합니다. 아렌트는 악이 발현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을 때 악의 실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라고 보았는데, 바로 ‘생각’, 사유하는 것입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이 그 명령을 실행한다면 어떤 결과가 도래할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을 ‘단순히’ 실행에 옮겼습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악은 바로 여기에 존재하지요. 일상성에 묻혀 ‘누구나 다 이러는데’, ‘나 하나 반대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나는 명령 받은 대로 할 뿐이야’ 등의 핑계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평범하고 선량한 인간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악에 동참하고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 아렌트의 생각이었습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언제나 악은 선해지거나 악해지기로 결심한 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집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자’라고 부릅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음과 같지 않은데, 그것이 아이히만을 시대의 가장 악랄한 범죄자로 만든 셈이지요. 어리석음이 인간에게 예기치 않은 불편과 불행을 초래하는 유쾌한 부덕이라면, 생각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악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자, 이렇게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악의 근원’이라고 제시합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학문은 이런 선언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말들은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이라고 볼 수 없는, 모종의 인상이나 인문적 통찰에 지나지 않는다면서요.) 그리고 아렌트는 이러한 현상이 단순히 어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 (이후) 사회의 어떤 특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테면 인간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어떤 근본적인 환경의 변화를 파악하고자 관심을 기울이고요. 다음 시간부터 아렌트의 이야기를 좇아 그녀가 제시하는 인간의 조건을 함께 살펴보시지요, 오늘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4. 28. / Sutome Apothec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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