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불반도'에서 살아남기

April 22, 2017

몇 년 전 한 경제학자와 기자 출신 작가가 집필한 책이 한국 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이들이 책에서 주장한 ‘88만원 세대’라는 개념 때문이지요. 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한국의 20대를 ‘88만원 세대’라고 명명합니다. 이들은 20대 가운데 5%만이 5급 공채나 공기업, 대기업과 같이 비교적 소득이 높은 소위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으며, 나머지 95%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당시 비정규직 노동자 월 평균임금 119만원에, 30대 이상의 연령집단 대비 20대 연령집단의 평균임금 비율인 74%를 곱하면 88만원이 나오는데, 바로 이 88만원이 20대의 실질적인 임금이라는 것이지요.

 

자칭 ‘C급’ 경제학자와 ‘혈관에 비주류 정서를 채우고 살아간다’는 저자의 이야기는 C급과 비주류가 제시한 주장치고는 꽤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습니다. 20대는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 한동안 세대 담론이 유행처럼 번졌으니까요. 이들 주장의 사실성이나 타당성 여부를 두고 논란도 많았습니다. 뭐 형태나 내용은 조금 달라졌지만 세대 담론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이고요.

 

이들 주장에 대한 반박 가운데 흥미로운 관점이 있습니다. 개념 설정 자체가 틀렸다, 즉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으로 이들이 주장하는 세대 간 불평등은 허구다, 라는 반박입니다. ‘88만원 세대’라는 개념은 정치적, 사회적 차원에서의 세대 담론, 특히 노동 문제와 계급, 세대 간 불평등 문제를 효과적으로 포착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지만 경제학적 차원에서 따져본다면 유효하지 않은 허구적 개념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세대 간 불평등이라는 개념은 일종의 착시현상, 또는 특정한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낸 정치적 개념에 불과합니다.

 

반박은 이를 보여주기 위해 경제적 불평등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소득 뿐 아니라 자산 규모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 연령계층 간 편차보다 동일계층 내부의 편차가 훨씬 더 크다는 점, 20대의 경우 독립 세대가 아니라 부모 가구의 세대원이거나 경제적으로 종속된 관계에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 등을 제시합니다. 이에 따르면 20대부터 30대, 40대, 50대, 60대 등 연령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전 연령계층에서 같은 집단 내부에서의 소득, 자산 격차가 계층 간의 소득, 자산 격차보다 훨씬 더 큽니다. 즉 20대와 50대 사이의 불평등이 문제가 아니라 같은 20대라고 해도 이들 사이에 현격한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 53세 A씨와 56세 B씨 사이의 불평등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지요. 88만원 세대라는 개념이 제시하는 연령계층 간 불평등은 소득이나 자산 규모가 가장 큰 50대 집단, 즉 20대의 부모 집단의 불평등을 반사하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수저계급론’과도 비슷한 맥락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즘에는 88만원 세대라는 표현이 잘 쓰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이러한 접근, 혹은 간단하게 짚어본 이에 대한 반박에는 이론이 사회를 포착하는 방식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학문적 개념이나 지표는 이처럼 사회의 특정한 지점들을 포착해내기도 하고, 보이지 않던 문제를 조명하기도 하며, 때로는 사태를 왜곡하거나 굴절시키기도 하지요.

 

 

... (중략) ...

 

 

함께 읽은 논문에서 김홍중이 지적하는 것처럼 ‘생존주의’란 사실 당혹스런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생존이라는 개념의 본성 상 생존은 어떤 이념이나 주의(主義)와 결합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생존은 ‘주의’ 이전, 성찰 이전, 사고 이전의, 생명의 충동과 힘의 영역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존재라면 누구든, 무엇이든 생존을 지향하는 경향성을 벗어던질 수 없으며, (인간의 내적 본성으로서의 죽음충동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존재들을 비난의 대상으로 한정하는 것 또한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생존에의 열망은 자연적인 것이며, 선악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문제는 생존이 조직된 주의가 되고 지향하는 가치가 될 때, 집합적으로 마음의 짜임새를 만드는 원리가 될 때입니다. 김홍중은 생존이 주의로서 나타날 때, 그것은 무언가의 붕괴를 지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고대 그리스부터 내려오는 인간관의 전통에 담긴 것처럼, 그리고 아렌트나 최근의 아감벤 등이 명시적으로 지적하는 것처럼, 만약 사회 구성원들이 순수한 목숨의 존재로서 먹고 살고 살아남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한다면, 인간의 사회적 삶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요컨대 인간의 사회는 인간의 생물학적 요건을 초과하는 공간 속에 놓여 있습니다. 즉 사회는 인간의 생물학적 요구뿐 아니라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이념적 가치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사랑, 구원, 평화와 같은 가치들로 함께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지요. 사회의 이러한 특징은 인간이 자신의 생존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그 너머를 갈구한다는 것, 곧 타자와의 관계를 욕망하고 때로 생물학적 요구 이상을 연기하고 신앙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의가 되어 버린 생존’은 바로 연기도 신앙도 불가능한 상태, 사회적인 것의 불가능이 생산하는 마음의 형식입니다. (김홍중은 이를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행위자들의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몸짓들의 원리’라고 명명합니다.)

 

자 그럼 이러한 마음의 형식들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요? 마음의 짜임새를 어떻게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에 의하면, 대중문화와 학문, 예술이 생산하는 다양한 담론들과 문화적 산물들은, 고도로 분화되고 복잡한 현대사회가 스스로를 관찰하고 표상하는 대표적인 형식들입니다. 루만은 사회를 자기관찰을 통해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파악합니다. 그에 따르면 사회는 이런 자기관찰을 통해 작동하고, 의미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면서 소통을 이어간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입장은 사회적 실재가 담론적 관찰들의 외부에 초월적으로 존재한다는 관점을 기각하고, 사회적 실재를 자기관찰들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관찰들을 통해서 생성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대중매체를 통해 생산되고 소비되는 콘텐츠들과 방송들, 그리고 공론장에 유통되는 학문적 언설들과 연구들, 문화영역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는 자기계발서, 소설, 영화, 드라마, 연극, 웹툰 등에 이르기까지, 사회에서 찾을 수 있는 자기관찰의 형식들은 단순한 이차적 재현물들이 아니라, 사회적 실재를 조형한 가장 중요한 심급이자 자료들이라고 볼 수 있지요. 오늘 우리가 지나고 있는 모종의 사회적 현실도 이 방대한 텍스트 속 곳곳에, 아마도 난삽한 방식으로 구현되어 있을 겁니다. 마치 모자이크처럼요. 하나씩 들여다보면 아무 의미도 발견할 수 없는 조각들에 지나지 않지만, 각각의 색채와 형태가 모여 어떤 의미를 드러내는. 앞으로 얼마간 모자이크의 지형도를 함께 살펴보시지요,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4. 22. / 곰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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