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interestedness and Universality

April 17, 2017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취미판단(geschmacksurteil)’이라는 개념을 통해 미의 문제를 다룹니다. 흔히 취미는 직업이나 어떤 필요에 의한 활동이 아닌 즐기기 위한 자발적 활동을 가리키는데,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취미의 다른 뜻으로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칸트가 사용하는 용어 또한 이러한 의미라고 볼 수 있지요.

 

칸트가 원래 사용한 표현, 한글 취미에 해당하는 독일어 표현은 ‘geschmack’입니다. 맛이나 취향, 기호 등을 의미하는 낱말이지요. 영어의 ‘taste’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요. 칸트에 따르면 취미판단은 어떤 대상에 대해 아름답다고 판정하는 판단입니다. 칸트의 기본적인 생각을 아주 간단하게 도식화한다면 어떤 대상을 감각을 통해 지각하면 판단력을 통해 이것이 아름다운지 아닌지에 대한 판정이 이루어지는데, 여기에서 대상이 아름답다는 판정에 적합하면 쾌(쾌감, 쾌적함)가 산출된다고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단순하지요? 칸트가 제시하는 복잡한 논의의 구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켜서 그렇습니다. 상당히 거칠게 도식화한 만큼 이러한 구도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지점들을 많이 담고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들은 앞으로 하나씩 함께 논의해봅시다.

 

지난 밤 합리주의적 전통이 이러한 종류의 판단에 대해 기본적으로 가진 시각을 간단하게 살펴본 바 있지요. 합리주의는 전통적으로 미학이라는 감각의 영역과 미감적 판단(ästhetische urteil, aesthetic judgment)의 객관성, 보편성을 썩 신뢰하지 않습니다. 데카르트가 제시했던 사례를 떠올려볼까요? 아름다움과 감각적 쾌적함의 문제에 있어 객관성과 보편성을 기준으로 접근하는 것은 피아노 건반 소리와 첼로 소리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아름다운 소리인가라고 묻는 것과 똑같습니다. 객관적으로 첼로 소리가 피아노 소리보다 아름다운 이유나, 혹은 피아노 소리가 첼로 소리보다 더 듣기에 좋은 이유를 보편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즉 누구나 납득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이고 타당한 방식으로 두 소리 가운데 우열을 나누는 것은 가능할까요? 데카르트가 보기에 이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에 달린 문제입니다. 즉 피아노를 좋아하는 사람은 첼로보다 피아노 소리가 더 듣기 좋다고 생각할 것이고, 첼로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첼로 연주가 피아노 건반 소리보다 더 듣기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더 극단적으로 나아가 볼까요? 88개의 피아노 건반 왼쪽 끝, 가장 낮은 ‘라’ 음과 오른쪽 끝 가장 높은 ‘도’ 음, 둘 중에 어떤 음이 더 듣기 좋은 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대체 이런 구분이 가능하기는 할까요? 객관적으로 더 듣기 좋은 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체로 합리주의는 이런 판단에 대해서는 객관성이나 보편성에 대한 논의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본다면 감각의 좋고 나쁨에 대한 미적 판단은 정말 보편적으로 따질 수 없는 문제인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냥 미적 판단은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게다가 뭔가 그냥 사람마다 다르다, 정도로 넘어가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반대편에서 이 문제를 바라본다면, 오히려 사실은 문제가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지난 밤부터 미학이라는 영역의 까다로운 영토 획정의 문제를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사실 이게 거의 핵심적인 문제라서 그렇습니다.) 즉 만약 미적 판단의 보편성, 감각과 취향의 보편성이 존재한다면, 미학의 문제가 훨씬 더 복잡해진다는 것이지요. 이를 테면 피아노와 첼로 사이에 존재론적 우열이 존재한다면, 다양한 음색들 가운데 우열을 나눌 수 있다면, 만약 음악의 좋고 나쁨에 대한 보편적 기준이 존재해서 베토벤을 좋아하는 취향과 빅뱅을 좋아하는 취향 사이에 더 좋은 취향과 좋지 않은 취향을 구분할 수 있다면, 객관적인 세계에 대한 판단처럼 올바른 판단과 틀린 판단이 존재한다면, 즉 올바른 취향과 틀린 취향이 존재한다면 미학의 문제는 훨씬 복잡해진다는 것이지요. 이쪽이야말로 쉽게 납득하거나 용인하기 어려운 사태가 아닐까요?

 

칸트는 애써 판단력을 탐구하며 피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극단입니다. 그는 취미판단을 객관 세계를 탐구할 때와 같이 하나의 절대적 규칙 아래 진리라는 이름으로 규제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더 나은 판단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즉 인간이 어떤 대상에 대한 쾌와 불쾌를 판단하는 것을 단순히 개인만의 견해나 감정의 문제로 방치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어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환원하지도 않고자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칸트의 접근은 우선 일종의 예비적 탐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1비판에서 형이상학에 대해, 2비판에서 윤리학에 대해 수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학문 분과의 탐구 대상이 되는 구체적인 사태를 하나하나씩 다루기에 앞서, 그 학문이 확보할 수 있는 탐구의 영토를 먼저 확정하고자 하는.

 

 

... (중략) ...

 

 

칸트는 앞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제시한 이성의 판단 범주를 판단력의 문제를 다룰 때에도 동일하게 사용합니다. ‘순수한 이성(reine vernunft, pure reason)’이라는 개념이 나타내듯이 감각 경험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인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선천적인 사유 능력이 바로 이 이성이기 때문이지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때로 사람에 따라 서로 달리 사용하거나 잘못 사용하기도 하지만 순수한 이성의 가능성과 역량 자체는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자 보편적 조건이라는 것은 칸트가 인식에 있어서 진리의 보편성을, 실천에 있어 보편적 실천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순수이성은 질, 양, 관계, 양상의 네 가지 범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순수이성의 범주는 이성이 경험을 종합하는 법칙이자 다른 역량으로부터 유도되거나 합성할 수 없으며, 직관이나 감성이 아닌 사고와 지성에 속하는 역량입니다. 모든 선험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 단위이기도 하고요.

 

칸트는 취미판단에서 이 네 가지 범주가 각각 어떤 계기(moment)로서 작동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취미판단의 대상이 되는 미적 경험 앞에서, 네 범주 각각이 취미판단의 어떤 특징과 대응한다는 것이지요. 칸트가 사용하는 계기의 의미는 미감적 판단을 가능하게 만드는 작동원리로서의 힘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작동원리는 힘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인 관계를 함축하지는 않습니다. 칸트가 <판단력비판>의 서문에서 제시하는 바, 이 계기는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 경향 정도에 가깝지요.

 

이 경향의 특징과 계기들 사이의 관계는 세 번째, 네 번째 계기까지 모두 살펴본 다음에 종합적으로 함께 다루기로 하지요.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갑시다. 칸트에 따르면 오늘 살펴본 질과 양의 범주에서는 각각 무관심성과 보편성이라는 특징이 도출되는데, 현대 미학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인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칸트는 쾌적한(angenehm) 것에 기인하는 만족(wohlgefallen)과 좋은(gute) 것에서 오는 만족, 그리고 취미판단에서의 만족을 구분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익숙한 표현인 ‘만족’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만, 일반적인 역어로는 ‘흡족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에 따르면 쾌적한 것에서 오는 만족은 (음식을 먹으면 맛있고 등이 가려울 때 긁으면 시원한 것처럼) 단순한 감각기관 차원의 만족을, 좋은 것에서 오는 만족은 (갑자기 비가 올 때 마침 우산을 구했거나 궁금했던 누군가의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이성적 판단에 따른 만족을 의미합니다.

 

반면 취미판단이 주는 만족은 단순히 청각, 촉각, 미각 등의 감각기관에 주어지는 직접적인 자극에 의한 일차적인 만족도 아니고, 필요했던 무언가를 찾았을 때나 생각했던 것이 맞아떨어졌을 때 주어지는 만족도 아니라 나의 관심이나 이해와 전혀 무관한 어떤 대상 앞에서 느낄 수 있는 종류의 만족입니다. 대상의 의미에 대한 서사적인 해석이나 기술적인 분석 없이도 얼마든지 작품을 미적으로 감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히려 그것이 진정한 미적 감상이다, 와 같이, 오늘날 (이라고 하기엔 벌써 철지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만) 무관심성에 중심을 둔 비평의 시선과 궤적을 같이 하는 접근이지요.

 

또 무관심성이라는 첫 번째 계기에서, 자연스럽게 취미판단의 두 번째 계기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누구의 이해와도 무관하게 만족스러움을 산출하는 경험이 있다면, 당연히 그것은 누구에게나, 즉 모든 사람에게 만족스러움을 산출할 수 있다는 생각이지요. 그래서 두 번째 계기의 특징이 바로 보편성이고요.

 

이렇게 의미의 틈새를 예민하면 들여다 볼 때, 칸트 미학에 있어 단순히 각각의 계기와 판단 대상 사이의 관계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기들 사이의 관계 또한 꼼꼼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돌아오는 다음 밤 나머지 계기들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시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4. 17.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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