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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9, 2017

 

이봐,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과학자인가, 시인인가, 혁명가인가. 홀로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가. 그는 아름다운가, 무책임한가.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비밀스러운 기원이라는 걸 알고 있나. 구원이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완전하고 궁극적으로 부정되는 순간을 의미한다는 걸 알고 있나. 꽃은 그렇게 피어난다. 아름답고 또 위험하게. 레닌이 옳았는가, 마르토프가 옳았는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옳았는가, 베른슈타인이 옳았는가? 죽은 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지리놉스키는 멍청이었으며, 자본주의는 혐오스럽다. 스피노자는 매혹적이고 무기력했으나, 일생 동안 어두침침한 방에서 안경 렌즈를 매만지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취한 그는 비틀거리는 어조로 많은 말을 쏟아냈다. 수많은 고유명사들이 맥락 없이 뒤섞였으나, 마지막은 언제나 긴 침묵이었다. 많은 말과 마른 우물 같은 침묵 사이가 갑작스러워서 나는 당황하곤 했다. 침묵이 시작되면 그는 이중창문 밖으로 시선을 두고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많은 말을 했다는 듯이.

   

- 이장욱,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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