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el Foucault: Truth and Power

March 31, 2017

지난 밤 촘스키의 인터뷰를 살펴보면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내용을 함께 다루었지요. 이데올로기를 이해하는 관점이나 비판하는 시각에는 다양한 입장이 있을 겁니다. 그 가운데에는 로나가 촘스키에게 질문하며 염두에 두었던 것처럼, 만약 이데올로기가 언제나 ‘이미’ 작동하는 사고의 틀로서 기능한다면 단순히 ‘합리적인’ 비판만으로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수행할 수 없다는 시각도 존재하고요. 이러한 관점은 이데올로기는 본래 특정한 세계관이나 지배 질서를 옹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합리적인 비판만으로는 이러한 세계관 자체에 대한 비판을 수행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무엇이 합리적인가를 결정하는 것 역시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에 놓이는 문제이므로 이데올로기(혹은 지배 질서)는 자신을 향한 비판 자체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배제한다는 것이지요. 푸코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합리성’을 의심하며 비판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함께 읽고 있는 책의 후반부는 1971년의 토론 이후 푸코의 인터뷰와 강연, 짧은 성명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976년 푸코가 ‘진리와 권력(Truth and Power)’이라는 제하에 이탈리아의 정치인 알레산드로 폰타나, 정치학자인 파스콸레 파스퀴노와 진행한 진행한 인터뷰가 4장, 1979년 10월 10일과 16일 두 차례에 걸쳐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진행한 강의가 5장, 그리고 푸코가 1981년 발표한 짧은 연설문이 6장입니다. 이 연설문은 1984년 6월 푸코의 죽음 이후 리베라시옹에 게재되기도 했지요. 푸코의 스탠퍼드 강연은 1978년 캠브리지 대학을 시작으로 옥스퍼드, 버클리, 미시간, 하버드, 프린스턴 등 여러 대학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태너 강연(Tanner Lectures on Human Values)’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강연입니다. 정치적 정의에 대한 연구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마이클 샌델의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What Money Can’t Buy)> 역시 1998년 샌델이 옥스퍼드에서 같은 기획에 따라 진행한 동명의 강연 내용을 담고 있지요.

 

푸코는 흔히 ‘포스트구조주의(post-structuralism)’라고 불리는 일군의 프랑스 철학자들 가운데 비교적 행운을 누린 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포스트구조주의라는 명칭에는 여전히 많은 의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출발합시다. 이 이름은 프랑스 현대 철학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국내에서 광범위하게 통용되지만 정작 프랑스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며, 미국이 프랑스 현대 철학을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학계와 언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표현이기도 하니까요.) 푸코는 1961년 <광기의 역사> 이후 일찌감치 대학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고, 1970년에는 이폴리트의 후임으로 프랑스 학계에서 가장 영예로운 자리로 여겨지는 콜레주 드 프랑스(college de France) 교수로 취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말과 사물> 등의 저작을 통해 학계에서의 인정과 권위는 물론 대중적인 명성도 함께 누렸지요.

 

프랑스 내에서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유럽을 넘어 미국이나 일본 등지에서도 푸코의 사상에 많은 관심을 보인 바 있고, 한국에서도 동시대의 다른 사상에 비해 상당히 일찍 푸코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푸코의 저작은 <성의 역사> 1권 ‘앎에의 의지(Volonte de Savoir)’인데, 이때가 무려 1979년입니다. 당시 한국 사회의 상황이나 같은 책이 프랑스에서 출판된 시기가 1976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빠른 시점이었지요. 또 현재는 푸코가 생전 출간한 저작들 가운데 레이몽 루셀에 관한 책 한 권을 제외하면 모두 한글로 번역되어 들어와 있기도 합니다. 일부 다른 저작들 가운데 초기 번역에 문제가 있었던 것들도 이후 몇 차례 개정을 통해 문제점들을 많이 해소했고요. (참고로 푸코 사후 그의 인터뷰, 강의록, 각종 서평과 후기, 미출간 논문 등을 엮은 <말과 글>이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는데, 이 내용은 국내에는 극히 일부만 소개되어 있습니다.) 푸코가 사망한 지 30년이 넘게 지난 최근까지도 그의 사후 출간된 강의록이나 관련 연구가 대중에게 소개되고 있는 실정까지 생각한다면 정말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대부분의 사상이 그렇듯 푸코의 사상 역시 한두 마디로 단순히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문제를 설정하고 접근하는 푸코만의 독특한 방식과 방대한 저작, 학문과 현실을 넘나드는 왕성한 활동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고요.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푸코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 중인 것이겠지요.

 

우선 편의 상 푸코의 사상(과 그에 대한 접근)을 몇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생각해봅시다.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구분해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네요. 첫째는 사회적 갈등과 권력의 문제를 경제적인 적대와 계급투쟁의 관점이 아닌 새로운 정치와 윤리의 차원에서 다루는 푸코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새로운 담론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는 (물론 나름의 이론적 변천을 겪으며 변화했습니다만) 어쨌거나 사회적 갈등을 주로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반면, 푸코는 자본이나 노동의 측면이 아닌 자기배려와 같은 윤리나 특정한 주체가 만들어지는 정치 과정에 더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가 고고학이라고 명명한 역사적 방법을 통해 훈육하는 권력, ‘규율권력(pouvoir disciplinaire)’이라고 하는 권력의 새로운 유형을 밝혀내지요. 푸코는 권력의 문제를 단순히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로 파악하거나 이러한 관계를 만든 제도나 생산양식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다양한 사회적 집단 사이에서 작동하는 강압과 동의의 복합적 관계로 파악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통치성(gouvernementalité)’, 혹은 ‘통치 기예(art de gouverner)’라고 부르는 문제 설정에 따라 권력과 저항의 문제를 다루지요. 푸코의 이러한 접근 방식은 단순히 마르크스주의 이후에 등장한 사회 비판의 유형이나 그가 주로 활동했던 1970년대를 넘어 오늘날까지도 광범위한 권력 현상을 사유할 수 있는 지평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주체화(subjectivation) 이론에 있어서의 푸코입니다. 주체화는 푸코가 뒤로 갈수록 차츰 관심을 기울인 쟁점이기도 합니다. 초기에 푸코는 광기와 정신병에 대한 연구로 출발합니다. 한 사회가 광기와 정신병이라는 대상을 어떻게 규정하고 취급하는지,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사고방식이 어떻게 등장했고 오늘날처럼 자리매김 했는지 밝히고자 노력하지요. 그런 과정에서 푸코의 관심사는 자연히 주체의 문제로 이행합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단순하게 선험적으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면, 시대에 따라 정신병이나 범죄를 취급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 단순히 표면적인 수준에서 제도가 변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을 함축한다면, 역사에서 권력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이 질적으로 변화한다는 모종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면, 권력이 단순히 부나 사회적 자원의 배치 관계를 반영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환, 생산, 소통 등과는 다른 종류의 고유한 작동 원리를 가지고 있다면, 권력이 단순히 무언가를 금지하고 강제하는 방식만이 아니라 생산하고 유인하는 능동적인 기능 또한 수행한다면, 그로써 단순히 인간이 권력을 행사한다고 볼 수 없을 만한 권력 나름의 원리가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인간은 근대가 상상했던 것처럼 자유롭게 사고하는 존재가 아니라 권력에 의해, 권력 속에서 사고하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볼 수 있겠지요. 따라서 이 관계들을 탐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합니다. 앞서 등장한 격자(grille, grid)에 대한 비유 역시 이런 맥락에서 성립하고요. 즉 권력망 속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은 마치 격자처럼 권력이 만들어놓은 그물망을 따라서, 가능 경로만을 따라서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푸코는 통치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권력의 문제를 사유했던 것처럼 ‘행위 인도(conduire de la conduite)’라는 개념으로 이 문제에 접근합니다. 이 문제는 잠시 뒤에 더 자세히 논의하도록 합시다.

 

셋째는 역사학자로서의 푸코입니다. 푸코 자신이 고고학이라고 명명한 그의 탐구 방식은 역사 분석의 새로운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푸코가 범죄나 정신병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방식,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가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방식의 변천사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아직 밝혀지지 않았던 권력의 작동 방식을 파악하는 방법을 통해 푸코가 지닌 훌륭한 역사학자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지요.

 

자, 이런 주제들을 모두 다루기에 오늘 밤은 턱없이 짧습니다. 그러니 서두를 것도, 욕심낼 것도 없어요. 기왕에 촘스키와의 토론을 통해 푸코에 접근했으니 같은 방향으로 한걸음 더 가봅시다. 앞서 이들이 토론에서 다루는 ‘인간의 본성’이란 결국 인간의 합리성을 의미한다고 했었지요.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촘스키는 이를 바탕으로 현실에서 우리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반면 푸코는 촘스키가 생각하는 합리성 자체를 의심스럽게 바라봅니다. 인간이 비합리적인 존재라는 게 아니라 인간이 합리적이라는 믿음, 그리고 무엇이 합리적인가하는 질문과 이를 결정하는 기준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이러한 생각의 근간에는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본성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 그가 놓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 특정한 양식의 주체로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바로 주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무엇이 인간을 특정한 종류의 주체로 만드는가에 대한 물음이지요.

 

… (중략) ...

 

 

매순간 무수히 부딪히고 스쳐가는 경험들을 모래알에 비유한다면, 그것들을 정제하여 압축하거나 추상한 개념들은 벽돌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벽돌의 쓰임새는 다양합니다. 누군가는 그것으로 기운 책상이나 식탁 다리를 받힐 수도 있고, 화분 받침이나 누름돌로 쓸 수도 있습니다. 적당한 자리를 잘 찾는다면 장식용 오브제로도 사용할 수 있겠고 옆집 창문을 향해 던진다면 유리창을 깨뜨리는 흉기가 될 것이며 누군가의 뒤통수에 내리친다면 범죄에 사용한 둔기가 될 수도 있겠지요. 또 어쩌면 누군가는 그것을 모아서 담을 쌓거나 집을 지을 수도 있을 겁니다.

 

개념과 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 굳이 벽돌 몇 장 없어도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고 잘 살 수 있을 겁니다. 살짝 기운 책상다리는 얼마든지 외면하고 꽃받침 없이도 얼마든 행복할 수 있는 게 본래 사람이니까요. 오히려 그렇게 어두운 눈과 둔한 손이 행복의 열쇠일지도 모릅니다. 개념이니 논리니 하는 것 없이도 얼마든지 즐겁게 잘 살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없는 만큼 더 잘 살 수도 있습니다.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척도가 존재하기 전까지는 문제가 뭔지도,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기 마련이니까요. 어쩌면 사람의 행복은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서, 그가 모르는 딱 그만큼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쓸모없는 벽돌이 누구의 손에 들어가느냐, 어떻게 엮이느냐에 따라 그 쓰임새는 천차만별로 변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모종의 가능성이 생긴다는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자기 생의 기운 자리를 받치는 데 쓸 수도 있을 테고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할 것이며 정적을 논파하거나 그림자처럼 일상에 따라붙는 이름 모를 사태의 간지러움을 해명하는 데 쓸 수도 있을 겁니다. 장난감 따위를 만들 수도 있을 테고요.

 

개념과 논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공허한 사변, 혹은 우아하고 고상하게 보이는 모종의 취미, 혹은 학문이나 특수한 경우에 사용이 국한된 전문기술의 일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능성은 문자 그대로 무궁무진하니까요. (물론 정확한 사용이 필수겠지요.) 소위 포스트모던이라 불리는 지난 세기는 인간에게 더 이상생의 신비는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생의 허망함과 무의미에 대해 알고 있으며, 알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무언가를 욕망하고 헤매기를 단념하지 않지요. 안전한 일상에서 잘 짜인 쾌락과 안락 속에 부유(浮游)하기를 선택하고, 그 선택 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다고 눈과 귀를 닫습니다.

 

이 와중에 생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노라, 성공의 열쇠를 알려주겠노라는 가르침들은 도처에 넘쳐납니다. 나노 단위를 방불케 하는 촘촘한 처세술이 서점가를, 인터넷을, TV 속 곳곳을 점령하고 있지요. 이제껏 늘 그래 왔듯이, 이런 가르침들은 대체로 옳습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옳지요. 예외적인 가끔, 이를 테면 이름 붙이기 어려운 어떤 균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렇습니다. 딱 그 전까지만요. 이유야 어찌 되었든 경험으로 공고했던 세계, 안전했던 일상에 한 번 금이 간다면 어쩐지 그 뒤로부터 일상은 전처럼 일상적이지 않지요. (일상을 일상적이지 않게 만드는 불청객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밤으로 잠시 미루어 둡시다.) 대체로 이런 균열은 한 번 생기면 저절로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계속 삐걱대거나 모종의 위험 신호를 보내지요. 그래서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틈새를 메우거나 아예 세계를 다시 쌓을 필요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럴 때 필요한 게 바로 벽돌들이고요.

 

생각의 기본 단위로서의 개념과 그것을 직조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나가는 기술로서의 논리를 벽돌과 벽돌쌓기에 비유한다면, 푸코와 촘스키는 퍽 훌륭한 벽돌공이자 미장이인 셈입니다. 푸코와 촘스키의 대화에서 벽돌 몇 장쯤, 혹은 벽돌을 이어 붙이는 얼마간의 요령 정도는 엿볼 수 있으셨다면 좋겠군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3. 24. / Sutome Apothec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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