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철학과 사건>: Ch. 3

February 13, 2017

바디우는 예술의 세계는 진리의 다수성을 보여주는 탁월한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의 다수성은 어떤 의미일까요? 앞서 철학의 네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로서 정치를 논하면서, 바디우는 정치가 여럿에서 하나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나가 아닌 다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생각이지요. 바디우에 따르면 서로 다른 여럿의 진리가 존재하고, 서로 다른 진리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이 하나의 진리로 통합되는 과정이 바로 정치입니다. 여기에서의 다수는 단순히 여러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즉 사람의 수가 여럿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현대의 많은 철학은 '차이'에 주목합니다. 절대를 지향했던 근대의 여러 철학에 대한 비판이자, 동시에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근대의 여러 ‘-중심주의’가 만들었던 폭력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입장이지요. 진리의 다수성을 주장하는 바디우도 역시 차이를 말합니다만, 그는 정당한 차이, 자격을 갖춘 차이에 한해서 차이로서 인정할 것을 주장합니다. 즉 단순히 다르기만 한 것, 혹은 그저 개인적인 것까지 모두 그 자체로 차이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비판하는 것이지요.

 

하나의 사태 속에서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저마다에게 상이할 수 있습니다. 사태를 이해하는 수준도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수 있지요. 상이한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 다른 행동들을 할 겁니다. 사태를 이해하는 수준과 정도에 따라서도 생각과 행동에서 차이를 보이겠지요. 바디우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는 차이가 아닙니다! 단순히 이해관계에 따라 말과 행동을 달리 하거나, 사태를 똑바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릇된 판단에 기인하는 사고와 행동들은 모두 진리가 아닌 것들이니까요. 바디우에게 이런 것들은 비판과 극복의 대상에 지나지 않지요.

 

바디우가 말하는 차이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아무리 사유해도 그 자체만으로는 접점에 도달할 수 없는 입장들, 절대적으로 다른 진리에 속하는 입장들, 통약불가능한 입장들 사이의 차이입니다. 이러한 입장들의 존재 이면에는 서로 다른 진리들이 자리하고 있고, 이 여러 진리들의 존재를 가리켜 바디우는 진리의 다수성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 예술은 이러한 진리의 다수성을 훌륭하게 보여주는 영역이라고 말하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벨라스케스와 베이컨의 회화를 생각해봅시다.

 

 

…(중략) …

 

타르비와 바디우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이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얼마간 산만하게 전개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묻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전체 대화에 대한 각자 나름의 구상은 가지고 있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된 질서를 따라 전개되는 저술과 달리 대화라는 형식이 갖는 우발성 때문이겠지요. 바디우는 타르비의 관심과 질문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테고, 타르비 역시 자신의 질문에 대한 바디우의 대답을 미리 알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들이 생각하는 내용들이 어떠한 순서로, 어떠한 방식으로, 어떠한 형태로 이야기 속에 드러날 것인가는 바디우도, 타르비도 아닌 대화에 속하는 일이지요.

 

예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면서, 바디우는 대화 중간 철학적 글쓰기와 예술적 글쓰기의 차이를 언급하기도 합니다. 글쓰기의 시작부터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채로도 완전한 구조를 이미 갖고 있는 철학적 글쓰기와 달리, 예술적 글쓰기는 시작과 과정이 있을 뿐 그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떤 결과에 도달할지는 쓰는 사람조차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요. 바디우에 따르면 철학적 글쓰기는 사유 안에서 ‘이미’ 만들어진 내용들에 전달의 규약을 부여하는 절차인 반면, 예술적 글쓰기는 글쓰기의 과정이 내용 자체를 이룬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정치, 사랑, 예술, 그리고 다음 장에서 다룰 과학과 마지막으로 다루는 철학이라는 주제에 이르기까지, 바디우는 적절하게 자신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들을 소개합니다. 정치를 다루면서 ‘사건’의 정의와 의미를 밝히고, 사랑을 다루면서 ‘진리의 절차’와 ‘충실성’의 의미에 대해 논하지요. 예술을 다루면서 바디우는 ‘주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술(적 사건)에 있어 주체는 누구입니까? 단순히 예술 작품을 만드는 사람입니까? 고전적인 의미에서 예술의 주체는 예술의 창조자를 가리킵니다. 낭만주의에서 절정에 이른 예술가의 표상이지요.

 

타르비의 지적처럼 많은 경우 사람들은 주체와 개인을 동일시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술의 경우 이 주체는 예술가 내지는 작가에 해당하겠지요. 곳곳에서 스스로 ‘말라르메적’이라고 강조하는 바디우는 예술가는 결국 작품 속에서 사라지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예술의 이념이라고 덧붙이면서요.

 

바디우는 예술의 주체를 작품의 출처나 기원이 아닌 작품 안에서 결정할 것을,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작품들의 체계 안에서 결정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술의 의미나 아름다움을 작품 안에서 찾으려는 고전적인 시도와는, 고전적이면서도 여전히 오늘날에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시도와는 전혀 다릅니다! 바디우는 단순히 하나의 작품, 개별적인 작품들이 아니라 이들이 이루는 체계가 새로운 유형의 주체성을 구성(configuration)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예술 작품과 접촉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보는 법과 듣는 법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즉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 작품과 개별 감상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그 작품이 속한 규약의 체계와 감각 사이의 관계가 되는 것이지요. 작품들의 고유한 체계가 존재하고, 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감상자가, 새로운 감각이 탄생하는 것이 바로 예술적 사건입니다. 창조자와 관람객 모두는 예술적 사건이라는 이 비인격적 주체에 절대적으로 자신을 통합시키는 한에서만 주체적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주체가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주체가 속한다는 바디우의 사유가 잘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예술에 대한 바디우의 이러한 관점은 쿤데라가 모든 탁월한 소설은 자신만의 고유한 소설사를 갖는다고 말한 지점이나, 니체가 모든 훌륭한 저작은 자신만의 독자를 창조한다고 표현한 지점과도 공명합니다. (예술을 포함해) 어떤 대상의 의미는 그것이 속한 유(類)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관점이자, 그 유의 역사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관점이지요. 아직 자신의 독자는 태어나지 않았다는, 자신의 저작이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니체의 선언은 사건이 주체를 창조한다, 창조해야 한다는 바디우의 생각과 일맥상통합니다. 사건 속에서 주체가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2. 13.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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