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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8, 2017

 

"내 이름이란 순간순간 변해 가는 나에게 자네들이 붙여 준 거야. 그런데 자네들이 너무 눈이 어두워 내가 변하는 것도 모르고 있거든. 그래서 언제나 내가 귀신이라는 거지. 내가 언제나 변함없는 나인 것도 자네들의 눈 어두움 덕분이라네."

"그건 눈 어두움이 아니라 우리가 사물을 파악하는 방식이야. 어느 정도의 불감증은 인식의 필수요건이지. 여하튼 자네는 우리 인식의 그물 속에서만 살고 있어. 그 그물이 치워지면 자네도 증발하고 말지."

"그런데 자네들은 그 그물을 치워버릴 수 없지 않나, 아마. 왜냐하면 자네들의 삶이 바로 그물이니까, 자네들은 내 보금자리를 치움으로 해서 목숨을 잃게 돼. 요컨대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은 나란 말이지."

 

"내가 이야기 하나 해 주지. 자네도 물론 자주 가 봤겠지만, 어제 나는 곡마단에 가서 줄 타는 여자를 보았어. 그 여자가 줄 위로 올라가기 전에 인부들이 줄을 팽팽히 당겨 놓았지. 그러나 여자가 올라가자, 그 가냘픈 몸무게에도 줄이 흔들리기 시작했어. 여자가 발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그 한 걸음은 다른 한 걸음을 위해 줄을 팽팽히 당기는 구실을 했지. 그러다가 그 여자는 줄 위에서 막 달리기 시작했어. 그처럼 한 번의 발걸음은 다른 발걸음을 위한 근거가 되는 거야. 그처럼 우리도 삶이라는 줄타기를 하면서, 우연을 타도하는 거지."

 

"그러다가 곤두박질하는 수도 있지. 자네가 이야기하는 건 자네들 삶의 특수한 경우야."

 

"아니, 대체로 우리 인간들의 삶의 방법이 그렇다네. 우리가 우연을 부정하는 건 아니야.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살아왔다는 사실이 우연을 길들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나? 언젠가는 자네 자신이 그 줄 위에 올라가 우리에게 묘기를 보여주어야 할 날이 올 거야."

 

 

 

​​- 이성복, '천씨행장(千氏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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