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재, 깁슨-그레이엄: 페미니즘과 차이의 정치경제학

December 20, 2016

오늘날 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한 부당한 차별과 편견의 극복을 주장하는 것을 넘어 소수자에 대한 불평등 전반과 권력과 억압에 관한 사회적 부정의를 다룰 수 있는 지평을 제공합니다. 지난 밤 버틀러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신체의 경계, 젠더와 문화 역시 이를 가로지르는 담론의 산물이라면, 페미니즘은 그 담론이 어디를 지나는가, 무엇을 나누는가, 담론이 가르는 경계 이편과 저편은 어떻게 갈리는가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이지요.

 

담론의 경계에는 종종 당위라는 이름의 표지가 달려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해야 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 당연한 것과 어색한 것, 정상인 것과 이상한 것의 구분은 많은 경우 직관과 관습이 정당화하는 당위에 기대고 있지요. 이 당위는 언제나 자신의 앞에 누군가의 자리를 감추고 있습니다. 어른은 술을 마실 수 있고, 어린이는 혼자서 여행을 할 수 없고, 전철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는 양보해야 하고, 무단횡단은 해서는 안 되고, 고등학생이 교복을 입은 모습은 당연하고, 젊은 여성의 삭발한 모습은 어색하고, 젊은 연인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은 정상이고, 다 큰 아저씨가 혼자 집에서 장난감을 조립하는 것은 이상하고, 와 같이, 당위 앞에는 항상 어른, 어린이, 나, 너, 학생, 여성, 연인, 아저씨처럼 당위의 주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위의 주체는 실질적으로 당위가 겨냥하는 대상, 당위에 종속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형식적인 주체, 문법적인 주체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 많은 당위를 지닐수록 주체의 역량이 작아지는, 덜 자유롭고 더 종속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요.)

 

가장 광범위한 당위의 주체/대상은 당연히 ‘사람’일 것입니다. ‘사람이 당연히 그렇지’,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이래야지’라는 커다란 그물이지요. 물론 당위가 반드시 부정적이거나 억압적인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상당한 편익을 제공하지요. 당위와 그것의 약속은 일차적으로 모든 경우, 매순간마다 매번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의를 제공합니다. 또 담론의 경계 안팎으로 나뉘는 사회적 권리와 지위의 분배에 관여하지요. 초창기 페미니즘이 남성과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요구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남성은 당연히 교육을 받아야 하고, 남성은 당연히 직업을 가질 수 있고, 남성은 당연히 자신의 주장을 떳떳하게 타인에게 제시할 수 있고, 남성은 당연히 ... 와 같은 모든 당위의 범위에 여성 역시 인간으로서 포함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렇게 페미니즘은 인간이라는 당위에서 배제되었던 여성의 온당한 자리를 주장하는 것에서 출발해 배제된 모든 것의 자리를 살피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동안 보편이라는 미명 아래의 하나의 ‘사람’이라는 인간관이 배제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모두 사람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 때까지요.

 

버틀러 이후 페미니즘은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종류의 단일성과 보편성을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깁슨-그레이엄의 주장은 단 하나의 경제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유일한 경제 체제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지요. 오늘날의 경제 체제를 자본주의, 또는 시장경제라고 합니다. 혹시 한번쯤 이 이름들에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으십니까? 생각해보면 시장은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오늘날의 경제만을 시장경제라고 부를까요? 시장은 중세시대에도 있었고 고대 그리스에도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있었고 페르시아에도 있었는데요. 자본은 어떻습니까? 앞서 일별한 저 시대들에는 화폐가 없었을까요? 아니면 자본가들, 부자들이 없었을까요?

 

오늘날의 경제가 시장경제라는 이름을 획득한 것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애덤 스미스라고 볼 수 있겠군요. 스미스는 우리에게 <국부론 The Wealth of Nations>이라는 약칭으로 더 익숙한 <국가의 부의 기원과 본성에 대한 고찰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이라는 책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주장을 제시한 바 있지요. 익히 알려진 내용들이니만큼 무엇이 국가의 부를 만드는가, 즉 부의 기원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스미스의 대답만 짚고 넘어갑시다, 바로 ‘시장’이지요. 부에 대한 문제는 시장에 맡겨두라! 부에 관련한 일은 국가가 나서서 이것저것 들쑤신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사람들의 선한 마음이나 공동체 의식과도 무관하다, 부에 관련한 일은 사람들이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서 자기 할 일을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시장이 알아서 할 것이다, 가 스미스의 통찰이었습니다. 이러한 경제 체제의 이름이 ‘시장경제’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까요?

 

시장경제의 다른 이름은 자본주의입니다. 오늘날의 경제에 자본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가장 적대적인 이름으로 알려진 마르크스의 공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스미스의 주장이 맞다고 가정해봅시다. 오늘날 우리는 시장이 전적으로 모든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시장이 경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 역시 쉽게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시장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들어있지요. 재화도 있고 용역도 있고 소비자와 생산자, 가계와 기업, 영리조직과 비영리조직, 노동과 지대, 이윤과 조세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시장의 핵심은 무엇인가, 무엇이 시장을 움직이는가, 라는 물음을 생각해볼 수 있겠군요. 이 물음에 대한 마르크스의 해답은 명료합니다. 바로 ‘자본’이라는 것이지요.

 

독일 관념론이 가장 위세 높던 시절 청년 마르크스는 유의미한 사고의 전환을 이끌어냅니다. <독일 이데올로기 Die Deutsche Ideologie>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일화를 따라가 봅시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가라앉고 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를 구하기 위해 그에게 다가가지요. 그리고선 말합니다. ‘네가 물에 가라앉고 있는 것은 무겁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니 어서 무겁다는 생각을 떨치도록 해라!’ 마르크스는 당시 독일과 관념론이라는 사상의 모습이 이러한 형국과 같다고 비판합니다. 물에 가라앉는 것은 무게라는 관념 때문이 아니라 신체라는 물질, 실질적인 무게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요. (사실 주장이라기엔 너무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헤겔에서 낭만주의로, 멀게는 현상학까지도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세밀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적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관념적 관계, 관념들의 관계가 아니라 바로 물질적 관계입니다. 이 물질적 관계의 핵심에는 경제적 생산양식(production)이 놓여 있고, 이 여타의 사회적 관계들은 이 생산양식에서 파생하는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초기 마르크스의 주장입니다.

 

단순하게 요약하면 다분히 투박하게 보일 수 있는 주장입니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 관습, 사회적 관계, 정치적 의사결정, 개인들의 사고방식 등은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영향 아래에 놓인다는 이 통찰은 마르크스는 꽤나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 O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부터 프랑스 혁명을 다룬 저작들을 지나 마침내 <자본론 Das Kapital>에 이르기까지요. 초창기 물질적 이해관계가 사회적 관계의 근간을 이룬다는 통찰에서 출발해 당대의 물질적 이해관계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고, 당대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분석하다보니 ‘자본’이라는 실체에 도달한 것이지요. 요컨대 ‘무엇이 사회를 움직이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마르크스의 대답이 ‘경제’였다면, ‘그렇다면 무엇이 경제를 움직이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이 ‘자본’이었던 셈이지요.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경제 체제의 이름이 바로 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본론 Das Kapital>은 끝내 미완으로 남았습니다. <자본론 Das Kapital> 집필에 앞서 마르크스는 자본, 노동, 지대 등에 다른 포괄적 저작을 기획했지만, 처음으로 작업을 시작한 자본에 대한 연구마저 다 끝내지 못하고 숨을 거뒀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기획은 광범위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인류사 거의 전 영역에 깊고 짙은 영향을 남겼습니다. 마르크스의 영향을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것은 오늘 밤을 훨씬 초과하는 일일 테니 다음으로 남겨놓고, 마르크스의 통찰이 마르크스 이후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우선 초점을 맞춰봅시다.

 

... (중략)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남녀 불문 유명 인사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공표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젠더와 관련한 문제의 상당수는 과거와 비교했을 때 분명 나아진 면면들이 있을 겁니다. 요즘이라면 여성이기 때문에 딸이 대학에 가지 못하게 반대하는 부모를 찾아보기는 어렵겠지요. 결혼 전부터 가사노동은 무조건 여성의 몫이라는 생각을 가진 남성이 있다면 배우자를 찾기가 그리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요? 딸을 대학에 보내는 부모의 마음에는 교육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지위 내지는 권리라는 관점보다는 막연하게나마 대학은 누구나 당연히 나와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 혹은 적당히 좋은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딸을 시집보낼 때 유리하리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결혼을 앞둔 신혼부부의 마음속에는 가사노동은 물론 부부가 함께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여성이 전담하고 남성이 돕는 방식 정도가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은연중에 묻어 있을지도 모르지요.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많은 것들이 제자리에 있거나, 혹은 더 은밀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거나 어떤 때는 그 자신마저도 속이는 방식으로요. 이를 테면 남자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사회생활에 성공하기 위해서고, 여자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결혼에 성공하기 위해서다, 와 같이, 누구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당당히 공표하지 못하지만 ‘그런 게 아니겠냐’ 정도로 은밀하게 생각하는, 또는 가사노동이야 부부가 동등하게 분담하는 게 맞겠지만 그래도 가족들 보는 눈도 있고 남자가 사회생활 하느라 고생도 더 많이 하는데 여자가 조금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게 좋지 않겠냐, 와 같이, 누구도 ‘이것이 옳다’고 선언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이쪽이 좋지 않겠냐’ 정도로 속으로 생각하는 것처럼요. 지난 밤 담론적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살펴보았듯이 젠더를 둘러싼 권력 역시 대개 누군가 권력을 행사하고 누군가 억압의 대상이 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역할과 지위를 배정하고 저마다의 자리를 분배하는 담론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진전은 더디고 개선은 어렵습니다. (오늘날 사회 개혁을 지향하는 대다수의 담론이 처한 상황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때로는 문제가 무엇인지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단순히 사람들의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거나,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다고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습니다.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더디고 힘들고 복잡한 문제들도 있겠지만, 의외로 많은 문제들이 쉽고 단순하고 자명합니다.

 

젠더에 관련한 문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번의 밤 동안, 몇몇의 입장과 이론들을 함께 살펴봤지만 구체적인 현실로 문제를 끌어당기면 복잡한 논의가 무색할 만큼 선명한 문제들이 태반입니다. 똑같은 직장에서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성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파악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단지 임신과 출산의 최종 과정의 당사자라고 해서 임신과 출산으로 여성의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굳이 대단하고 거창한 사고가 필요합니까? ‘일반적인’ 경우 남성이 여성보다 신체적으로 더 많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해서 이를 근간으로 무수한 불평등을 내포하는 현실의 사회제도들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무슨 복잡하고 정교한 논리가 필요하겠습니까.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부조리와 부정의를 파악하는 것이 그리 대단하고 거창한 일이 아니라면 역설적으로 문제는 비로소 어렵고 복잡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자명한데 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왜 달라지지 않을까? 왜 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될까? 사람들이 모두 다 멍청하기 때문이라는 쉬운 대답도 물론 가능하겠지만 문제의 해답은 그것보다는 조금 더 까다로운 것 같습니다.

 

이 문제가 정말 그렇게 개선하기 어려운가? 고치기 너무 복잡한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쉬워 보이는 이면에 다른 힘들의 관계가 놓여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세히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무언가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힘을 분산시키거나 굴절시키는 모종의 작용이 있는 것이 아닐까, 당장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지만 드러나지 않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와 같이요.

 

가벼워 보이는 작은 자갈 하나를 발로 툭 찼는데 돌멩이가 꿈쩍도 않는다면, 사실은 엄청 무겁다거나 바닥에 깊게 박혀 있다거나 어딘가에 붙어 있다거나 내가 헛것을 보고 헛발질을 하고 있다거나 어떤 것이든 무엇이든 모종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자명한 불평등의 역사가 길었다는 것은 단순한 자명함 이면에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질기고 강인한,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 만큼 끈덕지고 은밀한 힘이겠지요.

 

인간을 얽매는 이 힘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인간을 속박하는 자유의 굴레를 발견하고 극복하기 위해, 이 지난한 탐사를 위해 우리는 몇 가지 도구를 간신히 챙겨 들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페미니즘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사유와 실천의 지평 따위들이지요. 흔히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성에 관련한 속성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지, 서구의 근대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주체 개념은 어떤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는지, 윤리와 정의에 대한 대안적 사고는 어떻게 가능한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보편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 다른 집단들에게 폭력과 억압으로 작용해왔는지, 법적 책임이 갖는 한계와 정치적 책임의 가능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운 유형의 교환관계를 상상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몇 가지 가능성에 기대서 내일을 전망하고 더듬으면서 앞으로 조금 더 가봅시다. 이 한심한 비극에 더불어 명랑할 수 있는 유쾌한 정신과 사소한 대화들을 보탠다면 조금은 경쾌하게 걸을 수 있을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6. 12. 20. / 콘텐츠코리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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