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현, 주디스 버틀러: 자연은 과연 얼마나 자연적인가

December 13, 2016

주디스 버틀러는 오늘날 가장 논쟁적인 학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퀴어 이론의 대변자로도 유명하지요. 버틀러는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유대교 율법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청소년기 그녀는 유대 공동체는 물론 가정과 학교에서도 늘 문제아였다고 합니다. 유대 공동체의 가르침은 물론 부모나 선생의 권위에 도전하기 일쑤였고, 스피노자나 헤겔 등을 읽으며 낮 시간을 보낸 뒤에 밤에는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술집을 드나들며 십대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군요. 헤겔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녀는 1990년 <젠더 트러블 Gender Trouble>을 발표하며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학자로 발돋움합니다. 오늘날까지도 페미니즘은 물론 정신분석이나 문화 비평, 탈식민주의와 하위주체성, 폭력과 윤리에 대한 탐구까지 활발히 지속하고 있고요.

 

버틀러는 난해한 저술로도 유명합니다. 미국의 철학자 로티에 따르면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토론에 오르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난해한 사상과 표현으로도 유명합니다.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간행하는 ‘철학과 문학(Philosophy and Literature)’은 1998년 ‘최악의 저자(the first-prize of bad writing contest)’로 버틀러를 선정한 바 있지요. 페미니즘에 관련한 내용을 다룰 때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헤겔에 비할 바는 아니겠습니다만 어떤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정도가 버틀러를 처음 접했을 때 나오는 일반적인 반응일까요.

 

어쨌거나 버틀러의 사상은 현대 페미니즘 담론에서 꽤나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어떤 맥락에서는 페미니즘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변화한 중요한 분기점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유럽의 지성사를 놓고 본다면 페미니즘은 크게 세 단계를 거치며 성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단계에서 페미니즘은 자유주의의 발달과 궤적을 같이 합니다. 19세기 본격적인 자유주의의 확장에 더불어 페미니즘은 여성의 참정권 획득과 균등한 교육의 기회, 직업 선택의 자유 등을 기치로 내걸고 활동했지요. 이 기간이 꽤 깁니다. 거의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지지요. 불평등의 역사가 길었던 만큼 이를 개선하는 과정 역시 쉽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초기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의 동등함을 주장하며 출발합니다. 여성도 남성과 같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여성도 남성처럼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와 같은 주장이 대표적이지요.

 

이러한 흐름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전환점을 맞습니다. 이 시기 페미니즘은 여성의 고유한 차이를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하지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봤던 내용을 되짚어 본다면 여성적 주체의 유형을 제시하는 이리가레나 글쓰기를 중심으로 여성성을 새롭게 창조할 것을 주장한 식수, 기존의 단선적이고 동일한 윤리관을 넘어 여성적 윤리로서 ‘돌봄’이라는 가치를 제시하는 길리건 등이 대표적으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의 첫 번째 흐름에서 성차는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긍정하는 방식으로든, 부정하는 방식으로든 양방면에 있어서 모두요. 긍정이고 부정이고 아예 성차라는 개념 자체가 도드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시기 페미니즘의 주장은 결국 ‘우리도 인간이다!’라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니까요.

 

두 번째 흐름에서 성차는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논제로 부상합니다. 이때 등장한 개념이 바로 ‘젠더’이고요. 여성이라는 성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지 파헤친 보부아르의 비판을 시작으로 페미니즘은 본격적으로 젠더 이슈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여성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신체적 성과 사회적 성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성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조건인가, 사회적 구성물로서 젠더라는 성 관념이 성립한다면 여성성의 개념과 가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등의 문제들이 쏟아져 나오지요.

 

버틀러를 기점으로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은 다시 한 번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버틀러는 성 정체성 자체를 문제 삼고 젠더가 아닌 섹슈얼리티에 초점을 맞춥니다. 버틀러는 크게 두 방향에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데, 하나는 기존의 페미니즘에 잔재하는 자연주의적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입니다.

 

전통적으로 페미니즘에서 여성의 신체는 성차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든, 그것을 긍정하고 옹호하는 입장에서든 문제적인 대상이었습니다. 성차를 부정하는 입장은 여성이 신체적 한계나 제약에 얽매이지 않고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또 신체적 특징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연역하는 모든 종류의 자연주의 우파 담론과 대항하기 위해 신체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고, 성차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여성에게 덧씌워진 부당한 관념들로부터 벗어나 여성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출발점을 여성의 신체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성차를 부정하는 입장은 보부아르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자칫 ‘남성 되기’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그렇게 흐르기 쉽습니다. 때문에 이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성차를 강조하는 2세대 페미니즘이 등장한 것이고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버틀러는 섹스의 탈자연화를 주장합니다. 요컨대 성과 신체의 문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전제에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버틀러는 성의 구분 자체로 권력 담론의 생산물이라고 규정하고 성 정체성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성 소수자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지평을 획득합니다.

 

버틀러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신체의 구분, 그리고 신체에 대한 이러한 구분을 중심으로 한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 역시 ‘자연적이지 않다’고 비판합니다. 페미니즘은 ‘해부학은 운명(anatomy is destiny)’이라는 자연주의적 담론을 비판하기 위해 젠더라는 개념을 찾아냈지만, 젠더 개념 역시도 자연주의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요, 이전 시간까지 누차 언급한 바 있듯이 자연주의적 시각은 젠더 이슈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입장이지만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무엇이 자연적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그것의 자연성을 명확하게 입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연주의가 말하는 자연은 대개 직관과 관습에 기댄 경우가 많은데, 즉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나 서로 다른 성 사이의 사랑을 당연시하는 관점 등이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진짜 자연’에 존재하는 성과 생식의 다양한 범례들에 대한 무지와 외면 위에서 작동합니다. 또 사랑을 항상 생식과 연결해서 생각하는 오늘날의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고요. 여성이, 혹은 여성만이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출산에서 여성의 기능과 의미를 연역하는 것은 실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한 발상입니다. (실은 이것마저도 여성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임에도 말이지요.)

 

자연주의의 논지는 상당 부분 오늘날 작동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기대고 있습니다. 이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쉽게 말한다면 소위 ‘그럴 만하니까 그렇다’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이러한 관점은 포장지만 바뀐 진화론, 그 가운데에서도 적자생존이나 무한경쟁과 같이 가장 악질적인 핵심만 추린 진화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연이 실제로 그렇게 작동하지도 않거니와, 설령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상황을 다룰 때에도 이러한 자연주의는 그리 긍정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주장 위에서 개별 행위자의 역량이나 사회적 힘들의 관계를 재배치할 수 있는 가능성은 크게 위축되기 때문이지요. ‘그럴 만하니까 그렇다’는 주장의 이면에는 ’바뀔 만하다면 바뀌지 않겠냐’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얼핏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합리적인 관점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관점이 실제로 현실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어떤 효과를 낳는가를 생각해본다면 그리 쉽게 수긍하고 용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여자가 운전하다 욕을 먹는 것은 그만큼 많은 여성이 운전을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비슷한 직급에서 같은 직무를 수행하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것은 어쨌거나 남성이 여성보다 더 조직에 기여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지 않겠느냐, 와 같은 식으로요. 결국 이러한 관점은 현실에 존재하는 부당한 힘들의 관계를 재배치할 수 있는 근거와 역량을 상당 부분 소실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페미니즘은 자연주의의 바로 이러한 한계를 비판하고 극복하기 위해 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신체적 성에서 사회적 성, 즉 젠더라는 기준으로 바꿀 것은 제안하지만, 버틀러가 보기에는 이러한 전환 역시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여성’이라는 젠더를 부각시킨 나머지 그 이면에 자리하는 차이들을 사상시킨다는 점에서요. 단일하고 동질적인 주체 개념은 여성들 사이에 나타나는 다양한 차이를 간과하거나 젠더 관계를 남성과 여성이라는 양성체계에 한정하기 쉽습니다. 버틀러에 따르면 젠더는 인종적, 계급적, 민족적, 지역적,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 등 정체성의 다양한 유형과 얽혀 있으며 정치적, 경제적 교차점들로부터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또 여성이라는 집단에 행사되는 억압의 유형은 여성혐오, 인종차별, 동성애혐오, 성의 상품화 등 다양할 뿐 아니라 상호 교차적이고 복합적입니다. 즉 섹스로 구분을 하든, 젠더로 구분을 하든 마찬가지로 ‘여성’이라는 단일한 개념을 사용해서는 성을 둘러싼 문제를 다루는 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버틀러는 섹스의 탈자연화를 주장합니다. 신체와 자연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 역시 언제나 문화적 담론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신체는 담론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습니다. 신체의 의미를 읽어내는 행위 역시 결국 자연이라는 영역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즉 자연으로서의 신체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과 분리할 수 없고, 신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즉 자연으로서의 신체를 어떻게 문화로 변형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으니까요. 이러한 차원에서 버틀러는 젠더를 이루는 담론과 그것의 작동 방식을 탐구합니다. 크게 보았을 때 권력, 규범, 담론, 언어의 차원으로 나누어 접근할 수 있겠군요. 하나씩 살펴봅시다.

 

 

... (중략) ...

 

 

오늘날 우리는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민족, 계급 등 기존의 중심 범주가 더 이상 단일한 정체성의 단위로 작동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예전부터 늘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특정한 속성에 기댄 정체성을 중심으로 주체의 단위를 설정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남성이라는 속성을 지닌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가, 노동자라는 속성을 지닌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가, 노인이라는, 어린이라는, 고향이 대전이라는, 고등학생이라는, 일본인이라는 속성을 지닌 사람들은 동일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점점 더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혼란은 대개 특정한 정체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로 이어집니다. 버틀러가 주장하듯이 결국 특정한 속성이 개인의 정체성으로서 갖는 의미가 담론의 수행적 상황에 기대고 있다고 한다면, 주체에게 정체성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수행적 상황에서 특정한 정체성을 반복해서 호명해야 하니까요. 즉 ‘너와 나는 똑같이 고등학생인데도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왜 너는 저렇게 생각하지?’라는 물음은 즉각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등학생은 이러저러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이어집니다. 여자라면 이래야 한다, 젊은 사람은 이래야 한다, 대한민국 사람은 이래야 한다, 고졸이 무슨 대기업이냐, 부모 없이 자라서 인성이 엉망이다, 장애인이 무슨 여행이냐, 식당 종업원이 어디서 말대꾸냐,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 마땅히 이래야지,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구축된 정체성의 경계들이 의심과 비판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견고해지는 시대가 펼쳐집니다. 가부장제, 인종주의, 쇼비니즘,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전통주의 등은 모두 이러한 조건 속에서 비판 받는 동시에 강화됩니다. 이러한 힘들이 공동체의 규칙을 묻고 고민하는 건전한 방향으로 흐르면 좋겠습니다만, 대체로 그 역방향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대개 정체성의 소용돌이는 그것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바깥으로 몰아내는 방향으로 휘돌기 마련이고, 바깥으로 밀쳐진 사람들의 자리를 박탈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많은 자리에서 목도할 수 있습니다.

 

버틀러의 주장처럼 정체성이 수행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경계는 언제나 유동적이고 변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깝게는 언어와 그것의 수행성 자체가 항상 상황적이기 때문이고, 멀게는 그것이 시대와 역사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언어의 수행적 의미에 균열을 만드는 것이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1997년 출간한 <혐오 발언 Excitable Speech>에서 버틀러는 언어가 사회적으로 갖는 수행적 의미를 탐구하면서, 혐오 발언을 법적으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젠더 트러블 Gender Trouble>만큼 논란이 컸지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문제가 사회적 차원으로 부상하면서 이것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었으니까요.

 

혐오 발언을 규제하는 이유는 그것이 발언의 대상에게 직접적인 상처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러한 발언을 할 수 있는 사람/집단과 발언의 대상이 되는 사람/집단의 자리를 드러내고 그것들의 관계를 공고화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혐오 발언을 단순히 말이 아닌 구체적인 폭력이자 차별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흑인 출입 금지’라거나 ‘암탉이 울면 그릇이 깨진다’와 같은 표현들은 문자 그대로 언어적 폭행이니까요. 혐오 발언이 사회적 약자의 열등한 지위에 대한 재확인이자 이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행위라는 의견은 일견 상식으로 보입니다. 신체적 폭력을 법으로 규제하는 것처럼 이러한 폭력에 대해서도 규제가 필요하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고요.

 

혐오 발언의 법적 제제를 반대하는 버틀러는 당연히 그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거나, 그러한 발언에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버틀러에 따르면 혐오 발언을 규제하는 것은 언어의 작동방식과 수행적 의미를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발언을 규제하는 것 역시 사회적 관계를 재확인한다는 점에서 혐오 발언과 기능적으로 유사한 효과를 낳습니다. 오히려 국가 권력에 의해, 공동체적 권위에 의해 이러한 관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이를 테면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발언을 국가가 금지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혐오가 사회 내에 존재한다는 것을 국가가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고, 이런 상황은  단순히 한두 마디 말들이 오가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미시적으로, 은밀하게, 그런 만큼 끈적하고 치밀하게 그 집단에 속하는 구성원들을 옥죄는 힘으로 작용하기 마련입니다.

 

혐오 발언이라는 문제에서 언어의 작용과 권력의 문제를 비판하면서 버틀러는 언어의 수행성이 발언자의 의도에 필연적으로 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이를 테면 흑인에 대한 차별적 의미를 전달하는 ‘니거(nigger)’라는 표현을 생각해 봅시다. 웬만한 백인보다 더 수입이 좋고 인기가 많은 흑인 가수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 이 낱말에 담긴 모욕의 의미는 쉽게 무너져 내립니다. 언어의 의미가 상황적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상황을 비틀어서 언어를 비틀면 언어에 기반한 정체성들의 관계에도 균열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단순히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방식으로 말의 모욕적 힘과 그것에 기인하는 불평등한 관계를 허무는 것이지요.

 

버틀러는 이러한 담화를 ‘되받아치기(speaking back)’라고 표현합니다. 특정한 정체성에 대한 기대와 의미를 함축하는, 그래서 정체성에 기반한 사회적 관계를 공고히 하는, 그래서 사회적 관계들 사이의 차별과 불평등을 고착시키거나 심화시키는 언어를 되받아침으로써 끊임없이 말과 정체성과 사회적 관계들을 되묻는 것이지요. 불평등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권력이 작동합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권력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것이 특정한 방식으로 작동할 때 불평등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불평등을 만드는 권력이 언어를 따라 움직일 때, 권력에서 언어를 빼앗는 방식으로 불평등을 다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언어를 재배치함으로써 권력을 재배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버틀러의 사상은 페미니즘이 단순히 여성의 문제나 성차의 문제를 넘어 권력과 소수자의 문제를 폭넓게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언어에 주인이 없는 것처럼 권력에도 영원한 주인은 없으니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6. 12. 13. / 콘텐츠코리아랩

info@labyrinthos.co.kr

Please reload

© Labyrinth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