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식, 아이리스 매리언 영: 차이의 정치

December 6, 2016

오늘 국회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제2차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오늘 청문회는 미르, K스포츠재단이 국내 대기업을 대상으로 모금한 자금과 관련해서 대통령의 뇌물수수 혐의와 대기업의 청탁 의혹을 규명하는 것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국민들의 관심도 대단합니다. 시청률 조사기관에 따르면 국회방송의 금일 청문회 생중계 시청률은 전체 135개 채널 가운데 1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고 하는군요. 다른 방송사의 중계와 인터넷 중계까지 감안한다면 정말 많은 국민의 이목이 청문회에 쏠려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번 사태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전적으로 정경유착에 기인한 부정부패나 일부 기관, 공직자의 위법한 행위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조금 냉소적으로 말하면 한국 사회에서 소위 재벌의 부당한 행태나 공직자의 부정한 축재가 어디 어제오늘 일이었습니까.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것을 바로잡겠다고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이나 다 똑같다 냉소하는 사람들이나 별수 없다 체념하는 사람들이나 별 관심 없는 근면한 생활인들 역시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위장전입, 음주운전, 탈세부터 시작해 교육과 병역에 관련한 내용까지 고위 공직자의 인사청문회 때면 크고 작은 비리들이 으레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모습이었으니까요. 어디 그 사람들 뿐이겠습니까, 조금씩 각자가 나름대로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편법을 동원하고 슬쩍 규칙을 비켜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대체로 이 사회의 풍경이 아니었던가요?   

 

형식적으로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임에도 사람들이 크게 분노하는 까닭은 저들이 그동안 생각했던 것, 믿어왔던 것과 도무지 너무나 다른 현실이 나날이 처참하게 드러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믿고 싶었던 현실의 민낯과 마침내 마주친 것이지요. 혹은 애써 외면했던 현실의 자락이 드디어 부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외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눈앞에 드러났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이 사회의 원칙과 규칙에 대해, 올바름과 정당함에 대해서요.

 

오늘 우리가 다룰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정치학자입니다. 오늘은 영의 주장을 중심으로 젠더 이슈를 포괄하는 사회적 기준과 정의의 문제를 함께 살펴봅시다. 영은 정의와 책임의 관점에서 젠더 이슈를 바라봅니다. 정치학자로서 영이 제시하는 주장은 페미니즘의 관심사를 초과하지만, 영은 정치철학에 대한 자신의 관심이 여성주의 운동에서 비롯되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영은 단순히 이론가로서만 아니라 세계 각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바 있고요.

 

정치학에서 영이 주로 관심을 기울인 영역은 정치철학입니다. 정치철학은 전통적으로 국가 권력의 기원, 공동체와 구성원의 관계, 정부의 합법성과 통치의 정당성, 평등과 자유 등 정치적 가치의 문제, 정치와 윤리의 관계 등을 다루어 왔습니다. 플라톤을 시작으로 마키아벨리나 홉스, 로크, 루소로 이어지는 사회계약 삼총사를 비롯해 스피노자, 칸트, 헤겔,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이름도 쟁쟁한 사상가들이 그야말로 득실거리는 영역이지요.

 

사회계약 삼총사가 저마다 근대 정치체의 구성에 관련한 이론적 기틀을 제공했지만 실제로 근대적 의미의 정치철학은 공리주의의 등장과 함께 시작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전까지의 정치철학이 주로 공동체의 구성이나 통치의 원리에 관련한 내용을 다루었다면 공리주의는 본격적으로 공동체의 의사결정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지요. 공리주의 이전의 정치철학이 주로 가치나 관념의 수준에서 논의를 풀어나갔다면 공리주의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봅니다. 즉 전통적인 정치철학이 선험적인 차원에서 정치의 문제를 다루었던 반면 공리주의는 경험적인 차원에서 정치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지요. 공리주의는 단순히 국가의 기원과 발생, 또는 통치의 기준으로서의 법의 의미, 또는 자유, 평등, 인권, 경제성장 등 가치들의 위계를 묻지 않고, 어떠한 정치적 판단, 즉 공동체의 의사결정이 그 구성원의 실질적 효용(utility)을 증진시킬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여기에서 도출되는 기준이 저 유명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s)’이지요.

 

처음 등장 이후 그것의 한계에 대한 많은 비판적 논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는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의사결정의 준거점으로서 강력한 편의와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럿이 무언가를 결정할 때 끝까지 의견차를 좁히지 못한다면 결국 다수가 원하는 방향, 즉 더 많은 수의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현대 국가에서 역시 정책의 입안과 집행의 중요한 기준으로 다수성과 효용을 배제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현대 정치철학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을 롤즈는 자신의 사상을 공리주의 비판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롤즈는 아주 직관적인 수준에서부터 공리주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 말은 그럴듯하지만 롤즈는 실제로 그 규칙을 누군가에게 적용한다면 어떨지 묻습니다. 이를 테면 당신한테요. 당신을 포함해 다섯 사람이 함께 여행을 가는데, 다수결에 의해 여행경비를 당신이 모두 부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당신은 물론 손해를 보고 불쾌하겠지만 나머지 네 사람은 공짜 여행으로 싱글벙글 크게 즐거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결과적으로 다섯 사람이라는 집단 전체의 효용을 따져본다면, 전체 비용을 공평하게 각출하는 방식이나 각자가 사용한 비용을 각자가 내는 방식에서 발생하는 효용의 크기보다 당신이 불행하지만 나머지 네 사람이 크게 행복할 것이기 때문에 공리주의에 따르면 이러한 판단이 ‘올바른’ 판단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물론 공리주의의 관점에서는 이 문제를 부당한 처우를 당한 한 사람이 겪을 불행의 총량이 나머지 네 사람의 행복의 양보다 크기 때문에 이러한 판단은 올바르지 않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과 같이 경제적인 방식으로 셈할 수 없는 가치의 문제라면 어떨까요? 이를 테면 당신을 포함해 일곱 사람이 타고 있던 배가 바다 한복판에서 갑작스레 침몰하는 상황에서, 구명조끼는 여섯 개밖에 없는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구명조끼를 포기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질문을 조금만 바꾸면 문제는 더 복잡해집니다. 구명조끼를 포기할 사람은 누구여야 합니까?

 

아마 다양한 대답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나이나 앞으로의 가능성, 생존 확률, 집단에 대한 기여도, 제비뽑기 등 많은 방법이 있겠지요.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몫을 희생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있겠지요. 하지만 ‘여섯 사람이 살기 위해서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공동체의 원칙으로 채택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누군가 자신을 희생해서 나머지 사람을 살리는 행위나, 누군가 한 사람은 구명조끼를 입을 수 없다는 당면한 사실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 원칙을 우리가 정당하다고 채택하는 순간 우리는 집단의 이익을 명분으로 개인에게 무제한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공동체, 그것이 정당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공동체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이러한 원칙을 채택한 공동체가 공동체로서 유지가 가능하긴 할까요?

 

롤즈는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라는 자신의 원칙을 주장합니다. 정의는 이익이나 효용이 아닌 형평성과 공정성이라는 기준으로 다뤄야 하는 문제라고 보면서요. 롤즈가 제기하는 정의 두 원칙이나 원초적 입장에 대한 논의는 오늘은 잠시 괄호에 넣어둡시다. 롤즈 이후로 이러한 정의관에 대한 비판 역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롤즈를 계승해서 ‘자유적 평등(egalitarian)’을 주장한다고 볼 수 있는 드워킨이나, 롤즈가 <정의론 Theory of Justice>를 발표하자마자 강력하게 비판했던 노직(하버드에서 바로 옆 연구실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의사소통의 과정이나 의사결정의 구조에 관한 롤즈와 하버마스와의 논쟁도 생각해볼 수 있겠군요.

 

어쨌거나 롤즈를 기점으로 현대 정치철학의 주요 관심사는 정의의 문제로 이행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의 핵심에는 재화의 분배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롤즈에 따르면 공정으로서의 정의란 무엇보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경제적, 사회적 재화에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을 의미하고요. 이렇게 자유에 대한 평등한 접근 가능성과 기회의 균등을 주장하는 롤즈는 결과로서의 정의가 아닌 원칙과 과정으로서의 정의에 우선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구성원들이 출발선상에서 평등한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면 결과로서의 불평등은 용인 가능한, 심지어 용인해야만 하는 것이 되니까요.

 

영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합니다. 분배를 중심으로 한 정치철학의 정의 담론은 결국 모든 문제를 경제적 보상에 관련한 문제로 치환하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공동체의 문제들을 축소하고 은폐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비판하면서요. 또 영에 따르면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작동하는 지배와 배제의 문제는 분배라는 기준에 선행하기 때문에 분배적 정의로는 결과적으로 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나아가 분배에만 초점을 맞춘 정의관은 사회적 자원이나 사회적 관계 전반을 물화(reification, verdinglichung)시키는 경향까지 갖는다고 비판합니다.

 

다양한 이야기를 전개는 영의 주장의 핵심에는 ‘정치적 책임’이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영의 사후에 출간된 유작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Responsibility for Justice>에서 영은 아렌트를 계승하면서 ‘죄’와 ‘정치적 책임’을 구분할 것을 제안하지요.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에서 유대인 강제 호송에 ‘무지(ignorance)’라는 방식으로 적극 가담한 아이히만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에 따르면 재판정에서 유대인 학살에 관련해서 ‘나는 몰랐다’를 강변하는 아이히만, ‘관료로서 어쩔 수 없었다’고 자신을 변론하는 아이히만은 명백하게 유죄라고 볼 수 있지요. 아이히만은 전쟁범죄에 관련한 법적 책임은 물론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으로부터 역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인 대학살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나치에 수동적인 지지를 보낸 ‘나머지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재판정에 서지 않았다고 이들 모두가 전적으로 결백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직접 학살에 가담하지 않았으니 도덕적으로 괴로울 까닭도 없는 것일까요? 영은 후자의 경우 우리가 그에게 물어야 할 것은 도덕적, 법적인 책임과 구분되는 정치적 책임이라고 말합니다.

 

영에 따르면 법적 책임은 특정인을 어떤 행위나 사건의 책임자로 고발함과 동시에 그 잘못을 그에게 한정하는 효과를 낳습니다. 즉 누군가의 책임이 밝혀진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로 인해 책임을 면제받는 효과를 낳는 것이지요. 따라서 공적 영역에서 법적 책임에만 강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공동체성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영은 법적 책임과 다른 정치적 책임이라는 이념을 공적 영역에 도입하기 위해 ‘사회적 연결(social connec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에 따르면 어떤 상황에서 잘못을 범한 특정인을 찾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상황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테면 옆집에 유대인이 살고 있다고 당국에 신고한 주민도 연행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심지어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 역시 유대인을 수용소로 싣고 달린 석탄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지요.

 

물론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정치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잎새에 바람만 일어도 괴롭겠지요. 역설적으로 정치적 책임은 모두에게 책임을 묻기 때문에 오히려 책임을 면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조금 어려운가요? 특정 주체를 책임의 당사자로 호명하는 법적 책임은 나머지로부터 그를 분리시켜 책임을 그에게 한정합니다. 반면 책임의 당사자로 특정인을 호명하는, 즉 책임 주체를 나머지로부터 분리해 한정하지 않는 정치적 책임은 책임의 대상이 되는 상황이나 사건 앞에서 모두가 동일한 책임을 갖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책임에 관해 모든 사람은 동등한 자리에 서게 되고 누군가를 책임의 주체로 특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의 일화를 떠올려봅시다.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잡아다가 율법에 따라 돌로 치려합니다. 누군가 법을 들먹이며 예수에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 묻자 예수는 말없이 그 자리에 앉아 손가락으로 바닥에 무언가 끼적이기 시작하지요. 성난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진 사람들이 예수에게 재차 묻습니다. 예수가 잠시 일어나 그들에게 딱 한 마디 대답하지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손가락으로 흙바닥을 끼적입니다. 예수의 제자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어른으로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양심의 가책을 느껴 하나씩 자리를 떠났고, 종국에는 예수와 여인 둘만 그 자리에 남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대화합니다. ‘당신을 고발하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나도 당신을 정죄하지 않겠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극한의 수준에서 책임을 물었을 때 책임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공동체성입니다. 결국 영이 제시하는 정치적 책임은 누군가를 정죄하고 법정에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도 공동체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에 더 큰 의의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광부나 고발자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봅시다. 광부는 그저 가족을 위해 열심히 갱도를 오갔고, 고발자는 처벌이 두려워, 몇 푼 포상이 절실해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은 이러한 사태를 ‘구조적 부정의(structural injustice)’라고 지칭합니다. 나치가 통치하는 세상에서는 누구나 나치의 행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처럼, 영은 행위자 개인의 동기나 선의지와 무관하게 누구나 부정의로 이어지는 과정에 동참하게 되는 지점을 꼬집습니다.

 

영은 이러한 구조적 부정의에 참여한다는 사실, 즉 부정의를 생산하는 다양한 제도적 과정에 참여한다는 사실에서 정치적 책임의 근거를 찾습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건 각자가 부정의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 기여하기 때문이지요. 이 과정이 바뀌지 않는다면 부정의 역시 지속될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정치적 책임은 공유되고, 책임은 미래지향적이 됩니다. 공유된 책임은 오직 그 책임을 함께 나눠 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참여한 사회구조적 과정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때에만 비로소 면제될 수 있습니다. 영에 따르면 정치적 책임은 가해자와 피해자처럼 나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정의의 희생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까지도 부정의를 생산하는 과정에 연루되어 있는 한 모두가 예외 없이 그 구조를 변화시킬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말 그대로 공동체의 문제, 정치적 문제에 있어 미래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행위자의 작위와 부작위를 따지는 법적 책임이 과거에서 연유한다면, 구조적 부정의에 대한 응답을 행위자에게 요구하는 정치적 책임은 본질적으로 미래에 귀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중략) ...

 

 

사회가 변하면 사회의 각 자리들 역시 함께 변화합니다. 누가 어떤 자리를 갖게 되는지 역시 변하고요. 그렇다면 자리의 분배와 정당성, 즉 자리의 합당함을 묻는 질문 역시 매번 새롭게 다시 물어야 합니다. 자리의 올바름을 묻지 않는 사회는 반드시 위태롭기 마련이니까요. 자리를 갖지 않은 사람이 자리를 가진 사람에 대해, 이편에 선 사람이 저편에 선 사람에게, 서로가 서로에 대해 서로의 가진 자리를 의심하고 원망하기 때문이지요. 자리의 합당함은 결국 구성원들이 마땅히 공유하고 인정할 수 있는 원칙의 문제와 직결합니다.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원칙이 사라진다면 사회적 관계의 결과들 역시 죄다 부당한 것, 혹은 기껏해야 우발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말지요. 이 결과들이 부당한 것이 되었을 때 사회는 서로의 자리를 놓고 물어뜯는 아귀다툼의 모습이 됩니다. 이 결과들이 우발적인 것이 되어버린다면 사회는 무기력한 체념적 인간들의 집합이 되어버리지요. 그렇다면 정치철학이 잠들어버린 시대는 역설적으로 가장 정치철학이 필요한 시대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6. 12. 6. / 콘텐츠코리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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