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지, 엘렌 식수: 여성적 글쓰기

November 29, 2016

지난 시간에는 길리건이 제시하는 돌봄 윤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길리건은 인간의 도덕심리 발달 과정에 있어 모든 인간이 동일한 하나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경로의 발달 과정이 존재하며, 이러한 경로는 특히 여성에게서 많이 발견된다고 주장했지요. 길리건은 기존의 독립성과 평등을 중심으로 한 도덕 심리를 ‘정의 윤리’라고 지칭하고, 이에 대비되는 관계중심적인 도덕관을 ‘돌봄 윤리’라고 지칭합니다. 그리고 상이한 경로로 발달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두 도덕심리는 경쟁적이거나 상호배타적인 윤리가 아니라 인간의 경험에 있어 모두 필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합니다. 도덕심리의 발달을 다루며 길리건은 일단 기존의 이론이 제시했던 하나의 발달 과정을 남성적 도덕으로, 자신이 발견한 발달 과정을 여성적 도덕으로 바라봅니다.

 

이러한 견해는 근본적으로 남성적 방식과 여성적 방식, 혹은 남성적 가치와 여성적 가치라는 성차를 인정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길리건의 경우는 사례연구를 통해 경험적으로 성차를 인정하는 것이지요. 간단하게 요약하면 도덕심리 발달에 대한 기존의 가설에 부합하지 않는 사례가 다수 존재한다, 그래서 다른 사례들을 폭넓게 살펴봤더니 남성의 발달 경로와 여성의 발달 경로가 상이하다, 즉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발달 경로를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는 바로 성차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도가 되겠지요.

 

성차에 대한 논쟁은 페미니즘의 다양한 이론 지형 가운데 특히 민감한 부분입니다. 수많은 이론들의 이론적 분기점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극복은 페미니즘의 여러 입장이 공유하는 내용이지만, 이 지점에서 각각의 입장들은 성차를 인정하고 여성 고유한 가치를 주장하는 방향, 혹은 성차를 부정하는 보편주의라는 방향으로 나뉘니까요.

 

전통적으로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입장은 성차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페미니즘의 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은 근대 자유주의의 성장과 함께 등장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이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자격과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제시했던 근거가 바로 성차의 부정이었지요. 이들은 특히 남녀 사이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차이에서 곧바로 사회적 차이를 연역하는 것을 비판합니다. 신체적 차이가 대표적이겠지요. ‘여성은 신체가 연약하니까 힘쓰는 일에는 적합하지 않아’와 같은 인식이나 출산과 육아를 여성의 기본적인 책무로 전제하는 시각에 대한 비판도 여기에 속합니다. 이러한 시각은 결국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구실에 불과하다고 보면서요.

 

생물학적 본질주의에서 대한 강력한 거부반응은 페미니즘 내에서 종종 등장합니다. 근력이나 신체의 크기, 성기의 차이로부터 남녀의 사회적 역할의 구분이나 결혼과 출산에 관련한 제도의 정당성까지 쉽게 도출하는 관점에 대한 일종의 거부반응이지요. 성차를 부정하는 페미니즘의 입장에 따르면 성차를 정당화하는 것은 곧 자연을 구실로 여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과 마찬가지고, 남녀 사이의 신체적 차이와 자연적 차이를 부각시키는 것 역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이리가레를 다루면서 여성의 신체적 특성을 근간으로 주체가 아닌 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존재론을 살펴볼 때,이리가레의 주장에 본질주의라는 비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성차를 주장하는 방식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길리건처럼 경험적인 방식으로 성차를 입증하려는 시도가 아닌 선험적인 방식으로 성차를 다룬다면 페미니즘 안팎에서 ‘어마어마한’ 비판에 마주치기가 쉽습니다. 바로 엘렌 식수의 주장처럼요. 엘렌 식수 역시 여성이라는 차이에 주목하는데, 역시 곧바로 본질주의라는 비판과 사회적 실재에 대한 객관적 탐구가 아닌 ‘주관적 견해’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따라서 등장했습니다.

 

엘렌 식수는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 비평가입니다. 일단은 비평가로 소개했습니다만 직업을 딱 하나로 뚜렷하게 정의하기는 어렵군요.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많은 사상가들과 비슷하게 식수 역시 활동 분야를 한 가지로 한정하기 어렵습니다. 영문학을 전공한 뒤 고등학교 영어교사를 첫 직업으로 선택했고, 이후 제임스 조이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마친 뒤 다수의 시, 소설, 희곡 등을 집필했으니까요. 파리8대학의 설립에 관여했고 이곳에서 유럽 최초로 ‘여성학’ 박사과정을 개설하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정신분석과 글쓰기와 관련한 관점에서 여성과 무의식이라는 주제를 다루었고, 1980년대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확장해서 제3세계의 소수자 문제를 다룹니다. 1990년대에는 주로 알제리 출생의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한 자전적 글쓰기를 소설적인 방식으로 다루고요. 이러한 지적 여정을 포괄하려면 차라리 사상가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까요?

 

이리가레가 시적 글쓰기에 주목했던 것처럼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écriture féminine)’라는 대안을 제시합니다. 식수가 말하는 여성적 글쓰기는 사실 논란이 많은 개념입니다. 쉬운 이해를 위해 다소 도식적으로 정리한다면, 식수는 기존의 정신분석학이 제시하는 남근중심주의(Phallocentrism)를 비판하는 동시에 데리다가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를 비판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한 글쓰기의 의미에 대한 강조를 계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식수는 신화나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문화적 상징을 분석하면서 이러한 상징에 숨어있는 편견을 폭로합니다. 즉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이라는 이항대립 구도의 세계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러한 세계관에서 우월한 것들이 어떻게 남성적인 것과 연결되고 열등한 것이 어떻게 여성적인 것과 연결되는지 밝히면서요. 식수가 제시하는 여성적 글쓰기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 자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식수는 1962년 데리다와 처음 만난 뒤 2004년 데리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와 교류하며 데리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방금 언급한 글쓰기의 의미에 대한 강조나 이항대립적인 세계관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는 언어의 특징에 대한 통찰 등은 모두 데리다의 사상에서 핵심적인 내용들이지요. 오늘 밤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식수의 사상을 함께 살펴봅시다. 기존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그녀의 비판과, 그녀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여성적 글쓰기에 초점을 맞추고 함께 살펴봅시다.

 

 

... (중략) ...

 

 

식수는 기존의 정신분석이나 문예비평이 사용하는 주요 개념을 공유하는 만큼 이들의 논점을 뒤집어서 비판하는 효과를 갖지만, 동시에 이들이 갖는 한계 내지는 이들에게 쏟아졌던 비판 역시 고스란히 함께 계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식수의 주장은 주류 정신분석의 시각을 비판하지만 이를 위해 정신분석이라는 영역에 머물기 때문에, 정신분석학 자체에 대한 비판 앞에서 자신이 비판하던 주류의 시각과 함께 도매금으로 부정당하고 마는 것이지요.

 

식수를 포함해 이리가레, 크리스테바 등은 프랑스 현대 페미니즘의 이론적 개척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르웨이 출신의 페미니즘 문예비평가 토릴 모이는 이들 셋을 통틀어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의 새로운 삼위일체(new holy trinity of French feminist theory)’라고 일컫기도 했지요. 이들에 앞서 라캉은 기존의 프로이트적 시각을 새롭게 해석해 정신분석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는데, 크게 보았을 때 이들은 라캉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계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체로 이들이 주류 정신분석의 시각에 극도로 비판적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사고의 틀이나 개념의 원천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요.바로 이 지점에서 이들은 자신이 비판했던 주류의 시각과 함께 수렁에 빠지고 맙니다. 즉 이들의 이론은 라캉(이나 주류 정신분석)이 상징계의 질서를 말할 때 그것이 어떻게, 교묘하게 여성 억압적인 시선을 감추고 있는가를 폭로할 수 있지만 정작 상징계니 상상계니 하는 것들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 앞에서는 덩달아 속수무책인 셈이지요.

 

식수가 자신의 대표적 에세이의 제목으로 차용하기도 한 메두사의 신화를 살펴봅시다. 메두사는 아테나 여신의 저주를 받고 흉측한 괴물로 변하는데, 그 전까지는 빼어난 외모의 소유자로 등장합니다. 특히 아름다운 머리카락으로 유명했고요.수많은 남성들의 구애를 받던 메두사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연인이 되는데, 어느 날 이들은 아테나 여신의 신전에서 정사를 나누다가 여신에게 들키고 맙니다. 화가 난 아테나는 그녀를 괴물로 변하게 만들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모두 뱀으로 만들어 버리지요. (이러고도 화가 안 풀렸는지 나중에는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목을 베는 것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잘 알려져 있듯 신화에서 메두사는 누구나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면 돌로 변해서 굳어 버리게 만드는 괴물입니다.

 

프로이트는 성욕과 죽음의 관점에서 이 신화를 바라보며 메두사의 머리를 여성의 성기로 해석합니다. ‘자르다’라는 참수의 행위와 거세를 연결시키고, 여성의 성기를 페니스의 부재로 인지하는 남자 아이의 인식을 통해서요. 한편 심리작용의 양가성에 관한 프로이트의 관점을 여기에 접목시킨다면 거세 공포는 동시에 매혹과도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프로이트의 주장을 따라) 남성의 시각에서 본다면 여성의 신체는 거세 공포의 근원인 것과 동시에 발기의 이유이기도 한 것이지요. 이에 따르면 메두사의 머리를 본 사람들이 돌처럼 굳는 것은 발기와 거세 공포를 동시에 의미합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거세 공포는 다방면에서 등장하는데, 이 경우에 관련해서라면 어린 남자아이가 페니스가 없는 여성의 성기를 보고 그것이 잘렸다고 생각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심리라고 볼 수 있겠군요.

 

식수는 이러한 시각을 전형적인 남성중심적 시각이라고 비판합니다. 즉 여성의 성기에서 거세 공포를 느끼는 것,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여성을 ‘두려운 존재’로 연결시키는 것은 여성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관찰자의 심리적 상황에 달린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 여성의 신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거세된 신체라고 바라보는 것 역시 여성성과 비정상성을 연결시키는 남성중심적 시각이라고 비판하지요. 이러한 구도에서 남성적 주체는 자신이 느끼는 비정상성에 대한 공포를 여성에게 전가하고, 남성적 주체에 의해 만들어진 상징적 질서 내에서 여성 역시 남성적 주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성을 두려워하고 금지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렇듯 남성이 주도하는 상징체계는 여성의 고유한 신체적, 성적 특징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남성의 입장에서 해석된 여성의 이미지를 여성에게 강요하는 체계입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았을 때 식수의 주장은 일견 타당한 비판으로 보입니다. 비판은 거세 공포와 여성의 신체를 해석하는 남성적 시각의 한계 등을 겨냥할 때 강한 함의와 역량을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세 공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질서를 만드는 주체와 시선의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러한 비판 역시 힘을 잃고 맙니다. 결국 이러한 시각이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의미의 연결고리의 필연성이 약하기 때문이지요. 지난 밤 ‘과학전쟁’을 소개하며 다뤘던 것처럼 전통적으로 철학이라고 불렸던 사유가 당대에 직면한 난관이자, 모든 종류의 선험 철학이 처한 곤경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한계는 설득력을 만드는 연결고리가 살짝 느슨해지면 더욱 거센 비판에 부딪힙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심리학자 브루노 베델하임은 동화 ‘빨간 모자’를 두고 빨간 모자를 유혹해 잡아먹는 늑대는 소녀의 마음속에 있는 성적 본능을, 빨간 모자는 소녀의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분석합니다. 식수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빨간 모자의 원래 표현인 ‘샤프롱(chaperon)’의 형태를 고려하면 그것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한다고 주장하지요. 식수의 분석에 동의하십니까? 설령 베델하임의 분석에 동의한다 치더라도 식수의 주장까지 함께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 모자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가에 대한 설명의 고리가 약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주장을 되풀이하다가는 자칫 유의미한 통찰의 힘까지도 잃어버리고 마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정신분석에 기댄 담론들이 상당수 힘을 상실한 중요한 까닭이기도 합니다.

 

식수를 포함해 프랑스 현대 페미니즘 이론은 주로 정신분석이라는 담론의 틀 안에서 목소리를 냅니다. 주체의 이론으로서 정신분석은 주체 이면의 무의식, 즉 주체가 발견하지 못했고 발견할 수 없었던 질서를 다루는데, 프랑스 현대 페미니즘이 주로 정신분석이라는 담론의 틀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바로 이 주체가 남성적 주체로서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을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문화의 이면과 속내를 살피고 드러내는 비평적 읽기와 그것에서 제 입맛에 맞는 내용만 추려 살피고 주워섬기는 독단적 읽기의 경계는 많은 경우 어지럽거나 모호합니다. 정신분석의 담론 역시 이 경계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는 경우가 많지요. 비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하고 동시에 그 자신이 좋은 비평의 전범을 제시하는 벤야민은 주해(kommentar)와 비평(ktirik)을 구분합니다. 이에 따르면 주해가 대상의 사실내용(Wirklichkeit)에 주목한다면 비평은 대상의 진리내용(Wahrheit)에 주목합니다. 물론 주해와 비평은 서로 대립하거나 배타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빛바랜 양피지를 앞에 둔 금석학자를 예로 들 수 있겠군요. 이 양피지에 담긴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표면의 글씨를 읽어야 합니다. 어떤 언어로 쓰여진 글인지 파악하고, 낡아서 지워진 글자 하나하나를 온전히 복원하는 작업이 필요하겠지요. 이렇게 문자를 복원한 다음에 금석학자는 그 내용을 해석할 것입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여기까지는 주해에 해당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평은 그 이상을 요구합니다. 단순히 문자적 의미의 해석을 넘어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양피지에 쓰인 내용이 누군가의 죽음을 기리는 축문이라면, 그 축문을 통해 당대의 죽음과 그 의미까지 함께 읽어낼 수 있어야 비로소 비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빛바랜 글자들을 모으고 자간과 행간을 메워 모년 모월 모일 모시 모처에서 아무개가 죽었다더라 정도를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무개가 누구였길래 축문이 남았는지, 죽음과 축문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지, 축문을 통해 당대의 죽음과 생의 관계까지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의미내용을 밝히는 수준에 이르러야 비로소 비평가는 자신의 책무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벤야민은 불타는 장작더미의 예를 들면서 주해가를 화학자에, 비평가를 연금술사에 비유합니다. 화학자가 나무와 재에 관심을 갖는다면 연금술사가 주목하는 것은 오직 불꽃이라고 말하면서요. 페미니즘 비평 역시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다양한 방면에서 보편으로 통용되었던 주류의 논리와 다수의 시각이 어떻게 여성을 배제하는지, 또 그것의 이면에서 여성이 억압의 대상으로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보여줍니다. 페미니즘 비평은 이를 드러내고 밝히기 위해 신화나 역사, 문화와 상징들을 면밀하게 들추고 살피지요.

 

이때 신화나 문화적 상징의 내용들, 그것을 이루는 요소들에만 몰두하는 것은 자칫 진리내용을 외면한 채 사실내용에만 골몰하는 저급한 주해나, 사실내용에서 고민 없이 손쉽게 진리내용으로 건너뛰는 나태한 비평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이에 대한 비판, 즉 신화, 역사, 문화, 상징 속 남성중심적 질서를 폭로하는 페미니즘의 자의적 해석을 비판하는 쪽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벤야민의 비유대로라면 이들 모두는 불꽃은 외면하고 장작더미 앞에서 싸우는 꼴이 되기 쉬우니까요. 결국 비평이 읽어야 하는 것은 대상, 즉 사건과 상황을 만든 힘과 그 원천이니까요.  어느 때보다 눈 밝은 비평가가 필요한 것 같은 요즘입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 식수의 대표 저작인 <메두사의 웃음 Le Rire de la Méduse>의 일부를 옮깁니다. 식수가 직접 말하는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나는 여성적 글쓰기에 대해, 여성적 글쓰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여성은 여성 자신을 글로 써야 한다. 그리고 여성들을 글쓰기로 불러야 한다. 여성들은 여성의 육체로부터 격리되었고, 그만큼이나 난폭하게 글쓰기로부터 격리되었다. 여성이 여성의 육체에서 격리되었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똑같은 법칙과 똑같이 치명적인 목적에 따라 여성은 글쓰기에서 격리되었다. 여성은 여성 고유의 움직임으로 글(쓰기)에 여성을 더해야 한다.

 

글쓰기라는 장소는 성적 대립의 모든 기호들을 야비하게 휩쓸어갔다. 그곳에서 여성은 한번도 자기 말을 가져본 적이 없다. 글쓰기는 변화의 가능성 자체이다. 사회, 그리고 문화적인 구조들의 변형을 예고하는 움직임, 전복적인 사상의 도약대가 될 수 있는 공간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는 더 심각한 일이며, 더욱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공적인 자리에서 말한다는 것-심지어 입을 연다는 것-은 여성에게 그토록 무모한 짓이며, 위반의 행위이다. 이것은 이중의 슬픔이다. 왜냐하면 여성이 설령 위반 행위를 한다고 해도, 여성의 말이 닿는 남성의 귀는 거의 언제나 귀머거리이기 때문이다. 남성의 귀먹은 귀에 들리는 것이라곤 언어 속에서 오로지 남성으로 말하는 것뿐이다.

 

여성들은 글을 써야 한다. 그리고 여성의 여성성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것이 써야 할 과제다. 여성의 성, 그 무한하고 유동적인 복합성에 대한 에로틱한 표현, 사소하고도 거대한 번개 같은 작열에 대하여, 운명이 아닌 어떤 충동의 모험에 대하여, 여행들, 횡단, 느린 걸음 ...

 

여성을 위한 여성: 여성 안에는 항상 타자를 생산하는 힘, 특히 다른 여자를 생산하는 힘이 유지된다. 모태적인 여자, 요람을 흔들어주는 여자, 여자는 자기 자신이 어머니이며 아이이고 딸이며 자매다.

 

여성은 자신이 사라지지 않으면서도 익명성에 녹아들 줄 안다. 왜냐하면 여성은 주는 자이기 때문이다.

 

여성적 글쓰기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불가능성은 지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실천을 이론화하고, 그것을 가두고, 그것을 분류하고 그것에 기호를 부여하는 것(code)은 결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적 글쓰기의 실천은 항상 남성중심적 체계를 지배하는 담론의 한계를 넘어설 것이다. 여성적 글쓰기는 철학적, 이론적 지배에 종속된 영토 안에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실행되고 있으며, 또 실행될 것이다.

 

여성은 자신의 육체를 글로 써야 한다. 여성은 난공불락의 언어를 창안해야 한다. 칸막이들, 계급들, 수사법들, 규칙들과 기호들을 무너뜨리는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침묵’이라는 단어를 말해야 하는 것을 비웃는 담론, ‘불가능’이라는 단어 앞에서 멈추면 그 단어를 ‘끝’처럼 사용하는 담론을 포함해서, 궁극적인 담론을 침몰시키고 꿰뚫고 뛰어넘는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입술로만 하는 인색한 담론이 남성의 담론이다. 육신의 가장 작은 부분만을 참여시키는 그런 남성의 담론은 남성을 위장한다.

 

여성들에게 남성들은 가장 큰 죄악을 저질렀다. 남성들은 은근히, 그리고 난폭하게 여성이 여성을 증오하도록 만들었다. 여성이 여성 스스로의 적이 되도록 유도했다. 그래서 남성의 일을 여자가 집행하도록 유도했다.

 

메두사를 보기 위해서는 정면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녀는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녀는 웃고 있다.

 

2016. 11. 29. / 콘텐츠코리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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