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Ch. 5, 6

November 16, 2016

앞서 바디우의 철학에서 진리가 갖는 의미를 언급하며, 바디우가 진리의 절차로 제시하는 네 가지 영역을 간단히 다룬 바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사랑’ 역시 이 네 영역 가운데 하나이지요. 과학(수학), 정치, 예술이 각각 나머지 세 영역에 해당합니다. <사랑 예찬> 바디우는 오늘날 사람들이 사랑을 바라보는 방식, 사랑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방식이 지닌 특성에 대한 언급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뒤이어 전통적으로 철학이 사랑을 다뤄왔던 방식을 간략하게 정리하고요. 그리고 사랑과 진리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으로 오늘 우리가 살필 내용은 사랑과 진리의 다른 영역 사이의 관계입니다.

 

물론 이러한 비교가 전면적이고 치밀한 철학적 분석의 성격을 지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대화에서 바디우가 풀어나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정치, 예술에 대한 이야기 역시 연극이라는 상황과 무대라는 장소에 따른 제약 아래에서 이루어졌으니까요. 바디우가 핵심적으로 언급하는 몇 가지 주제어를 따라가 봅시다. 차이를 중심으로 사랑과 정치의 관계를, 공통점 내지는 유사성을 중심으로 정치와 예술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겠군요.

 

먼저 사랑과 정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트리옹은 바디우에게 ‘왜 정치가 사랑과 동류인 것인가?’라고 묻습니다. 트리옹의 질문은 사랑, 정치, 과학, 예술 각각이 진리의 절차라고 보는 바디우의 주장에 닿아 있지요. 즉 ‘사랑과 정치는 진리의 절차로서 동일한 위상을 갖는가?’ 내지는 ‘진리의 문제에서 사랑과 정치는 같은 것에 속하는가?’ 정도의 질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디우는 정치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진리의 절차이지만, 공동체적인 무엇과 결부되어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 공동체적인 것, ‘공통의 것(le commune)’이 바로 바디우가 제시하는 정치라는 절차의 핵심입니다. 바디우에 따르면 사랑은 무엇보다 둘의 지속, 즉 차이의 지속을 의미하는 반면, 정치는 하나를 향하는 과정, 즉 여럿이 공통의 것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트리옹의 질문에 대한 바디우의 첫 대답은 정치 안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행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창조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고 그 우발성을 보편적인 것으로 확증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정치에서는 모든 관점과 입장에서 상이한 대중 속에서 어떻게 공통의 것을 만들 것인가, 어떻게 평등을 창조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지요. 평등의 창조란 결국 모든 구성원이 나란하게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자리, 모두에게 동등한 하나의 자리, 위계나 차이를 배제한 하나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결국 이 ‘공통의 것’이 정치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뒤이어 정치와 사랑은 동류인가를 묻는 트리옹의 질문이 무색할 만큼, 바디우는 사랑과 정치는 서로 뒤섞일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사랑의 정치’ 따위의 말은 아무 의미 없는 공허한 표현일 뿐이고, 설령 누군가 공동체적 사랑을 설파한다 치더라도 그것은 일종의 도덕일 뿐 정치가 될 수는 없다고요.

 

트리옹은 ‘그렇다면 정치는 대립의 문제, 적에 관련한 문제입니까?’라고 다시 묻습니다. 바디우는 ‘적’이라는 관념의 의미를 다시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대답합니다. 적이란 무엇일까요? 혹은 누구일까요? 진정한 의미에서 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국경에 담을 두르겠다는 트럼프가 적입니까? 아니면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외국인이 적일까요?

 

정치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대담이 아닌 만큼 이 지점에서 바디우가 제시하는 이야기는 단편적이고 제한적입니다. 정치에서 ‘적’이라는 개념 자체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정의하기보다는,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주제라는 식으로 몇 가지 방향에서 언급하는 정도에 그치지요. 적에 관련한 이야기에서 우선 바디우가 주목하는 지점은 적이 단순히 한 편에서 보았을 때 적대적인 세력, 또는 반대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적은 권력을 지닌 사람 또는 집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내부에서 권력의 쟁취를 놓고 경합하는 서로 다른 세력들의 관계와, 이 관계에서 적대적인 위치에 있는 상대편은 적이 아니라 ‘경쟁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디우에 따르면 이들은 상호배타적인 방식으로 권력의 독점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같은 기준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권력의 획득과 행사에 있어서 상호적이라는 사실로 인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적’이라는 범주를 정치의 본질적인 요소로 처음 제시했던 슈미트와도 일맥상통합니다.) 대담에서 바디우는 일단 정치적 적을 ‘당신과 관계된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그가 결정한 것을 조금도 참아낼 수 없는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아마 관객들을 배려한 가장 쉬운 표현이겠군요. 요컨대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어떠한 기준이나 척도도 공유하지 않는 완벽한 타자와 그가 행사하는 권력이 적이라는 개념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시 사랑과 정치의 관계로 돌아가면서, 바디우는 정치에서 적에 대한 사유가 가장 본질적인 내용을 이루는 반면 사랑에는 적이라는 관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흔히 사랑에도 경쟁자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바디우는 그것은 철저하게 사랑 바깥에 속하는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사랑의 경쟁자는 언제나 사랑의 외부에 위치하며, 사랑을 규정하는 일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요. 예컨대 철수와 영희의 사랑에서 철수가 예전에 만났던 지영이나 영희를 짝사랑하는 성호는 조금도 이들의 사랑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설령 지영이나 성호의 존재가 철수와 영희의 관계에서 모종의 의미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 사랑에서 만큼은 아닙니다. 사랑은 정치와 달리 외부의 적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당사자 두 사람이 서로를 확인하고 그것의 지속을 결단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디우는 사랑은 철저하게 두 사람만의 무대라고 주장합니다. 질투는 사랑의 인공적인 기생물이며, 사랑의 본질 속으로는 절대 진입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요.

 

정치와 사랑의 관계를 다루기 위해 굳이 적이라는 공통의 범주를 사용한다면, 사랑에서 진정한 적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기주의라고도 볼 수 있겠군요. 상대방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아, 동일성을 반복해서 요구하는 자아, 차이가 창조하는 새로운 세계를 거부하고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는 자아가 바로 그것입니다.

 

 

… (중략) ...

 

 

바디우가 제시하는 사랑과 예술은 유사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현실을 재창조하는 역량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바디우에 따르면 사랑은 우발적인 것을 보편적으로 고정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랑의 선언을 통해 사랑 이전에는 우연하고 특수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어떤 것들이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자리매김하지요.

 

<사랑 예찬>의 맨 앞 장에는 랭보의 시구가 대담의 제사(題詞)로 등장합니다. ‘사랑은 재발명되어야만 한다’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을 재발명한다고 했을 때 ‘재발명’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디우는 새로운 시대의 예술을 대변한 랭보의 선언에 담긴 예술의 고유성에 주목하고, 이를 통해 예술과 사랑의 관계에 접근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술과 미, 아름다움의 문제를 직결시켜 생각합니다. 즉 예술은 ‘아름다운 것’과 관련한 활동이라고요. (이 ‘아름다운 것’에 대한 논의는 잠시 괄호 안에 넣어둡시다.) 일반적으로 예술은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음악, 아름다운 조각, 아름다운 언어 등을 창조하는 행위와 그것에 관련한 활동을 총칭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예술의 문제를 다루는 여러 입장들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특히 현대적인 의미에서 더욱 그렇고요. 예술 작품이 갖는 모방(mimesis)이라는 특징이나 예술 활동에서 드러나는 표현(expression)의 문제, 그리고 이를 포괄하는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주제 역시 어쩌면 오늘날에는 상당 부분에서 진부한 것으로 전락했다고까지 볼 수 있으니까요.

 

이 주제 역시 포괄적으로 다루기에는 여러 제약이 있습니다. 무대 위의 바디우에게나 마주앉은 우리에게나 마찬가지로요. 우리는 일단 예술의 문제, 또는 바디우에게서 예술이라는 진리의 절차가 갖는 특징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기보다는 사랑과의 연관성에만 초점을 맞춥시다.

 

바디우에게 예술의 창조는 무엇보다 법으로부터의 이탈, 규칙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합니다. 즉 예술은 기존의 법이나 규칙으로 환원되지 않는, 전적으로 새로운 무엇의 도래/창조를 의미합니다. 법과 규칙의 구성물을 사회라고 본다면, 예술은 언제나 사회로 환원되지 않는 무엇, 사회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제시하거나 대변해왔습니다.

 

사실 이러한 관점은 가장 소박한 의미에서 ‘예술’을 정의하는 관점과 정면으로 대치됩니다. 즉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쓰거나 하는 행위, 또는 그림, 노래, 시 따위의 작품은 그 자체로 예술의 위상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무엇’과 관계될 때만 예술로서의 위상을 획득한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새롭지 않다면 예술이 아니다!

 

물론 이 새로움의 의미는 여러 방향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아주 쉽게는 소재나 질료의 새로움부터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플라스틱이라는 물질로 처음 조형물을 만든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19세기 등장했던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는 어떻습니까? 기타라는 악기가 나무가 아닌 전자장치를 통해 소리를 만들어낸다면 그 음악은 어떤 느낌일까요? 아니면 기상천외한 형상을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제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독창적인 형태나 문양을 작품에 사용할 수도 있고, 시각이나 청각의 대상을 기존과 다른 독특한 양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디우나 랑시에르 같은 최근의 철학자들이 예술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주목하는 지점은 이런 질료적 차원의 새로움이나 형상의 새로움이 아닌 감각적 차원의 새로움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새로움은 단순히 작품이나 예술 활동에 구현되는 것을 넘어 그것을 지각하는 인간의 감각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면서요. 사실 대단한 전환입니다. 편의 상 조형 예술에 한정해본다면 이 전환은 곧 이것을 의미합니다: 보는 대로 그리고 보이는 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린 모습대로 사람들이 그 대상을 볼 것이고 만드는 형상대로 대상을 인식할 것이다!

 

이 흥미로운 주제는 다른 밤을 위해 여기서는 일단 아껴 둡시다. 메를로-퐁티는 사람들이 흔히 예술이라고 분류하는 창작 활동을 엄밀하게 구분하고 그 의미를 분리하고자 시도합니다. 그에 따르면 단순히 어떤 대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활동, 그리고 그것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것은 예술이 될 수 없습니다. 퐁티는 그런 것들은 그저 ‘문화적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활동을 수행하는 사람을 일컬어 문화인이라고 지칭하면서요. 보다 정확히 옮기면 퐁티는 ‘문화적 동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예술이 인간에게만 속하는 인간 고유의 활동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문화적 표현들은 다른 동물들에게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퐁티에 따르면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창조하고 그것으로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것, 또는 그러한 활동만이 예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렵지요. 이런 수준이라면 창조라는 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예술이 어떻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기존에 있던 것들의 조합이나 재배치에 의한 창조는 창조로 인정도 하지 않는, 즉 예술로 인정하지 않는 듯한 인상까지 잔뜩 풍길 정도니까요.

 

퐁티의 흥미로운 예술론은 흥미롭게도 바디우가 진리의 절차라고 바라보는 예술이라는 영역과 맞닿습니다. 퐁티는 예술에 절대적 창조와 이를 통한 세계의 재편이라는 위상을 부여합니다. 바디우는 이전까지의 질서에서 절대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 예술이라는 형식을 통해 드러나면서 기존의 질서를 새롭게 재편한다고 생각하지요.

 

오늘의 대화에서 바디우가 주목하는 지점은 무엇보다 ‘이전에 없던 것’으로서의 사랑이 새롭게 세계에 등장하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예술과 닮은 꼴이지요. 사랑과 예술 이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총체를 사회라고 한다면, 그렇기 때문에 예술과 사랑은 사회에 저항하는 무엇의 이름이고 사회에 저항하는 지점에서 언제나 세상에 홀로 있는 무엇입니다. 바디우는 정치와 사랑의 관계에서 이들의 차이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반면, 예술과 사랑을 논할 때에는 이들의 공통점 내지는 유사성에 더 비중을 두고 다루고 있군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사랑에서 모든 위협을 제거하고 사랑을 완벽한 통제 아래에 두려는 현대의 경향이 갖는 위험, 지금까지의 철학이 사랑에 대해 과장하거나 무시하면서 놓쳐 왔던 사랑의 의미, 진리와의 관계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와 역량, 그것을 지속하는 사랑의 선언에 대한 강조, 인간이 타자와 맺는 관계의 양식으로서 사랑과 정치의 관계,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조적 활동으로서의 사랑과 예술의 관계를 지나, 바디우와 트리옹의 대담은 마침내 이야기의 결론으로 향합니다.

 

2016. 11. 16. / 강북구 청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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