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Ch. 3, 4

November 9, 2016

바디우는 사랑이 진리의 절차(procédure de vérité), 특정한 형태의 진리가 구축되는 경험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사랑이 만드는 특정한 형태의 진리를 ‘둘의 진리’라고 제시하지요. 바디우가 제시하는 둘의 진리는 무엇보다 ‘차이의 진리’, 차이를 간직한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에서 일종의 결합을 떠올립니다. 이 때 사랑의 결합은 단순한 제휴나 공생의 수준이 아니라 완전한 합일을 의미합니다. (요즘에는 이런 관념이 많이 희박해졌습니다만) 남녀 간 사랑의 결실로서 결혼이라는 낭만적 관념이나, 성애적 관계를 통한 몰아적 합일이라는 관념은 모두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 사랑이라는 관념에 기대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사랑에 관련해 제시하는 ‘한 몸을 이룬다’는 표현 역시 (맥락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종류의 완전한 결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요.

 

하지만 바디우의 생각은 다릅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결합은 사랑이 아니라고까지 말하지요. 바디우에 따르면 사랑의 핵심은 둘의 관계, 차이의 경험입니다. 바디우가 제시하는 사랑은 기본적으로 성차에서 출발하지만, 여기에서의 성차는 반드시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의 차이, 신체적 차이 차이에 국한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바디우가 성차에 주목하는 까닭은 사랑에서 ‘둘’이라는 수가 갖는 실질적, 상징적인 의미 때문이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시작을 공통점, 또는 공유할 수 있는 것들에서 찾습니다. 혹은 사랑의 과정 내지는 결과를 공통의 것에서 찾기도 하고요. 실제로 (바디우의 관점이 아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에서의) 사랑은 당사자들이 서로 공유하는 것, 공통의 것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통의 관심사, 함께 즐기는 취미, 비슷한 취향 등은 낯선 이에 대한 경계를 쉽게 허물거나 서로에 대한 호감을 쌓아가는 데 긍정적인 효과를 갖지요. 또는 성격이나 관심사 등에 있어 공통점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만나 사랑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 닮아가기도 합니다. 공통적인 것이 늘어난다고 할까요? 어쨌거나 두 경우 모두 사랑에서 차이보다는 공통의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유사성, 내지는 동일성 위에 쌓아가는 관계는 순조롭고 매끄러울 수 있습니다. 쾌락도 얻을 수도 있고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으며 무언가 배우거나 느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바디우에 따르면 이러한 관계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엇보다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의 경험을 수용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 이전의 개인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해석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투사하는 주체입니다. 이러한 주체는 외부로부터 단절된 주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세계가 주체의 외부에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세계는 주체의 경험을 통해 지각되고 주체의 경험을 통해 의미가 만들어지니까요. 단절된 주체는 각자의 고유성을 통해 세계를 경험합니다. 이때 주체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은 의미를 한정하거나 비교할 척도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한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무한한 주체성을 가진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바디우에 따르면 사랑은 각자의 무한한 주체성을 바탕으로 두 사람의 차이를 다루는 일입니다. 둘을 창조하는 사건이라 하는 편이 더 적절할까요? 사랑 이전에 닫힌 주체는 자신 ‘하나’밖에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경험, 생각, 특징 등 모든 것이 그 자신에게 속하는 유일한 것이지요. 타인의 차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경험하는 타인의 차이란 결국 그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에게 지각된 차이, 그리고 그의 관점에서 부여된 의미를 갖는 차이니까요.

 

사랑은 하나를 둘로 만드는 사건이며, 둘을 다시 하나로 환원하지 않고 지속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무엇보다 불확실성과 우발성을 가장 큰 특징으로 갖지요. 사랑은 항상 어떤 만남에서 시작하는데, 이 만남의 가능성은 언제나 불확정적이며 만남의 상황과 형식은 언제나 우발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디우는 우연의 필연성에 주목합니다. 사랑을 이루는 만남, 사랑의 등장과 구축 자체는 극단적으로 우연하지만, 어떠한 조건과 맥락에서도 사랑은 반드시 발생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사랑의 필연성은 사랑 자신이 작동하는 방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을 ‘마치 필연적인 것처럼’ 수행하도록 만드니까요.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철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윤아를 사랑하면서 영화를 좋아하게 됩니다. 단순히 윤아를 위해 양보한다거나, 혹은 그녀로부터 무언가 얻어내기 위해 영화를 ‘좋아하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영화가 좋아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철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다 마주친 사랑으로 인해 철수의 삶에서 영화는 점차 필연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합니다. 윤아와의 첫 만남, 사랑의 시작, 함께 영화를 보던 것 모두 우발적으로 발생한 우연한 일이지만, 사랑이 지속하는 과정에서 이것들은 더 이상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필연인 것처럼 고정되는 것이지요.

 

사랑을 예찬하는 바디우 자신 역시 사랑의 불가해성을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대담 곳곳에서 사랑의 불가사의함을 토로하지요. 우연의 필연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에 대한 바디우의 논의에서도 상당히 복잡한 지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디우가 이 지점에 주목하는 이유는 사랑이 우연을 고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알지 못했던 누군가와의 만남이라는 완벽한 우연이 결국 하나의 운명이라는 외관을 띄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 지점에서 바디우는 얼핏 무의미하게 보일 만큼 소소한 것들이 삶을 바꿀 수 있는 보편적 의미를 생산하고 그것을 필연으로 고정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지난 밤 바디우의 철학에서 ‘사건’이 갖는 의미를 간략하게 소개했지요, 사랑에 대한 바디우의 이러한 접근은 결국 사랑이 갖는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드러내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을 우연에서 필연으로 고정하는 것은 사랑의 선언입니다. 바디우는 사랑의 선언이 갖는 의미를 다시 묻지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선언할 때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내가 느끼고 있는 어떤 기분을 표현하는 걸까요? 자신의 상태를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걸까요? 혹은 상대방이 아니면 다른 누구와도 관계를 갖지 않겠다는 서로의 배타적 지위를 확인하는 절차일까요? 아니면 상대방으로부터 원하는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한 모종의 술책에 지나지 않을까요?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습니다. 바디우는 사랑의 선언에 사랑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선언은 사랑에서 얻는 경험, 사랑을 통해 느끼는 기분, 사랑이라는 예외적인 상태는 물론 사랑이라는 만남과 사랑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총칭하는 표현인 것이지요. 바디우에 따르면 사랑의 선언은 무엇보다 ‘하나의 우연이었던 것에서 다른 무엇을 꺼내겠다는 표현’입니다. 우연으로부터 지속성, 약속, 충실성 등을 이끌어내겠다는 표현이지요. 그리고 이것들을 사랑 이전에 필연적이었던 것들만큼이나 견고하게 구축하겠다는 선언입니다.

 

또한 사랑의 선언은 우연을 필연에 고정할 뿐 아니라 그것을 영원에 매듭지을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랑의 선언 이면에 생략된 ‘항상’, 그리고 ‘영원히’라는 부사는 이따금 속임수나 충동에 지나지 않을 때도 많지만, 바디우는 (이런 말들이 속임수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그것이 다름 아닌 우연을 영원에 기록하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만남의 일회성, 발생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을 통해 시간 속에 새겨지는 일이라고요. 사랑에 존재하는 둘의 차이는 시간 속에서 경험을 통해 계속 새롭게 등장합니다. 사랑의 선언은 조건절이 아닙니다. 즉 ‘아침에는 너를 사랑하고 저녁에는 사랑하지 않는다’, ‘비가 올 때는 너를 사랑하고 눈이 올 때는 사랑하지 않는다’, ‘네가 나와 밥을 먹는다면 너를 사랑하고 나와 밥을 먹지 않는다면 너를 사랑하지 않겠다’와 같이 조건에 의해 의미가 한정되는 선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바디우에 따르면 사랑의 선언은 무엇보다 조건의 배제이며 그러므로 순수하게 시간에 대한 참여를 의미합니다.

 

바디우는 사랑에서 매순간 둘이, 둘에서 비롯하는 새로운 것들이 등장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선언 역시 매번 다시 선언되어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리고 매번 상황에 따라 새롭게 도래해야 하는 것으로서의 사랑은 그래서 진리를 드러내는, 진리의 절차를 이룬다고 주장합니다. 바디우에게 진리란 상황과 무관한 초월적 실체가 아니라 언제나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니까요. 사랑의 선언이 드러내는 진리는 무엇보다 둘의 진리, 차이의 진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중략) ...

 

 

바디우의 사랑은 고백이 아닌 선언을 통해 드러납니다. 사랑을 말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만 속하는 내밀한 무엇을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만들어진 것, 그리고 그 만들어진 것에 기반하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약속의 성격을 지니니까요.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선언하는 것, 선언 속에서 우연을 필연과 영원으로 확증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선언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6. 11. 9. / 강북구 청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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