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Ch. 1, 2

November 2, 2016

매년 7월 프랑스 아비뇽에서는 연극 축제가 열립니다. 총 3주 동안의 축제 기간에는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현대극까지, 또 광대극, 1인극, 뮤지컬, 춤, 마임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연극과 공연이 펼쳐지지요. 극장과 무대는 물론 옛 수도원과 창고, 광장, 카페, 도시 곳곳의 골목들까지 다채로운 공연으로 가득 찹니다. 이 기간 중 축제를 찾는 사람은 50만 명, 공연을 관람하는 관람객도 1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커다란 축제입니다. 1998년 한국도 일본, 대만과 함께 축제에 초청받아 공연을 진행했고 이를 계기로 국내에도 이 축제가 널리 알려졌지요.

 

축제의 기원은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역 주민들에게 수준 높은 공연 관람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연출가이자 배우인 장 빌라르가 아비뇽 교황청 (‘아비뇽 유수’ 시기의 그 교황청입니다.) 야외무대에서 세 편의 연극을 기획해서 공연했는데, 공연이 커다란 호응을 얻자 지역 축제로 자리매김했고 이후 시간이 갈수록 점차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연극 축제로 출발했지만 60년대 중반부터 뮤지컬이나 음악 공연 등도 함께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영화나 비디오아트, 미술 전시를 포함하는 종합 예술 축제로 발돋움했습니다. 아비뇽 행정당국에서 축제를 지원하지만 예술감독 선임 후 5년의 임기를 보장하고 축제에 관련한 전권을 위임하며 공연에는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프랑스의 작가 니콜라 트리옹은 2004년 독특한 공연을 이 축제에서 선보입니다. ‘사유의 연극(Le Théâtre des Idées)’이라는 제목의 이 공연은 철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들이 참여하여 무대에서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대담입니다. 공연을 기획한 트리옹이 함께 무대에 오른 사상가들과 대담을 진행하는 방식으로요. 2004년 데리다를 시작으로 낭시, 에두아르 글리상 등이 대담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바디우는 2008년 이 프로그램에 참여해 트리옹과 함께 관객들을 만납니다. <사랑 예찬>은 바로 이 대담의 기록입니다.

 

한국에 바디우의 저작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95년의 일입니다. 그의 핵심 저작 가운데 하나인 <철학의 위한 선언>이 그해 번역되어 출판되지요. 하지만 바디우의 사상은 매우 더디게 소개되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중요한 저작들이 번역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니까요. <사랑 예찬>은 철학자나 연구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저술이 아닌 일반 관객들 앞에서 진행했던 대담의 기록이지만, 바디우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독특한 위치를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바디우의 철학에서 ‘사랑’이 갖는 의미와 위상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장 문제적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바디우의 사상을 한마디로 쉽게 정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를 테면 바디우의 철학에 등장하는 ‘불가능의 가능성’이란 하나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지요. 바디우 철학의 갖는 함의와 기여, 가능성과 한계를 촘촘하게 논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 이야기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일 것입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우리는 일단 그가 말하는 사랑에 초점을 맞춰봅시다.

 

바디우의 철학에서 가장 독특한 지점은 ‘진리’와 ‘주체’에 대한 그의 관점일 것입니다. 바디우는 철학사를 관통하는 진리(에 대한 접근이)라는 문제의식에 있어서나, 근대 이후 철학의 가장 문제적 영역 가운데 하나인 주체라는 주제를 다룰 때 다른 철학자들과는 다른 독특한 관점을 드러냅니다. 진리와 주체라는 문제의식을 통해 바디우는 철학이 무엇인지 다시 정의하고, 철학의 토대를 이루는 조건을 탐구하지요.

 

사랑에 대한 바디우의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예비적으로 간단하게 언급한다면, 바디우는 진리와 주체에 관련하여 예술(시), 과학(수학), 정치, 사랑이라는 네 가지 상이한 조건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각각의 영역은 통약불가능한 각자의 고유한 규칙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진리는 진리가 속한 조건들의 규칙을 따릅니다. 때문에 각 영역의 고유한 절차에 따라 만들어지지요. 즉 각각의 영역에서 별개의 진리가 존재하며, 진리가 나타나는 별개의 방식, 그러니까 진리의 조건에 따라 진리가 세계와 관계 맺는 상이한 양식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바디우는 진리의 복수성, 하나의 진리가 아닌 다수성을 주장하지요.

 

여기에서 철학적 진리에 대한 간단한 언급을 피할 수 없겠군요. 철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신이나 절대불변의 무엇처럼 그 자체로 세계를 초월해 (내적 초월이든 외적 초월이든) 존재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진리를 신과 같은 초월적인 무엇이나 어떤 절대적 해답으로 간주하는 것은 철학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입니다. 철학에서 진리란 무엇보다 사유와 사태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진리의 문제는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철학의 역사는 곧 이 문제에 대한 탐구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한두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요. (한편 명시적인 요약에 대한 요구, 사유의 과정을 거부하고 결과만을 요구하는 것, 보기 위한 과정과 찾아가는 과정을 모두 제거한 가시성에 대한 요구, 대상이 무엇이든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시할 것을 철학에게 요구하는 것, 명료성과 단순성에 대한 이와 같은 요구는 오늘날 사유의 고유성이 마주한 문제적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유의 가능성을 옭아매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사유라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인간에게서 박탈하고 인간을 세계 속에서 관성에 따라 움직이는 사물과 같이 만드니까요.) 철학의 전통에서 인간은 언어로, 언어를 통해, 언어를 따라 사유합니다. 사유를 곧 언어, 사태를 실재하는 세계의 현상이라고 본다면 결국 철학에서 진리의 문제는 사유가 실제 현상을 올바르게 포착했는가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합니다. 언어와 사유를 구분하지 않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관점에서부터, 진리는 근본적으로 사태와 사유의 관계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언어적 기술의 참거짓의 수준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라고 바라보는 오늘날 분석철학에 이르는 다양한 관점들이 있지요. 이 문제는 언젠가 차분히, 촘촘히 다룰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밤 우선 우리가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바디우의 독특한 접근입니다. 바디우는 진리를 그 자체로는 무엇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이 지점에서 ‘정의하다’의 본래 의미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은 곧 한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일단 진리는 한정할 수 없는 무엇입니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산출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과는 다릅니다.)

 

여전히 어려운 표현이군요. 수학적으로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와의 유사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네요. 괴델의 증명에 따르면 무모순적 공리계, 즉 모순이 없는 공리계는 반드시 자신이 가진 명제만으로 증명할 수 없는 하나 이상의 참인 명제를 갖는데, 특히 스스로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의 공리계가 참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그 자체의 무모순성이 먼저 성립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명제들이 참이라는 진리값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떠한 공리계도 정작 그 자신의 무모순성을 혼자서는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괴델의 증명입니다. 바디우가 제시하는 진리라는 개념이 이와 유사합니다. 괴델의 공리계에서 공리계의 진리는 다른 명제들의 진리값을 보장하면서도 그 자체로는 증명될 수 없는 것처럼, 바디우의 진리 역시 자신이 속한 각 조건의 구체와 그 작용을 산출하면서도 그 자체로서는 증명되지 않는 무엇이지요.

 

하지만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곧바로 부재한다고 간주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디우에 따르면 상황 속에서 진리가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들이 있으니까요. 이전까지의 체계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머물던 진리가 특수한 상황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 바로 그 불가능성을 토대로 작동하던 기존의 체계 역시 함께 변화합니다. 바디우는 이러한 변화는 사건이라고 부르지요. 바디우에게 진리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추상적인 관념이나 임의의 기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진리는 기존의 현실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 동시에 다른 한편 현실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며 세계의 질서를 재편하기 때문입니다. 즉 기존의 질서와 도래할 질서 양쪽 모두에 관여하는 것이지요. 바디우가 사랑에 주목하는 것 역시 이 지점입니다. 바디우의 구분에 따르면 사랑의 영역은 진리의 영역, 즉 현행 질서와 현실의 경제, 기존의 셈법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질서가 태어날 수 있는 영역이니까요. (하지만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바디우의 탐구는 낙원을 꿈꾸는 유토피아 담론과는 다릅니다. 사건의 결과로 새롭게 도래한 세계 역시 형식적으로 동일한 불가능성, 증명할 수 없는 진리 위에 세워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세계에는 그 세계만의 악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니까요.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는 있지만, 어떤 세계라도 반드시 그 세계만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디우의 철학은 혁명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기존의 현실과 단절하는 급진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초월적 세계의 가능성이나 일체의 외부성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하게 내재적인 철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디우에게 진리가 드러나는 상황이 곧 사건을 의미한다면, 개인은 그 사건을 경험함으로써 그 사건의 주체로 거듭납니다. 이러한 관점을 사랑에 적용한다면 사랑이라는 사건을 경험함으로써 개인은 기존의 사랑의 주체로 변화한다고 할까요?

 

자, 이제 구체적인 대담의 내용으로 들어가봅시다. 바디우는 한때 파리 전역을 도배하다시피 했던 한 데이트 알선 사이트의 광고를 소개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광고에 등장했던 문구들에 주목하면서요. 이 광고에는 ‘위험 없는 사랑을 당신에게!’와 같은 문구가 등장합니다.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도 사랑할 수 있다!’와 같은 문구도 있지요. ‘고통 받지 않고서도 당신은 완벽하게 사랑에 빠질 수 있습니다!’는 어떻습니까?

 

바디우는 이러한 선전이 사랑에서 알 수 없는 것, 알려지지 않은 것을 제거하여 사랑을 ‘안전하게’ 만들려는 프로파간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위험이 부재하는 관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약속된 합의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상호 증여’로서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이를 테면 언젠가 미국이 자국이 수행하는 전쟁을 옹호하기 위해 ‘전사자 없는 전쟁’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것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전사자가 없는 것이 전쟁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전쟁이 발생하면 누군가는 다치고 죽습니다. 미군이 수행하는 전쟁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등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죽지 않는 것은 다만 나, 그리고 내가 속한 집단으로서의 우리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타인의 고통, 또 고통의 원인으로서 전쟁은 사라집니다. 이처럼 ‘고통 없는 사랑’이라는 것은 한편으로 나의 고통을 회피함으로써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 왜 고통이 생기는지에 대한 접근 역시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효과를 만듭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디우는 ‘보험 계약서’와 같은 사랑이라는 사랑의 적대자를 발견하고요.

 

사랑에서 위험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그 즉시 사랑을 쾌락의 차원에 한정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타자와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시련이나 변화의 가능성, 심오하고 진실된 모든 경험을 완전히 회피할 수 있다는 믿음 위에서 이루어지며, 사랑의 기쁨 역시 안전한 울타리 안에 가두는 결과로 이어지지요. 즉 안전과 쾌락이라는 두 가지 기만 속에 사랑이 국한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어서 바디우는 기존의 철학이 사랑을 대하는 관점을 검토합니다. 이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철학이 사랑을 대하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 상반되는 극단적인 입장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고 합니다. 먼저 하나의 극단으로 쇼펜하우어를 필두로 하는 ‘반(反) 사랑’의 철학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랑 그 자체를 상대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치부하거나 성차에 대한 오만한 편견을 포함하는 입장이지요. 다른 한편 이와 정반대로 사랑을 신비화하고 탈세속화하여 사랑 자체에 지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때로 사랑은 단순한 쾌락에서 출발할 수 있지만 개인의 윤리와 진실성을 시험하는 과정을 겪으며 윤리적, 종교적 단계로 승화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디우는 키에르케고르를 후자의 예시로 꼽습니다.) 즉 사랑을 중심으로 생리적 현상에 사랑의 의미를 국한하려는 극단적 관점과 사랑을 종교적 도약의 매개로 바라보는 극단적인 관점이 교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난관에서 바디우는 사랑의 어떤 특성에 주목합니다. 바디우는 사랑의 경험에서 순전히 우연에서 비롯하는 어떤 특이성이 보편적 가치를 지닌 요소로 이행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지극히 주관적으로 보이는 사랑이 실은 가장 보편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며, 수익에 대한 기대나 이해타산이 아닌 우연에 의해 움직이는 사랑은 대상의 차이, 즉 나와 다른 타자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매우 근본적인 경험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바디우는 이러한 맥락에서 ‘성관계는 없다’라는 라캉의 선언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라캉에 따르면 성관계를 포함하는 성애적 관계에서 인간은 상당 부분 상대방의 특징이 아닌 자신의 문제에’만’ 결부되어 있습니다. 관계에서 상대방이 갖는 의미는 그의 고유성이 아니라 내가 어떤 관점으로 그를 바라보고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그를 어떻게 판단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관계에서 얻는 쾌락 역시 언제나 나의 쾌락이고, (우리는 타인의 쾌락을 알 수 없으니까요.) 타자의 존재와 그의 신체는 자신의 쾌락의 매개에 불과하지요. 라캉의 관점에서 개인이 외부 세계의 실재를 파악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식 속에서, 구조화된 무의식의 경로를 따라 이루어지는 일이고, 개인이 대상과 맺는 관계는 상상적입니다. 결국 성관계에서 개인은 타자라는 매개를 통해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관계는 없다, 라고 라캉은 결론짓지요.

 

라캉의 선언이 큰 스캔들이 되었던 까닭은 당시 모든 사람들이 성관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존 사회질서의 억압 아래 놓여 있던 신체의 해방이라 관점에서 성관계, 사회적 관계를 떠나 개인적 선택의 자율성이라는 관점에서 성관계, 쾌락의 성관계, 사랑의 성관계…. 바디우는 성관계를 부정하는 라캉의 선언이 사랑의 불가능성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통념 상의 성관계라는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은 이러한 ‘비(非) 관계’를 대신하여 도래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사랑에 대한 바디우의 관점은 사실 매우 독특합니다.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보다 성애로서의 사랑인데, 사실 철학의 역사에서 성애는 그리 중요한 탐구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상반되는 입장과 라캉의 문제적 발언을 검토한 뒤에, 바디우는 사랑에 드리운 철학적 개념들 가운데 세 가지 원칙을 구분할 것을 제안합니다. 첫째는 만남의 황홀로서 사랑을 바라보는 낭만적 개념, 둘째는 사랑을 상업이나 법률 관계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계약적 개념, 마지막으로 사랑을 일종의 환상으로 여기는 회의적 개념입니다.

 

바디우에 따르면 사랑은 이 가운데 어떤 개념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 고유성이란 다름 아닌 진리의 구축이자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로서의 사랑이지요. 바디우가 성애로서의 사랑에 주목하는 까닭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야기는 다음 밤으로 이어집니다.

 

2016. 11. 2. / 강북구 청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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