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 <프루스트와 지드에서의 사랑이라는 환상>: 2부

September 21, 2016

아! 다만 우리가 사랑하는 영혼 위에 몸을 기울이고,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비쳐지는지 볼 수 있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 속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을 읽을 수만 있다면! 그 애정은 얼마나 평온할 것인가! 그 사랑은 얼마나 순수할 것인가!

 

 

 

​​우리는 주위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 만큼이나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 역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능동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하다’와 달리 ‘빠지다’는 어떤 상태에 놓이거나 접어드는 일종의 비자발적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빠지다’라는 술어가 등장하는 상황은 주로 ‘함정에 빠지다’, ‘유혹에 빠지다’, ‘혼수상태에 빠지다’, ‘수렁에 빠지다’ 등과 같이 행위자의 외부에서 그가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를 엄습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물에 들어가다’와 ‘물에 빠지다’를 비교해보면 ‘하다’와 ‘빠지다’의 차이를 보다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에 들어가다’는 물놀이를 하거나 어떤 목적을 위해 물 속으로 들어가는 상황처럼 주체가 자발적으로 자신을 통제하고 있는 상태를 기술하는 반면, ‘물에 빠지다’는 물 속에서 자신의 상태를 통제할 수 없는 수동적 상태를 가리키지요.​

 

프롬이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을 통해 ‘사랑을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프루스트와 지드에서의 사랑이라는 환상>에서 이성복은 ‘사랑에 빠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자가 ‘사랑하다’의 의미를 밝히고 ‘더 잘 사랑하는 것’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후자는 ‘사랑에 빠진다’는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속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프루스트와 지드의 이야기를 통해 고찰하고 있습니다.

 

책의 2부에서 이성복은 지드의 <좁은 문 La Porte Étroite>을 통해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좁은 문 La Porte Étroite>을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면 한마디로 ‘고구마’ 같은 구석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내용과 형식 모든 측면에서 이야기 내내 읽는 이에게 얼마간의 답답함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중심에 등장하는 제롬과 알리사, 알리사의 여동생 쥘리에트의 관계는 반복해서 어긋나며, 작중 등장인물들의 말과 생각은 서로를 향할 때조차 독백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는 가운데 제롬과 알리사의 생각이 매번 어떻게 어긋나는지, 이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말과 행동은 각자의 속마음과 얼마나 다른지, 어긋난 선택들을 거듭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각자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가치 앞에서 정직한 체하는 인간들의 기만과 위선은 어떻게 비극으로 이어지는지 등을 쫓아가다 보면 꾸물꾸물 답답함이 샘솟는 기분을 절로 느낄 수 있습니다.

 

소설의 형식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 속의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1인칭 시점의 회고적 서술, 이야기 중간중간 삽입된 독백들, 서로 마주하지 않은 채 이어지는 편지를 통한 대화들, 장면장면 등장하는 상징들은 이야기 내내 모호하고 석연치 않은 구석을 남깁니다. (하지만 ‘상징’이라는 낱말의 어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상징은 어떤 다른 것을 대신해 그것의 의미를 지시하는 기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면 속에 등장하는 상징들은 의미의 중층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지요. <좁은 문 La Porte Étroite>에서 상징은 그것이 지시하는 의미와 단단한 대리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한편으로 의미가 즉각적으로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자의 이해를 어렵게 만들거나 의미에 모호함을 더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언어로 기술된 의미 영역에 새로운 의미층을 더한다는 점에서 소설의 의미를 보다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롬의 시점과 알리사의 시점을 오가는 이야기 전개, 그리고 알리사의 죽음 이후 소설의 말미에 일기의 형식으로 등장하는 알리사의 내면의 기록은 앞서 등장했던 사건들에 맞물려 소설이 끝난 이후에도 소설의 주제나 의미를 선뜻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여운을 남깁니다.

 

물론 지드 이외에도 고구마 같은 사랑 이야기는 많습니다. 실패한 사랑이 비극의 성격을 갖는다고 본다면, 그리고 비극의 본질을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갈등이 빚는 고통과 불행이라고 본다면, 실패한 사랑 이야기가 읽는 사람에게 얼마간의 답답함을 유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답답함 안에는 연민과 동정, 조소와 실소 등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겠지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는 저 유명한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총, 균, 쇠 Guns, Germs and Steel>의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이 말을 두고 ‘안나 카레니나 법칙’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지요, ‘성공에는 모두 비슷한 이유가 있지만, 모든 실패는 제각각 다른 이유가 있다’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주제에 맞춰 생각한다면 ‘성공한 사랑은 모두 비슷하지만, 실패한 사랑에는 제각각의 이유가 있다’고도 볼 수 있겠고요. 그러니 성공한 사랑 이야기보다 실패한 사랑 이야기가 더 많은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걸까요?

 

외견 상 지드의 <좁은 문 La Porte Étroite>은 실패한 사랑 이야기로 보입니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은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오해를 거듭하던 관계는 알리사의 죽음으로 끝났으니까요. 제롬을 흠모하던 알리사의 여동생 쥘리에트는 보란 듯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만 이들의 결혼 역시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습니다.(제롬의 시점에서 쓰인 소설에는 쥘리에트의 이야기는 내내 주변부에 머뭅니다. 쥘리에트가 아무리 제롬을 사랑한다고 해도, 제롬의 시선은 그녀가 아닌 알리사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쥘리에트의 이미지, 즉 제롬의 시선에 의해 포착된 쥘리에트의 이미지를 좇아서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 역시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알리사는 기독교적 의미의 ‘완덕(完德, perféctĭo)’을 추구하지만 신앙과 이기심 사이에서 그녀의 균형은 매순간 아슬아슬합니다.

 

하지만 <좁은 문 La Porte Étroite>에는 단순히 답답한 인물들의 실패한 사랑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침을 흘리며 좋아할 만큼 인물들의 관계는 흥미로운 얼개 속에서 흘러갑니다.) 화자인 제롬이 자신이 겪은 일을 아주 간단하게 소개하겠는 말로 시작하는 소설의 첫 장부터 그렇습니다. 소설의 첫 장은 아버지를 여읜 어린 제롬이 어머니의 슬픔을 지켜봐야 했던 유년기에서부터 방학이면 찾았던 어머니의 여동생, 즉 외숙모의 집에서 겪었던 경험들을 지나 사촌들과 함께 교회를 찾아 '좁은 문'에 관련한 설교를 듣는 장면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짧은 분량이지만 이 소설의 주제와 문제 의식을 함축적으로 제시하는, 문제적 원장면(Ur-Szene)들이 대거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과거의 기억을 통째로 불러내어 복원을 시도하는 프루스트와 달리, 지드가 그리는 과거는 강렬한 인상과 상징적인 하나의 장면으로 수렴합니다. 검은 상복을 입은 어머니와 장례식임에도 흰 옷과 붉은 머플러를 착용한 외숙모의 선명한 대비, 외숙모를 바라보는 제롬의 시선, 제롬이 외숙모의 외도를 목격하는 장면, 어머니의 외도 앞에서도 태연한 작은 딸 쥘리에트와 이를 두고 괴로워 하는 알리사, 제롬의 어머니와 외숙모 사이의 우회적 갈등(남편의 장례식에 참석한 여동생의 옷차림을 두고 제롬의 어머니는 분개합니다. 이따금 여동생이 병치레를 할 때면 제롬의 어머니는 '저건 다 연극'이라며 분통을 터뜨리지요. 하지만 그녀들의 갈등은 단 한 번도 직접적인 충돌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사물이나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거나, 상대방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을 전하는 식이지요. 이러한 우회적인 의사소통은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행동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롬이 알리사가 외숙모와 놀랍도록 흡사한 외모를 지녔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장면, 알리사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는 제롬, 알리사와 함께 찾은 교회에서 '좁은 문'에 대한 설교를 듣는 장면까지. 프루스트가 기억의 비의지적, 비자발적 속성에 기대어 과거의 복원을 향해 나아간다면, 지드는 과거에 경험한 강렬한 인상의 장면이 미래에 어떻게 펼쳐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기억과 과거, 경험의 문제는 지드의 소설에 있어 핵심적인 문제의식이 아니기 때문에 이후 지드의 시선은 다른 방향을 향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경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이야기 전체 속에 녹아들어 기저에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좁은 문 La Porte Étroite>의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볼까요? 일찍이 아버지를 여윈 제롬은 방학이면 알리사와 쥘리에트 자매가 있는 외삼촌의 집에 내려가 이들 가족과 함께 생활하곤 했습니다. 쾌활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쥘리에트와 달리 알리사는 조용한 성품과 깊은 신앙을 지니고 있었지요. 제롬의 외숙모이자 이들 자매의 어머니인 뤼실은 바람기가 많은 여인으로, 소심한 성격의 남편을 외면하고 젊은 장교와의 외도도 서슴지 않습니다. 가족들이 있는 집 안에서조차 노골적인 애정 행각을 숨기지 않지요. 어머니의 외도 이후 알리사의 신앙은 더욱 깊어졌고, 신앙 속에서 지고지순한 덕을 이루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습니다. 소설의 제목인 ‘좁은 문’ 역시 이러한 기독교 신앙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제롬과 알리사가 함께 들었던 설교에 등장하는 구절이지요.

 

설교에 등장하는 '좁은 문'은 예수의 대표적 가르침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좁은 문에 대한 예수의 직접적인 언급은 성경에 두 차례 등장합니다. 첫 번째 언급은 장소 미상의 마을에서 예수가 사람들을 가르치는 장면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13-14)

 

두 번째 장면은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하며 여러 마을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때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누가복음 13:22-24)

 

비슷한 이야기지만 두 장면의 결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장면을 기록한 마태는 예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은 다른 선생들의 가르침과 다르다며 크게 놀랐다는 결말을 전하고, 두 번째 장면을 기록한 누가는 예수가 이야기를 마치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황제가 당신을 잡으려고 하니 어서 달아나라고 말했다고 전하지요. 동일한 주제를 다루는 두 이야기의 다른 결말만큼이나 같은 설교를 들은 제롬과 알리사의 생각도 달랐습니다. 제롬은 모든 고통과 고난을 감수하고 알리사를 사랑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자신의 좁은 문이라고 생각한 반면, 알리사는 제롬과 함께 하는 행복을 버리고 완덕을 좇는 것이 자신의 좁은 문이라고 생각하지요.

 

‘좁은 문’과 함께 이야기의 핵심에 자리한 ‘완덕’이라는 개념 역시 기독교적 전통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역시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등장하지요. 완덕은 저 유명한 ‘산상수훈(山上垂訓, Sermon on the Mount.)’의 가르침 가운데 등장합니다. 어느 날 예수는 산 위에 올라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행합니다. 이 때 그가 했던 이야기 속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가르침이 등장하지요. 이후 완덕과 완덕에 이르는 길에 대한 내용은 기독교의 교리와 생활 양식 전반에서 중요한 위치에 자리매김합니다.

 

다시 이야기의 줄거리로 돌아가 볼까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제롬과 알리사, 쥘리에트의 관계는 이들의 성장과 함께 변화합니다. 서로를 향한 제롬과 알리사의 마음이 커지는 가운데 알리사의 동생 쥘리에트 역시 제롬을 사랑하게 되지요. 몰래 제롬을 사랑하던 쥘리에트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제롬에 대한 분노와 언니인 알리사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에 엉뚱한 인물과의 결혼을 선택합니다. (사실 이들 셋의 관계,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통해 이들이 갖는 감정들은 인물 각자의 내면에서, 또 이들의 관계 속에서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들 셋이 교차하며 어긋나는 장면들에 대한 섬세한 기술은 흔한 삼각관계 내지는 여타의 치정극과 <좁은 문 La Porte Étroite>을 구별 짓는 소설의 백미 가운데 하나입니다.)

 

쥘리에트의 결혼 이후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에는 아무런 장애물도 남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앞서 ‘고구마 같다’는 언급을 하지도 않았겠지요. 어떻게든 알리사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제롬은, 자신의 마음을 받아줄 것을 알리사에게 지속적으로 내비치지만 알리사는 행복보다 성스러움을 더 원한다며 자신에게서 거리를 둘 것을 제롬에게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알리사는 늘 제롬 곁에 머뭅니다. 심지어 그에 대한 사랑을 내비치면서요. 알리사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또는 일종의 승부수(?)로써 제롬은 군 입대를 자원합니다. 하지만 군 입대 이후 이들의 관계는 오히려 가까워집니다. 편지를 교환하며 제롬은 자신을 향한 알리사의 사랑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요. 알리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롬의 부재는 제롬의 소중함을 일깨울 따름이지요. 알리사를 향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던 제롬은 다시 만난 그녀에게 다시 청혼하지만, 알리사는 여전히 제롬을 거절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거룩함을 위해 태어났다’는 대답을 돌려줄 뿐이지요. 제롬은 알리사를 단념할 수밖에 없을까요? 결국 제롬은 다시 알리사의 곁을 떠나지만, 들려오는 소식과 주고받는 편지 속에서 알리사가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언제나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롬으로서는 죽을 맛이지요. 읽는 사람은 답답할 노릇입니다.

 

제롬은 정원에서의 우연한 만남이자 알리사와의 마지막 만남 이후 그녀의 곁을 떠났고, 얼마 뒤 쥘리에트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편지에 담긴 소식은 알리사의 죽음이였지요. 제롬은 알리사의 죽음과 함께 우편으로 도착한, 알리사가 요양원에서 혼자 기록했던 일기(죽기 직전 그녀는 자신의 일기를 불태우려 했다가, 제롬에게 전해주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녀의 고민과 제롬에 대한 사랑이 담긴 내면의 기록을요.)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제롬을 찾아온 쥘리에트가 그에게 딸의 대부가 되어주길 부탁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알리사로 정했다고 알리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이상의 이야기 속에는 수많은 흥미로운 지점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사실 그리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구조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좁은 문 La Porte Étroite>을 둘러싼 풍부한 논의가 존재할 수 있겠지요. 지드는 자신의 다른 소설 <위폐범들 Les Faux-Monnayeurs>(흔히 <사전꾼들>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을 가리켜 자신의 ‘유일한 소설’이라고 칭한 바 있습니다만, 프랑스의 기호학자 앙드레 엘보는 <좁은 문 La Porte Étroite>이 그 이상으로 현대 소설의 면모를 잘 드러낸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소설 내내 제롬은 이중의 착시 구조 속에서 괴로워합니다. 우선 현실에 존재하는 실제 인물으로서의 알리사와 제롬의 눈에 비치는, 그의 사랑 속에 존재하는 알리사 사이의 괴리가 만드는 혼란이 있지요. 그리고 제롬에 눈에 비친 알리사는 다시 제롬이 직접 마주치는, 자신과 거리를 두고 멀어지려는 알리사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알리사로 나뉩니다. 즉 제롬은 실제 알리사와 자신이 사랑하는 알리사의 괴리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알리사의 모습에 내재하는 분열, 제롬을 사랑하는 알리사와 제롬을 사랑하지 않는 알리사 사이의 괴리 때문에 그녀에게 제대로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마는 것이지요. 대상을 확정할 수 없으니 초점을 맞출 수 없고, 초점을 맞추지 못하니 대상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이중의 착시 구조 속에서 제롬의 시선은 언제나 알리사를 놓치고 말지요.

 

알리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 역시 이중의 구속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삶을 끝마치지요. 그녀가 지고한 목표로 바라보는 신앙과 불행한 가족사에서 유래한 종교적 강박 사이의 경계는 아슬아슬합니다. 신의 완전함을 좇고자 하는 그녀의 덕행이 사실 이기심으로 점철되어 있는 징후는 소설 곳곳에서 드러나지요. 알리사의 고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역시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자신이 지향하는 더 큰 가치를 위해 인간적인 행복을 희생한 불가피한 여정으로 볼 수도, 아니면 그녀의 기만적인 이기심이 자초한 불행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이야기 속에서 알리사는 자신이 믿는 신앙과 덕의 완성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바치는 모습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 다름 아닌 바로 그러한 태도 때문에 자신은 물론 주변의 모든 사람을 불행으로 몰아넣고 맙니다.

 

제롬과 마찬가지로 흔히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상대방 역시 나를 사랑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두고 고민에 빠지곤 합니다. 그의 말과 행동들을 단서로 나에 대한 상대방의 마음을 가늠하지요. 하지만 단서는 어디까지나 단서일 뿐, 단서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불안과 두려움, 기대와 희망 등이 뒤섞이기 마련이고, 따라서 해석은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연애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두고 ‘밀당’이니 ‘어장관리’니 하고 일컫는 데는 이렇듯 언제나 불완전한 의미로 남을 수밖에 없는 상대방의 말과 행동의 의미를 밝히고 이해의 영역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간 프루스트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그리고 지드가 제시하는 것처럼 사랑이 빚는 환상은 단순히 상대방을 ‘잘 몰라서’ 생기는 일이 아니라, 사랑의 특성상 불가피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를 테면 제롬을 향한 알리사의 행동을 단순히 ‘밀당’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제롬을 알리사의 ‘어장’ 속 물고기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치부하기엔 석연치 않은 면들이 너무 많습니다. 때로 이야기 속 사랑이 현실 속 사랑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사랑에서는, 직접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확인할 수 있는 생각과 행동들이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야기 속 사랑을 통해 사랑의 본령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좁은 문 La Porte Étroite>은 좋은 사례입니다. 이성복이 제시하는 환상으로서의 사랑을 몇 가지 열쇠말을 따라 살펴봅시다.

 

'거울'​

<좁은 문 La Porte Étroite>에서 거울이 주연이라고 볼 수 있는 제롬과 알리사의 관계에서 직접 등장하는 것은 단 한 장면뿐입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맥락과 전개에 있어 거울은 언제나 장면의 배후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첫 장에서 외숙모, 즉 알리사의 어머니를 바라보는 어린 제롬의 시선에 등장하는 거울이 대표적입니다. 제롬이 바라보는 외숙모는 가슴이 깊게 파이거나 속이 비치는 옷차림으로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허리춤에서 손거울을 꺼내 거울을 보고 있는 모습으로 그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지요.

 

거울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는 나르키소스 신화에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해야 오래 살 수 있다는 예언에 따라 장성할 때까지 한 번도 거울을 보지 못한 채 자랍니다. 그의 아름다운 용모에 반한 수많은 동성과 이성, 인간과 요정들이 그에게 구애했지만 그는 모든 구애를 거절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사랑을 거절당한 누군가가 나르키소스 역시 자신이 겪었던 것과 같이 사랑으로 인한 고통을 겪기를 바란다는 소원을 빌었는데,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그 소원을 들었습니다. (이런 소원은 잘도 이루어집니다.) 어느 날 나르키소스는 산 속에서 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처음 보는 아름다운 모습에 자신 역시 반하고 맙니다. 거울을 몰랐던 나르키스소는 샘에 비친 모습을 향해 말을 건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지요. 샘에 비친 그 모습에게 다가가려던 나르키소스는 결국 물에 빠져 숨을 거둡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해야 오래 살 수 있으리라는 예언이 달성된 셈이지요.

 

나르키소스 신화에는 거울과 대상의 관계라는 흥미로운 주제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거울은 대상의 반영이자 상징이지만, 대상 그 자체와는 다릅니다. 또 거울 속 대상은 표면에 비친 상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거울을 통한 대상의 인식은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거울은 대상의 모습을 똑같이,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 같지만 거울은 대상의 좌우를 뒤바꿔서 반사합니다.

 

이성복은 거울의 이러한 특성에 주목하며 제롬이 알리사의 거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알리사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인 제롬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거울은 시선으로부터 적절한 거리에 놓여 있을 때에만 거울로서 기능할 수 있습니다. 거울에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고, 또 너무 멀리 떨어지면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롬을 대하는 알리사의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고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제롬이라는 거울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너무 멀어서도,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되는 최소한의 적정거리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제롬이 자꾸 그녀에게 다가서기 때문에 이 거리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자신의 거울인 제롬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알리사는 거울로부터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만큼 물러서는 것을 택합니다.(이런 면에서 제롬을 향한 알리사의 사랑은 나르시스트의 자기애적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거울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매개인 동시에 거울을 통해 다른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알리사에게 있어 제롬이라는 거울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데, 한편으로 그녀 자신을 비추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의 가치를 부정하는 그녀가 제롬이라는 거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리사에게 이 거울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이자 자신의 눈의 대리물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거울과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그녀의 노력은 근본적으로 헛된 노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거울을 거울로서 바라보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지만,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 자신이 거울 속에 함몰되어 있으니까요.

 

이들 관계의 마지막은 결국 거울의 제거로 이어집니다. 알리사는 자신을 향한 제롬의 사랑,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에서 신과 천상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즉 그녀는 제롬이라는 매개를 통해 신의 존재를 깨닫고 신을 향한 사랑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알리사가 추구하는 완덕이라는 이상 역시 제롬이라는 대상을 근원으로 갖습니다. 알리사가 처음으로 사랑을 발견한 것은 자신을 향한 제롬의 모습을 통해서니까요. (알리사가 어머니의 외도로 인해 괴로워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에게 사랑이 불경하고 타락한 것이 아니라 지순하고 성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운 사람이 바로 제롬입니다. 이를 계기로 알리사는 완전한 사랑이라는 이상을 설정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어느 순간부터 제롬은 그녀가 신을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가는 데 장애물이 되고 맙니다. 알리사는 제롬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과 세계의 아름다움, 신을 향한 거룩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제롬 때문에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거울을 제거하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장애물을 제거한 알리사는 자신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많은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선뜻 그렇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알리사의 존재는 이미 제롬이라는 거울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제롬이라는 거울이 사라지는 것은 동시에 그녀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제롬이라는 거울이 사라진 이상 그녀 자신도, 그녀의 목표와 이상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관심과 냉담을 가장해 제롬이 먼저 자신에게 등을 돌리게끔 만들고 마침내 제롬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알리사는 ‘모든 것이 다 사라졌다’고 깊게 탄식하고, 신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죽기 직전 자신의 일기를 제롬에게 전달하는 알리사의 선택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롬이 없는 곳에서 써내려간 일기장, 일기라는 가장 은밀한 기록, 일기를 쓰는 가장 내밀한 행위, 일기에 담긴 온전히 신을 향한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기도마저도 그 이면에 제롬의 존재를 감추고 있는 것이지요. 결국 알리사의 모든 말,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은 결국 제롬과의 관계를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알리사와 제롬의 관계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알리사가 추구하는 완덕이라는 가치는 그것의 반대급부로서 제롬이 요구하는 현실에서의 사랑이 작동할 때에만 목표로서의 가치를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롬이 사라지는 순간마다 그녀는 자신이 완덕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결정인지, 가능한 일인지 끝없는 불안과 의심 속에 빠져들고요. 역설적이지요? 요컨대 알리사가 추구하는 이상의 무게는 정확히 그 반대편에서 그녀를 잡아당기는 제롬의 무게와 등가를 이룹니다. 왼쪽과 오른쪽이 바뀌었을 뿐 모든 것이 동일한 실제의 모습과 거울 속 모습처럼, 제롬이라는 거울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알리사의 이상과 거울 밖 삶에서 완덕을 추구하는 알리사의 이상은 데칼코마니처럼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알리사의 죽음은 이러한 무게의 균형이 만든 파국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타인'​

앞서 살펴본 것처럼 <좁은 문 La Porte Étroite>은 좀처럼 쉬운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 소설입니다. 얼핏 소재나 줄거리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게 보이지만, 또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들 역시 특별할 것이 없이 평이한 흐름 속에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막상 그것의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하고자 한다면 왠지 석연치 않은 구석들이 계속 남는달까요. 이러한 모호성은 지드의 세계관, 인간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들은 실제로 그리 대단한 모험이나 알 수 없는 사건들로 가득 찬 신비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뻔하게 예측 가능하고, 무난한 하루들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지요. 하지만 타인과의 관계라는 문제를 파헤쳐 보면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내가 자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행동들은 사실 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역시 타인인 나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의미들로 채워져 있지요.

 

<좁은 문 La Porte Étroite>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서로를 알고 싶어하고,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만 끝내 타인 읽기에 실패하지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읽는 것에는 완전히 실패합니다. 제롬과 알리사는 이야기 내내 서로를 속이고(알리사의 죽음으로 소설이 끝나는 것을 생각하면 기실 전 생애 내내 이들은 서로를 속이고 있는 셈입니다.) 때로는 자신들마저 속이며 타인을 읽는 것에 실패하지요. (여기에 비하면 이야기 앞 부분에서 제롬이 쥘리에트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것은 귀여운 수준입니다.)

 

<좁은 문 La Porte Étroite>이 흥미로운 까닭은 이러한 실패가 읽는 사람의 무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타인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거나 이해력을 키우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패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바라보는 자는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이 그의 실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은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응시의 대상이 되는 사람 또한 기실 자신의 정체성과 타인의 시선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시선 아래에 자신의 실체가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더 이상 타인의 시선이 자신을 응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중적으로 노출되어 있지요. (인간 관계 속에서 응시의 주체와 응시의 대상의 위치는 수시로 바뀝니다. 바라보는 자는 다음 순간 응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응시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은 다음 순간 상대방을 바라보는 위치에 서기도 하니까요. 이러한 이중성은 인간 관계가 근본적으로 교차하여 서로를 응시하는 관계로 이루어진다는 특징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응시하는 자와 응시의 대상 모두 불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이루어지는 몸짓에는 의도적이든 은연 중이든 거짓과 속임수, 은폐와 위장, 침묵과 기만, 술책과 연극이 뒤섞일 수밖에 없지요.

 

 

... (중략) ...

 

 

<좁은 문 La Porte Étroite>은 사랑의 대상을 온전히 바라보고 싶지만 결국 실패하는 사람과, 자신을 내보이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바라지만 끝내 실패하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와 감추고 싶은 욕구가 교차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더 가까이, 더 온전히 보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사랑이라는 장막으로 인해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모습을 보지 못하는 엇갈림은 어쩌면 이성복이, 프루스트와 지드가 말하는 것처럼 사랑이 우리가 어쩔 수 없는 ‘환상’과도 같은 성격을 지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야기는 다음 주 이번 세미나의 마지막 책인 <사랑의 단상>으로 이어집니다.

 

 

 

​​​2016. 9. 21. / 강북구 청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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