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 <프루스트와 지드에서의 사랑이라는 환상>: 1부

September 7, 2016

​프루스트는 남녀 사이의 사랑을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으며, 유일무이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종래 기독교적이거나 낭만주의적 관점을 거부한다. 그에 의하면 사랑은 우연하고 우발적인 것이며, 사랑하는 이의 의식적 선택의 결과라기보다는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적 힘의 산물이다. 그러기에 사랑이라는 심리 현상은 세계를 조립하는 동시에, 세계가 투영되는 인간의 심층 무의식을 탐사하기 위한 특권적 영역이 된다.

 

 

 

​​현대 문학의 위대한 작품 목록을 만들 수 있다면, 아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는 그 목록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기에 손색이 없는 소설일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 깨나 읽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막상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은 사람을 찾기란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같은 목록에 들어 있을 헤밍웨이와 스타인벡, 베케트와 카프카, 쿤데라와 보르헤스 등의 독자나 이들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서든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반면, 프루스트에 대해서라면 대개 ‘홍차와 마들렌(madeleine)’을 떠올리는 정도가 고작이니까요.

 

홍차와 마들렌 이야기는 명실공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가장 유명한 장면입니다. 프루스트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법한 이야기지요. 잠깐 살펴볼까요?

 

... 어느 겨울 날 집에 돌아온 내가 추워하는 걸 본 어머니께서는 평소 내 습관과는 달리 홍차를 마시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셨다.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왠지 마음이 바뀌었다. 어머니는 사람을 시켜 조가비 모양의, 가느다란 홈이 팬 틀에 넣어 만든 마들렌이라는 짧고 통통한 작은 과자를 사 오게 하셨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 그것이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셨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그 추억이 왜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 이유를 알아내는 일은 훨씬 후로 미뤄야 했다.) 아주머니의 방이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 …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들과 스완 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 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이야기는 이렇게 주인공이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무심코 입으로 가져간 홍차 한 모금과 함께 시작합니다. 찻잔 속에서 솟아오른 기억과 함께요. 까맣게 잊고 있던 유년기의 어떤 기억들이 홍차와 함께 떠오르며 소설의 장면 역시 그곳으로 함께 옮겨가지요. 하지만 무려 소설이 시작한 지 100페이지 가까이 지난 뒤입니다! 여간한 단편 소설 두어 편이 끝날 즈음이지요. 이 소설의 유명세는 어쩌면 읽기 어렵기로 소문난 ‘악명’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장면이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까닭은 그 뒷이야기까지 읽은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정도니까요. 이 소설의 첫 원고를 읽었던 출판사의 한 담당자는 무엇보다 ‘도대체 한 남자가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뒤척이는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30쪽이나 사용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토로한 바 있습니다. 인용한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루스트는 어머니의 권유로 주인공이 홍차를 딱 세 모금 마시는 모습을 일곱 쪽에 걸쳐 서술하고 있습니다. 길게 늘어지는 서술과 만연체의 문장, 상황의 전개나 서사에 봉사하지 않는 특정 장면과 대상에 대한 길고 감각적인 묘사 등은 출판사 담당자가 느꼈을, 한 남자가 잠드는 장면을 보기 위해 30쪽이나 따라가야 하는 난감함을 오늘의 독자에게도 역시나 선사하지요. 오늘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소설적 가치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지만, 이 책을 펼치는 독자들은 대체로 예외 없이 저 담당자와 비슷하게 야릇한 의심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재미없고, 지루하고, 난해하고, 무슨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도대체가 이야기인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 이야기라고 느낄 정도로요. 그래서 대개는 책을 그냥 덮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이야기인지도 잘 모르겠는 문장들이 앞으로 4,000여 페이지 이상 줄줄이 이어진다는 생각에 책을 펼치자마자 금새 지친다고 할까요?

 

하지만 위세 높은 악명에도 불구하고 프루스트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곳곳에 보석 같은 장면들을 감추고 있습니다. 프루스트와 동시대를 살았던 눈 밝은 비평가 벤야민은 일찍부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를 두고 신비주의자의 침잠, 산문 작가의 예술, 풍자가의 열정, 학자의 지식, 편집증자의 광기가 모인 문제적 작품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벤야민은 프루스트의 작품에 나타나는 ‘무의식적 기억’에 주목합니다. 프루스트에게 기억은 과거의 일을 되새기거나 회상하는 능동적인 활동이 아니라 분명히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되지 않은 것, 기억할 수 없는 것, 망각되었던 것이 불현듯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프루스트 그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기억은 우연에 의한 충격적인 발견, 그리고 이러한 발견을 통해 과거의 그 시점을 통과할 당시에는 미처 알 수 없었던 사건의 의미가 총체적으로 밝혀지는 순간입니다.

 

​벤야민 역시 기억의 이러한 특성에 주목합니다. 그는 프루스트를 통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일상의 경험들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작은 경험 하나 속에도 얼마나 많은 의미들이 담겨 있는지 이야기하지요. 그래서 프루스트의 이야기를 줄거리라는 형식으로 축약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간신히 밝혀낸 순간들의 의미를 다시 잘라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야기를 다루는 이전까지의 다른 형식들이 이야기의 목적에 따라 사건을 재단하고 배치하고 구성하는 방법을 택해왔다면, 프루스트는 삶의 실제 모습과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기억을 매개로 기억의 중심과 주변을 있는 할 수 있는 한 그대로 옮기고 있다고 할까요. 마치 가장 완벽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도시와 정확히 일치하는 지도를 만들었다는 보르헤스의 이야기 속의 사람들처럼 말이지요.

 

프루스트가 다루는 기억에는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주제가 놓여 있습니다. 유년기부터 장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겪었던 사랑, 또 가까운 주변에서 지켜보았던 사랑의 여러 모습들이 등장하지요. 프루스트가 주목하는 기억의 특징과 유사하게, 이성복은 사랑을 우발적인 것, 우연한 것, 자신이 의식적으로 선택하거나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프루스트의 이야기 속에서 사랑의 이러한 특징이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한 재구성을 시도하지요. 그에 따르면 사랑은 사랑에 빠진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무의식적 힘의 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그 사랑에 앞서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세계의 의미를 조직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예외적이고 특권적인 영역인 것이지요. 아주 쉽게 바꾸어 말하면, 누군가의 사랑을 보면 그 사람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알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살펴보았던 프롬의 논의가 사랑이 갖는 능동적 활동으로서의 특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성복(과 프루스트)의 관점은 불가피한 것으로서의 사랑, 인간의 내면과 심리에 작용하는 힘으로서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프롬의 관점에서 사랑은 ‘사랑하다’라는 표현에, 이성복(과 프루스트)의 관점에서 사랑은 ‘사랑에 빠지다’라는 표현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이제 몇 가지 주제어를 따라 프루스트의 이야기 속에서 이성복이 추적하고 있는 사랑의 흔적을 함께 살펴봅시다.

 

'믿음'

이성복이 맨 처음 프루스트의 이야기 속에서 주목하는 지점은 믿음(croyance)입니다. 무엇보다 믿음의 양가성에 주목하지요. 한편으로 믿음은 믿음의 대상에 대한 건전한 판단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합리적 지식을 결여한 맹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과학적 지식이나 객관성을 결여한 주관적 의견이라는 측면과, 초월적 가치 체계의 적극적인 수용이라는 윤리적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고요.

 

믿음의 이러한 양가성에 주목하면서 이성복은 프루스트가 주로 믿음을 유년기의 특징과 연결시키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에 따르면 유년기는 경험의 대상을 해부하고 분석하는 지성의 시기가 아니라 부분과 전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융합하는 믿음의 시기입니다. 이를 테면 어른들은 ‘명절’에서 교통난, 명절 선물, 차례 준비, 연휴 등을 떠올리는 반면, 아이들은 그러한 분절 없이 명절을 하나의 총체적 경험으로서 체험한다고 할까요? 어른들이 주위 대상을 추상화, 개념화, 도구화하는 반면 아이들은 대상에 구체성, 개별성, 특수성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어린 시절의 경험은 다른 어떤 시기의 그것보다 풍요롭기 마련이지요.

 

경험에 풍성함을 더하는 유년기의 믿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소실됩니다. 어른이 된 후에는 현저히 떨어지고, 노인이 되어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지요. 이성복은 믿음과 나이의 반비례 관계에서 믿음과 생명의 정비례 관계를 읽어냅니다. 그리고 믿음의 동반자로서 꿈, 상상력, 욕망을 제시하지요. 앞서 살펴본 믿음의 양가성은 무엇보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의 경험의 특징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하기 때문에 믿음은 대상의 적극적인 수용이라는 실천적 가능성과 합리적 근거를 결여한 맹신이라는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꿈과 상상력, 그리고 욕망 역시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점에서 믿음과 유사하고, 일종의 교호적(reciprocal) 관계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이러한 특징은 사랑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성복은 프루스트를 통해 믿음의 양가성이 사랑에 있어 이중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기억과 믿음의 관계에 주목하지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주인공 마르셀은 홍차 한 모금으로 유년기의 따뜻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기억 속에서 고장의 풍경과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들을 하나씩 추적하듯 복원하지요.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찾은 숲과 성당, 호수와 정원의 모습은 정작 기억 속 느낌과는 딴판입니다. 마르셀은 ‘모래알이 쌓이고, 새들이 선회하는 가파른 해벽’ 위에 있다고 기억했던 ‘발베크 성당’을 찾다가 엉뚱하게도 그곳이 ‘두 갈래 전차 노선의 분기점이 되는 광장’에, ‘당구장을 겸한 카페’의 맞은 편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실망하기도 하고, ‘여신의 낙원’으로 기억했던 불로뉴(Boulogne)의 숲을 찾았을 때 그곳에서는 ‘비인간적 공허’만을 목격하기도 하지요.

 

흐르는 시간과 함께 풍경도 변했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럴 리 없습니다. 성당은 예전부터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었고, 좀처럼 사람이 찾지 않는 불로뉴의 숲 역시 예전 모습과 달라진 것이 없었으니까요. 프루스트는 마르셀이 느꼈던 실망과 환멸에서 기억과 믿음의 관계에 대한 통찰로 나아갑니다. 즉 대상의 매혹, 체험의 강렬한 인상은 경험적 현실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마음 속에 있다는 사실이지요.

 

​이렇게 대상에 매혹과 실재성을 부여하는 믿음은, 또한 대상에 대한 환멸과 실망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현실의 대상을 매개로 실재를 창조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탄생한 실재는 현실의 대상과 일치할 수 없지요. 따라서 그 괴리가 드러나는 순간 필연적으로 환멸과 실망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현실과 믿음 위에 세워진 환상 가운데 프루스트가 선택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닌 믿음 위에 세워진, 스스로 만든 환상으로서의 실재입니다. 믿음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는 창조의 순간부터 언제나 붕괴의 위험 앞에 놓여 있지만, 매혹과 사랑의 영역으로서 그것을 긍정하는 것이지요. 현실을 외면하는, 기만적인 선택일까요? 한번 곰곰이, 천천히 따져볼 노릇입니다. 환상에 감염되지 않은 현실이 도대체 어디에 가능하긴 할까요?

 

'관념'

두 번째로 우리가 살펴볼 열쇠말은 ‘관념’입니다. 통상적으로 관념은 어떤 대상이 사람의 마음 속에 나타나는 내용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떤 경험에서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혹은 경험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 어떤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우리의 내면으로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럴 때 관념이란 현실로서의 대상과 짝을 이루는 생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서 믿음을 다루면서 살펴본 것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는 관념과 있는 그대로의 현실 사이의 차이와 그 차이의 의미가 도드라지는 작품입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차이는 부정확한 현실 인식이나 합리성을 결여한 그릇된 사실 판단이 아닌, 무엇보다 인간이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것의 의미를 해석하는 일에 관련한 차이입니다.

 

우리는 타인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고, 만들어내고, (우리의 내면에 그것들을) 다시 창조하는 방식으로 파악하고 이해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루스트는 진정한 현실을 내면적이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프루스트에 따르면 인간에게 현실은 외부 세계로서의 현실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의해 인간의 내면에 다시 만들어지는 방식을 통해 주어집니다. 따라서 현실의 의미를 끊임없이 외부 세계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은 끊임없는 착오의 연속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발견해야 할 의미가 있는 곳은 실은 자신의 내면이니까요.

 

프루스트는 바로 이 오해 때문에 인간의 삶은 자신의 바깥으로만 맴돌며, 오해와 오류 속을 헤맨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내면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외부 세계와는 다르다는 면에서 일종의 환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외부 세계라는 관념 자체가 도무지 불가능한 개념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환상이야말로 현실보다 더 실재적인 세계가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프루스트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나올 생각’만, 즉 외부의 대상들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에 끝없는 착오를 거듭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테면 장성한 마르셀이 유년기를 보낸 고향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곳곳의 도시로, 사람들 속으로 떠도는 긴 여정을 돌아야 했던 까닭은 바로 이 착오 때문인 셈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착오 덕분에 즐거운 여정에 동참할 수 있었지만요.) 홍차 속에서 떠올렸던 어떤 느낌은 사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퍽 오랜 우회로를 (4,000여 페이지의!) 거쳐야 했다고 할까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라는 제목에 담긴 비밀(이라기엔 조금 노골적인 비밀)이기도 합니다. 잃어버린 현실의 의미를 환상 속에서 복원하는 것, 시간이 빚는 경험의 퇴색을 기억을 통해 극복하는 것.

 

‘환상’

프랑스의 소설가 에드몽 잘루는 프루스트의 이야기가 사랑에 대한 대단히 독창적인 접근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따르면 프루스트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통해 우리의 삶이 펼쳐지는 곳이 외부 세계가 아닌 우리 자신 안이라는 극단적인 주관주의가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때의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다르다는 맥락에서 일종의 ‘환상’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중략) ...

 

 

사랑이 이렇게 닥쳐오는 것, 무의식적인 것, 비의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합리적인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보다 복잡한 믿음과 환상 속에 움직이는 것이라면 앞서 프롬이 주장했던 사랑의 기술들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이성복이 프루스트를 통해 사랑의 무의식적이고 우연하고 우발적인 특징에 주목하는 것은, ‘우연히 사랑이 찾아오길’ 기다리거나 ‘운명 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운명 같은 사랑’에 대한 믿음 역시 사랑에 대한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우발적인 사건으로서의 사랑과 능동적, 실천적 활동으로서의 사랑이라는 특징을 어떻게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겠군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는 하나의 사랑 이야기를 일관되게 다루는 통상적인 의미의 연애 소설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사랑에 대한 탐구는 작품의 실질적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다양한 시간과 공간, 인간과 세계, 구체적 사물과 추상적 관념에 걸친 넓은 영역에서 전체 이야기의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프루스트의 이야기 속에서 이성복이 추적하는 사랑이라는 환상은 기만과 거짓처럼 부정적인 의미의 환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는 다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매순간 만들고 있고,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어쩌면 모든 사랑과 행복이 기대고 있을 가능성으로서의 환상입니다. 사랑이 환상을 만드는 것인지, 환상 속에서 사랑이 만들어지는 것인지 또한 깊이 생각해보면 재미있을 주제인 것 같습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6. 9. 7. / 강북구 청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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