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Ch. 3, 4

August 31, 2016

사랑은 두 사람이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교제할 때, 그래서 그들 각각이 자기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인간의 현실은 오직 이러한 ‘핵심적 경험’에 있으며, 오직 여기에만 생기가 있고 사랑의 기반은 오직 여기에 있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사랑은 끊임없는 도전이 된다. 사랑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활동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자신들의 실존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경험하고, 서로 일체가 됨으로써 서로와 함께 하는 각자가 될 수 있다는 근본적인 사실에 비하면 (사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조화나 갈등, 기쁨이나 슬픔 같은 것들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앞서 사랑에도 지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프롬은, 이제 현대 사회에서 왜 진정한 사랑이 찾아보기 어려운, 드문 현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탐구로 넘어갑니다. 프롬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희귀한 현상이 되었고, 사이비 사랑이 진정한 사랑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이 일종의 능력이라면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의 특성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영향 아래에 있을 것이다’라는 두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서양 현대 문명의 주요 특성에 대해 간단하게 고찰해볼 것을 제안하지요.

 

‘현대 서양 사회’라는 개념은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에 너무 덩치가 큰 개념입니다. ‘현대 서양 사회’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몇 가지 대표적인 시도들이 있긴 합니다. 19세기 중반 학문이 총체적 탐구의 대상으로 사회에 눈을 돌린 이후, 시대와 사회를 과학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지요. 저 유명한 마르크스의 <자본 Das Kapital>이나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es des Kapitalismus>이 현대 사회의 핵심으로서 자본주의를 탐구했다면, 슈미트는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 Die Geistesgeschichtliche Lage des Heutigen Parlamentarismus>을 통해 제목 그대로 자유주의와 의회민주주의라는 근대 정치의 핵심 개념이 당대에 어떤 상황에 이르렀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19세기 크게 유행한 이래 근본적인 비판에 직면합니다. 탐구의 대상 자체가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임의적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대상에 대해 ‘객관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인식을 생산하기 어렵고, 그나마 탐구의 결과물 역시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성격의 내용이 아닌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지요. 또 대상의 역사적 맥락이나 특정한 상황에 기댄 설명은 그것에 대한 유일한, 특수한 설명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무리 설득력 있는 설명이라고 하더라도 지식의 효용에 대한 물음, 즉 ‘그 지식을 통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문제에 있어 가치를 갖기 어렵다는 비판 역시 가능합니다. 그래서 자칫 독단주의로 흐르거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거나, 하나의 기술(descriptive) 체계에 불과하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웠지요. 때문에 20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사회학 연구 역시 과학의 일반적인 방법론을 따르는 것이 보다 보편적인 접근 방식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물론 몇 가지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탐구를 모두 무용한 것으로 치부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현대 사회의 가장 주요한 특징을 자본주의로 보고,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과 고찰에 집중했던 연구들은 무시하기 어려운 성과들을 간직하고 있지요. 당시의 연구들은 오늘날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고향이자, 지금도 여전히 일종의 출발점으로 기능하고 있으까요.

 

프롬 역시 이러한 탐구에 기대고 있습니다. 프롬이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은 희귀한 현상이 되었다고 주장할 때, 그가 생각하는 ‘현대 서양 사회’란 바로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프롬은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이비 사랑이 진정한 사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사이비 사랑이 범람하는 이유를 인간의 ‘소외’에서 찾고 있지요. 프롬에 따르면 이 소외는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결과물입니다.

 

소외(entfremdung, alienation)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한 것은 물론 마르크스입니다. 1844년 파리에 체류하던 마르크스는 경제학과 철학에 대한 저술을 작성합니다. 흔히 ‘파리 수고’, 내지는 ‘1844년 수고’로 불리는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 O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이지요. 초기 마르크스 저술 가운데 사상적, 문헌학적으로 가장 많은 논란과 관심을 일으킨 저술입니다. (여담입니다만 1844년은 니체가 태어난 해이기도 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도 5개 부, 92개 절에서 세부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에 실린 원문 기준으로 약 120 페이지, 국문 번역본 기준 약 200 페이지 정도의 원고라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상세하게, 원본보다도 더 자세히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총 3개의 원고로 이루어진 전체 저작의 1부 마지막에서, 마르크스는 ‘소외된 노동’이라는 접근을 통해 소외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하고 분석합니다. (‘소외’라는 개념 자체는 본래 헤겔에서 유래합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소외는 무엇보다 노동과 관련 있는 개념입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이 봉건사회에서의 노동과 달리 소외된 노동을 이룬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외된 노동은 자본주의의 핵심적 특징 가운데 하나이지요.

 

천천히 살펴봅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이전까지 인간의 노동은 가치를 창조하는 활동이었습니다. 노동은 인간의 삶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활동이자, 자연을 가공해 인간 세계로 포섭하는 활동이었지요. 당연히 더 많이 노동할수록, 더 많은 가치가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는 이와 반대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즉 상품의 가치가 화폐의 가치로 대체됨에 따라, 노동자가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할수록 상품의 가격은 하락하고, 따라서 상품의 가치 역시 하락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러한 조건 속에서 결과적으로 노동의 가치 역시 함께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노동의 가치가 떨어지면 노동하는 인간, 즉 노동자의 가치 역시 함께 떨어지게 되지요.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단순히 어떤 상품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그 자체를 상품으로 생산하고 노동자 자기 자신 역시 상품으로 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상품의 소비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우선 상품으로부터 소외되고, 자신이 원하는 노동을 수행하지 못하고 자본가가 원하는 방식의 노동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이 과정에서 인간적 삶의 조건인 자연과 세계에 자신의 역량을 투사하여 능동적으로 삶의 영역을 구축하는 활동인 노동의 본래 의미가 변질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소외되며, 결과적으로 다른 인간으로부터 소외되는 결과에 처하게 됩니다. 즉 자본주의적 노동 속에서 상품으로부터의 소외,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인간의 유적 특징으로부터의 소외, 인간으로부터의 인간 소외라는 사중의 소외가 연쇄하는 것이지요.

 

프롬이 기대고 있는 소외는 바로 이러한 개념입니다. 앞서 프롬은 인간의 본질적 특징으로 분리와 고독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자기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하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분리된 존재일 수밖에 없고,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인간은 고독을 자신의 근본 조건으로 갖습니다. 프롬은 이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연스러운 욕구가 사랑에 대한 욕구라고 보고 있지요. 고독이라는 인간의 조건, 그리고 소외라는 현대의 조건을 결합해서 생각해보면, 인간은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연스런 욕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는 현대의 특성 속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프롬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타인들과 함께 있고 싶어하면서도 아주 고독한 상태에 처해 있고,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하지 못해 불안정하고, 불안하고,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결과에 처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현대 서양 사회에서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진단한 뒤, 프롬은 자본주의가 이러한 상태를 통제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인간의 눈을 가리는 기제들이지요. 프롬은 이러한 장치 중 하나로 먼저 기계적으로 엄밀하게 조직화된 노동을 제시합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거대한 대상과 자신이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을 제공함으로써 인간이 지닌 결합과 합일에 대한 욕구를 기만적으로 상쇄하고, 다른 한편 끊임 없이 강요된 노동을 통해 사람을 너덜너덜(?) 하게 만들어 자신이 지닌 상황이나 욕구들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프롬이 지적하는 두 번째 사회적 장치는 규격화된 오락입니다. 바로 수많은 즐길 거리들이지요. 프롬은 오늘날 인간의 행복이 ‘무언가를 즐기는 것’에 국한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즐기는 것은 무엇보다 ‘만족스러운 소비’를 의미한다고 말하고요. 이에 따르면 모든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 만드는 현대 사회의 특징은, 인간적인 관계 역시 즐길 대상, 교환하고 소비할 대상으로 만들고 맙니다. 프롬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진정한 사랑은 사라지고 두 사람만의 친밀함과 이기심으로 구성된 휴식처로서의 사랑, 일종의 ‘팀’을 이루는 것처럼 필요와 규칙에 의해 맺는 관계만이 남았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현대 서양 사회의 특징에 대해 개괄한 뒤 프롬은, 진정한 사랑의 자리를 대체한 사이비 사랑의 유형을 분류하고 각각의 특성에 대한 고찰을 시도합니다. 앞서 살펴볼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서 프롬은 주로 상황에 대한 전제적(前提的) 진단을 내린 뒤, 진단 속에서 몇 가지 대표적인 범례를 제시하고 다시 범례의 정의와 내용을 해명하는 방식의 설명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범주를 제시하고 분류하는 방식은 물론 사례를 일반화하는 오류의 가능성과 대상을 범주로 재단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의미가 잘려나갈 수 있다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다루고자 하는 대상이나 현상을 범주를 따라 쉽고 체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강점을 가지고 있지요.

 

프롬은 사이비 사랑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성적 사랑, 제휴적(collaboration) 사랑, 신경증적 사랑으로요. 그리고 신경증적 사랑은 다시 병리적 사랑, 우상숭배적 사랑, 감상적 사랑, 투사적(projective)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하나씩 살펴볼까요? 먼저 성적 사랑은 사랑을 전적으로 성적 욕망에서 유래하는 관계로 보거나, 사랑의 의미를 성적 쾌락에서 찾는 관계입니다. (프롬은 성적 사랑을 다루며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성적 욕망으로 보았던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을 길게 언급하는데, 이 비판이 얼마나 타당한지는 사실 꼼꼼히 한번 따져볼 노릇입니다.) 사랑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남녀 두 사람만의 친밀함과 이기주의에서 비롯하는 배타적 관계’나 결혼이라는 결합 방식에 대한 과장된 강조를 낳기 쉽지요. 무엇보다 이러한 사랑은 자신의 쾌락에 사랑의 근원을 두는 만큼 근본적으로 자아도취적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휴적 사랑은 무엇보다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사랑이 사라진 빈 자리를 잠식한 대표적인 사이비 사랑의 유형입니다. 프롬에 따르면 제휴적 사랑은 진정한 사랑을 공통된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두 사람의 결합, 또는 협동의 산물로 대체합니다. 각자가 욕구를 어느 정도 배제하고 서로에게 자신의 행동을 적응시키는 것이지요. 제휴적 사랑은 성적 사랑과 함께 현대 사회의 표준적 형태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신경증적 사랑이 있습니다. 프롬이 정의하는 신경증적 사랑은 다분히 정신분석학적 연구들에 기대고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은 인간 심리의 병리적 특징과 그 근원을 주로 그 개인적 경험, 특히 부모에 관련한 유년기의 경험에서 찾습니다. 특히 이 시기의 경험이 개인의 성품이나 심리적 특징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지요. 프롬에 따르면 신경증적 사랑은 이 시기의 경험을 극복하지 못하고 연인에게서, 아내나 남편에게서 자신의 결핍이나 왜곡된 욕구를 충족하려 드는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경증적 사랑의 유형에는 이러한 병리적 사랑 외에도 우상숭배적 사랑, 감상적 사랑, 투사적 사랑이 있습니다. 우상숭배적 사랑은 주로 미성숙한 개인에게서 나타나는 경험입니다. 사랑하는 대상과 실제로 사랑이라는 능동적 관계를 형성하는 대신 대상을 우상화, 즉 대상을 미화하거나 이상화하여 자신의 생각 속에서 점점 위대한 존재로 만들고 그 ‘대단한 존재’에 대한 사랑에서 만족을 찾는 유형이지요. 감상적 사랑은 상상이나 환상 속에서 감상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사랑입니다. 이를 테면 드라마나 영화, 유행가 가사 속에서 사랑을 찾고 경험하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투사적 사랑은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문제를 외면하고 끊임 없이 상대방이나 다른 대상에게 자신의 문제를 투사하는(project)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진정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없겠지요.

 

프롬에 따르면 사이비 사랑을 부추기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물론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궁극적으로 사이비 사랑의 가장 큰 원인은 사랑에 대한 무지가 되겠지요. 책의 서두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과 사랑 받는 것에 대한 혼동이나 사랑의 능력이 아닌 사랑의 대상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착각, 또 이번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현대 사회의 특징에서 유래하는 원인도 있겠습니다. 사이비 사랑을 다루며 프롬은 사랑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한 가지를 더 언급합니다. 바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갈등이 전혀 없는, 전적으로 만족스럽고 완벽하게 편안한 상태로 오해한다는 것이지요. 프롬이 보기에 사랑은 단순히 기쁨이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본질적 경험을 통해 타자와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 일체가 됨으로써 함께 성장하는 능동적 활동입니다. 무슨 주례사 같군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두 사람이 함께 …’ 하는 상투적인 주례사 구절처럼, 프롬에 따르면 ‘함께’가 중요한 것이지, 기쁨이나 안락함, 만족, 행복 등은 모두 부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프롬은 이러한 사이비 사랑, 진정한 사랑을 가로막는 거짓 사랑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이론적 측면을 다루었으니 이제 더 힘든 문제, ‘사랑의 기술을 실제로 활용하는 것’을 다루겠다고 선언하며 논의의 마지막으로 넘어갑니다. 바로 ‘사랑의 실천’이지요.

 

 

​​… (중략) ...

 

 

​프롬이 자신의 제목에서 사용하고 있는 ‘art’라는 단어는 흔히 ‘기술’보다는 ‘예술’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사실 이 낱말에는 두 가지 뜻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옥스포드 사전은 ‘art’를 ‘인간의 창의적 활동이나 상상의 표현 또는 응용으로, 회화나 조각 같이 어떤 근본적인 아름다움이나 감성적 효과를 산출하는 작품 활동’으로 정의하는 한편, ‘수련을 통해 연마할 수 있는 특정한 일을 수행하는 기술’로 정의하고 있지요. 이 낱말은 라틴어 ‘ars’에서 유래합니다. 라틴어 ‘ars’는 굉장히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술, 예술, 솜씨, 재주와 같은 의미는 물론 재능이나 소질을 가리키기도 하고, 전문적인 지식이나 직업,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라틴어 ‘ars’는 고대 그리스의 ‘τέχνη(tekhnē)’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낯이 익은 단어지요? 이 단어는 현대어에서 기술을 의미하는 ‘technic’이라는 단어 속에 살아 있습니다. 현대어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기술’이라는 개념이 별개의 단어로 분화했지만, ‘art’라는 본래의 낱말은 이처럼 원래의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τέχνη(tekhnē)’라는 개념의 가장 적절한 우리말 번역은 ‘기예(技藝)’일 것입니다. 우리말 사전은 이 단어를 ‘예술로 승화될 정도로 갈고 닦은 기술이나 재주’라고 정의하고 있지요.

 

‘art’라는 단어의 의미 역시 이와 같습니다. 단어 속에 기술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일반적인 기술, 이를 테면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기계를 다루는 기술이 필요하다’거나 ‘교육원에서 봉제 기술을 배우다’, ‘기술이 부족하다’와 같은 표현에는 ‘art’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요. ‘art’가 기술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오로지 그 기술이 고도로 숙련되어 세련되고 완숙한, 아름다울 정도로 탁월할 때입니다.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기술 역시 이와 같겠지요. 그의 말처럼 인간은 세련되고 완숙하게, 아름다울 정도로 탁월한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6. 8. 31. / 강북구 청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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