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Ch. 1, 2

August 24, 2016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의 ‘행위’에 있다. 이 행위는 사상을 초월하고 언어를 초월한다. 사랑의 행위는 대담하게 합일의 경험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를 통한 지식, 곧 심리학적 지식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 충분한 지식을 얻기 위한 불가결한 조건이다. 다른 사람의 실상을 보려면, 즉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 곧 불합리하게 일그러진 상을 극복하려면, 나는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인간을 객관적으로 알게 될 때에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궁극적 본질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들 가운데는 막상 곰곰이 따져보면 그 의미를 명확하게 정의하거나 분별하기 어려운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이런 말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런 표현들 가운데는 실제로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냐 물으면 의외로 선선히 대답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지요. 그럴 때면 대체로 두루뭉술히 비슷한 낱말들을 늘어놓거나, 그 말의 경험적 사례를 열거하는 식으로 엄밀한 개념 정의를 비켜 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편으로는 원래 언어의 의미망이라는 것이 본래 그렇게 생겼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구체의 사물을 지시하는 표현의 경우라면 이런 모호성이 도드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과’, ‘우유’, ‘종이’ 등의 낱말에서 말과 사물의 관계는 꽤나 가깝기 때문에, 생각보다 의미의 틈새가 넓게 벌어지지 않습니다. 사과의 경우라면 ‘풋사과’, ‘홍옥’, ‘국광’과 같이 그것의 세목을 보다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낱말을 통해 말과 사물의 관계를 더 좁힐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사과 한 알’, ‘풋사과 한 바구니’와 같이 그것의 특징이나 양을 한정하는 표현을 더한다면 말의 의미는 보다 분명하게 떠오르겠지요.

 

하지만 어떤 정서나 관념을 지시하는 언어의 영역으로 넘어온다면 문제는 조금 복잡해집니다. 이를 테면 ‘책임’, ‘존중’, ‘학습’과 같은 낱말과 그 용례를 살펴보면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 그 말이 통용되는 상황과 경우, 맥락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책임’이라는 말을 예로 생각해볼까요? 살다 보면 해결해야 할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누군가 ‘책임’을 지는 의미와 방식을 두고 종종 오해와 다툼이 생기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한 편에서는 ‘책임을 지고’ 어떤 조치를 취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두고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질타하기도 하지요. 때로 조치의 이행 여부로 책임의 이행 여부를 판가름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이런 상황에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문제의 당사자들 각각이 ‘책임’에 대해 서로 상이한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대화의 주제인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의미를 규명하기 어려운 개념들 가운데 ‘사랑’은 어쩌면 가장 정의하기 까다로운 개념일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나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개념인 만큼 단순히 언어적 차이만으로 그것의 의미를 명백하게 규정할 수 없으면서도, 시대와 공간에 따라 미묘하게 내포하는 의미와 개념의 외연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탐구의 무대를 같은 시대, 같은 공간, 같은 집단으로 한정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적으로 사랑이라는 개념은 사랑의 가장 일반적인 양식으로 여겨지는 연인관계에서의 사랑(戀愛)을 비롯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母性愛, 父性愛), 형제나 친구 사이의 사랑(友愛)과 같은 직접적인 대인관계는 물론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에 대한 사랑이나 짝사랑, 헤어진 연인에 대한 사랑처럼 간접적인 대인관계, 그리고 취미나 기호의 대상에 대한 사랑이나 심지어 종교적인 의미에서 신의 사랑이나 보편적 인류애까지, 사랑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관계의 거의 모든 양식에 적용할 수 있으니까요. 나아가 같은 연인관계에서의 사랑이라고 해도 관계에서 서로가 사랑에 대해 가진 생각은 전혀 다를 수 있으며 나의 어머니가 내게 보이는 모성애와 너의 어머니가 네게 보이는 모성애는 전혀 다른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이와 같은 경우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수식어나 보조 관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그때그때 필요한 서술로 의미를 부연해야 하는 불완전한 개념에 지나지 않을까요?

 

플라톤은 <향연 Symposium>에서 이러한 사랑의 특성을 흥미롭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제목처럼 어느 잔치 자리의 이야기를 전하며 그는 여러 사람의 입을 빌어 사랑(Eros)에 관한 다양한 정의들을 제시하지요. 잔치에서 참가자들은 돌아가면서 각자가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누구는 사랑을 통한 명예와 용기의 고취를 사랑의 본질로 정의하기도, 누구는 영혼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으로서의 사랑을, 또 누구는 만물을 만든 생성의 근원으로서 사랑을 제시하기도 하지요.

 

흥미롭게도 <향연 Symposium>의 결말은 한바탕 이야기를 나눈 뒤 어수선하게, 얼렁뚱땅 끝나는 잔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던 중 갑자기 난입한 인물에 의해 대화는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다시 술자리가 소란스러워지면서 잔치에 모였던 사람들은 만취하여 잠들거나 하나 둘씩 슬쩍 자리를 떠나지요. 어쩌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면서도, 다른 대화편에서의 주장들과 달리 사랑에 관해서라면 누구의 말이 맞는지 끝까지 따지는 것보다 일종의 열린 결말(?)을 남겨 두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노릇입니다.

 

사랑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에 앞서 예비작업으로 무언가를 ‘정의(定義)’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좋겠군요. 한자어 정의를 그대로 풀어 옮기면 ‘뜻을 정한다’가 되겠지요.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이 말의 의미 역시 동일합니다만, 여기서 한걸음 더 들어가면 그것의 보다 명확한 의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정하다(定)’는 ‘집(宀)’과 ‘바름(正)’의 의미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형성문자입니다. 이 말의 본래 의미는 곧 ‘집 안에 있어야 할 것들의 바른 자리를 정한다’ 혹은 ‘집 안에 사물을 바른 자리에 놓는다’가 되겠지요. 이렇게 보면 ‘뜻(義)’이라는 단어는 잠깐 생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 (定)’이라는 의미소만 홀로 쓰여, 무언가를 ‘정’한다는 표현이 그대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지요.

 

그렇다면 대상의 알맞은 자리를 어떻게 정하느냐, 바른 것이 무엇이냐고 다시 물을 수 있습니다. 한자어 ‘바르다(正)’는 하나를 의미하는 일(一)과 ‘그치다, 멈추다(止)’의 의미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곧 ‘하나의 길 앞에서 멈추고 살핀다’를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고 무심코 넘어갈 수 있지만, 사실 꽤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길이 하나밖에 없는데 무엇을 살펴야 할까요? 갈림길을 앞에 두고 있다면 길목에 멈춰서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살펴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길이 하나라면 사실 고민할 것도 없는 게 아닐까요? 이러한 관점에서 ‘바르다’는 하나뿐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살피고 나아갈지 돌아갈지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견주는 판단이 아닌 반드시 확실한 것,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에 대한 고민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내린 결정만이, 대상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위치가 바로 올바른 것이라는 뜻입니다.

 

서구의 경우와 비교해볼까요? ‘정의하다’를 의미하는 영어의 낱말은 ‘define’, 불어에서는 ‘définir’, 스페인어는 ‘definir’입니다. (독일어에는 명사형 ‘definition’이 있습니다.) 이 낱말들이 유사한 까닭은 모두 라틴어에서 유래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단어는 라틴어 ‘defini-’를 기원으로 갖습니다. ‘defini-’는 강조, 완료, 종결을 의미하는 ‘de’와 경계, 영토의 끝을 의미하는 ‘finis’의 합성어입니다. 즉 ‘defini-’는 ‘경계를 확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 단어의 원형인 ‘dēfínĭo’에는 지리적 경계를 정한다는 뜻을 물론 시간, 판단 등을 지정하다, 결정하다, 정의하다, 제한하다, 끝내다 등의 의미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어원 상 영토의 구획과 밀접하게 관련된 표현이지요. 이는 곧 경계를 확정하는 일, 제국의 땅과 그 너머를 구분하는 일, 제국의 규칙이 통용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확인하는 일을 뜻합니다. (이러한 특징은 현대어에도 잘 남아 있습니다. 영어에서 확실한 것, 분명한 것을 의미하는 형용사 ‘definite’은 곧 의미의 경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무한을 의미하는 ‘infinite’는 한계를 확정할 수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정의한다는 것은 본래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에 적용한다면 사랑의 영토와 경계를 확인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곧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사랑이고 사랑이 아닌지, 무엇이 사랑에 속하는 일이고 어떤 것이 사랑 바깥에 있는 일인지, 사랑의 규칙을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적용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확인하는 일이지요.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이라는 문제 앞에 멈춰 서서 살피고 나아감과 물러섬을 고민하는 일이 될 테고, 유럽의 전통에 비춘다면 사랑의 경계를 확인하고 그것의 영토와 경계를 확정하며 그것과 그것 아닌 것을 구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 Art of Loving> 첫 장에서 사랑을 둘러싼 몇 가지 난점을 언급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의 지적처럼 많은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오해들이지요. 그에 따르면 ‘사랑을 하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을 혼동하는 것이 사랑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입니다. 프롬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을 받는 것인 경우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프롬은 사랑을 마치 숨을 쉬거나 눈을 깜빡이는 것 같이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 여기고, 그저 사랑의 대상을 찾는 것에만 몰두하는 것 역시 사랑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그저 적절한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라고 치부하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문제들을 놓치고 맙니다. 이를 테면 자신이 왜 번번이 사랑에 실패하는지, 왜 자신에게는 사랑의 대상이 나타나지 않는지와 같은 문제들을요.

 

한편 프롬은 사랑의 시작과 지속을 구분합니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시작하는 것과 그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성질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이 문제 역시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만나고 그와의 관계를 시작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출 뿐, 정작 그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을 찾아 헤매다 어렵사리 만났지만 성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별하는 연인들이나, 연애 초반 불꽃처럼 타오르다 이내 서로에게 소원해지고 마는 경우 등을 생각해볼 수 있겠군요.

 

프롬은 이러한 오해들을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사랑에도 지식과 이론이 필요하다고 제안합니다. 프롬에 따르면 사랑에 관련한 지식은 오로지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행위를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지식과 이론이 필요하지요. 이처럼 프롬은 사랑의 행위로 나아가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서 인간의 유적 특성과 그 안에서의 사랑이 무엇인지 탐구를 시작합니다.

 

프롬은 인간과 다른 동물들 간의 가장 중요한 차이로 인간의 자기 의식,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갖는 것을 꼽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인식한다는 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인간이 갖는 근본적인 불안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프롬에 따르면 자기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과 다른 대상을 구분하는 것으로서, 자신이 속한 세계 및 타자와 자신을 분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고독이라는 조건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프롬은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결합에 대한 충동이 출발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orgiastic state)’에서 황홀경을 추구하기도 하고, 특정 집단이나 국가 같은 대상에 자신을 일치시키려 하거나 창조적 활동에 매진하기도 합니다. 프롬은 이러한 합일에 대한 추구 가운데 인간적인 결합, 다른 사람과의 융합을 달성하는 것을 바로 사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프롬은 이러한 융합의 종류를 ‘공서적 융합(symbiosis union)’과 ‘성숙한 사랑’으로 구분합니다. 공서적 합일이란 말 그대로 생명(biosis)이 결합되어 있는(sym-, syn-) 상태를 의미합니다. 생명이 결합되어 있다면 분리는 곧 어느 한 쪽이나 양쪽 모두의 죽음으로 이어지겠지요. 프롬은 어머니와 태아의 관계, 수동적 복종의 관계나 가학, 또는 피학 음란증 등이 이런 관계의 사례로 보고 있습니다. 프롬에 따르면 이러한 관계들은 상호 기생적인 관계이거나 한쪽이 다른 쪽에 대해 의존적인 상태로서 사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가 성숙한 사랑은 의존적인 방식의 융합이 아닌, 개체성을 온전히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지요.

 

​프롬은 사랑을 수동적인 감정이 아닌 능동적인 활동으로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활동을 수행하기 위한 역량의 문제가 중요하겠지요. 프롬에 따르면 사랑은 받고자 하는 욕구보다는 주고자 하는, 줄 수 있는 능력에 기반한 활동입니다. 프롬은 성숙한 사랑은 반드시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의 네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역설하며, 사랑에 있어 이 요소들이 연결고리를 이루는 지점을 제시하지요. 이에 따르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보호는 사랑의 자연스러운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상을 아끼고 보호하기 위한 자발적인 책임이 보호와 관심에 뒤따릅니다. 한편 보호와 책임은 자칫 대상의 개체성을 파괴하고 그것을 지배와 소유의 대상으로 만들 우려가 있는데, 대상에 대한 존중은 사랑이 지배와 소유로 전락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장치와 같은 기능을 수행합니다. 대상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대상을 잘 알아야겠지요? 그래서 프롬은 사랑에는 존중을 위한 지식, 알고자 하는 노력과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어서 프롬은 사랑의 대상을 기준으로 사랑을 형제애, 모성애, 성애, 자기애, 신에 대한 사랑 다섯 가지로 구분합니다. 이들 각각은 동등한 관계에서의 사랑, 불평등한 관계에서의 사랑, 배타적 관계에서의 사랑,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근간으로서의 사랑, 종교적 사랑을 의미하지요. 흔히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요. 프롬 역시 이와 유사한 주장을 제시합니다. 프롬은 사랑을 어떤 사람이나 대상과의 관계가 아닌 한 인간이 세계 전체를 대하는 태도이자 성격의 방향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자기 의식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역시 하나의 대상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결국 자기 의식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대상인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사랑이라는 형식을 취하지 못한다면 다른 대상에 대한 태도 역시 사랑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지요.

 

 

​​… (중략) ...

 

 

​​프롬은 어린아이의 사랑이 따르는 원칙과 성숙한 사랑이 따르는 원칙을 구분하여 제시합니다.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을 따르고,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므로 사랑받는다’는 원칙을 따르지요. 또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당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는 원칙을 따르지만, 성숙한 사랑은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필요하다’는 원칙을 따른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따르는 사랑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6. 8. 24. / 강북구 청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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