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June 30, 2016

도시에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길들의 계단 수가 얼마나 많은지, 주랑의 아치들이 어떤 모양인지, 지붕은 어떤 양철판으로 덮여 있는지 폐하께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말씀드리는 게 아무것도 말씀드리지 않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도시는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도시 공간의 크기와 과거 사건들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로등의 높이와 그 가로등에 목매달아 죽은 찬탈자의 대롱거리는 다리에서 땅까지의 거리 사이의 관계, 그 가로등에서 앞쪽 난간에 묶어놓은 줄과 여왕의 결혼식 행렬을 장식했던 꽃 줄 사이의 관계, 그 난간의 높이와 새벽녘 간통을 저지르다 난간을 뛰어넘는 남자의 급하강 사이의 관계, 창문 홈통의 기울기와 바로 그 창문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당당한 걸음걸이 사이의 관계, 곶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포함의 사정거리와 홈통을 파괴해 버리는 폭탄 사이의 관계, 어망의 찢어진 틈과 부두에 앉아 찢어진 어망을 손질하며 여왕의 사생아로 강보에 싸인 채 이 부두에 버려졌다는 소문이 있는, 찬탈자의 함선 이야기를 수백 번 되풀이하는 세 노인 사이의 관계로 도시는 이뤄집니다.

 

많은 사람들의 여행의 낭만을 이야기합니다. 때로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는 상상만으로도 일상의 활력소가 되곤 하지요. 반복에는 아무리 좋은 것들도 시들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매일같이 계속 먹는다면, 아무리 근사한 풍경이라도 똑같은 풍경만이 이어진다면, 만족도 감동도 자연스레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지리산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에서 늦겨울 해 질 녘 섬진강을 내려다보면 물안개가 근사하게 피어오르는 장관을 볼 수 있습니다. 하루는 암자를 찾은 한 길손이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떡 벌리고서 감탄을 연발하며 스님께 칭찬을 늘어놓았다 합니다. 암자에 기거하던 스님은 마당을 쓸다가 껄껄 웃으며 암자를 찾은 손님들이 처음에는 다들 그런 반응을 보이곤 하는데 사흘만 지나면 똑같이 칭찬이 쏙 들어가더라 답했답니다. 장관도 운치도 감동도 경탄도 어쩌면 실은 다 낯섦이 만드는 효과와 같달까요.

 

여행은 일상의 반복이 주는 권태와 피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손쉬운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잠시나마 생활 공간을 바꾸는 것은 생활 습관이나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니까요. 당장 일상을 이루는 공간과 배경 자체를 바꾼다면 그 위에서 펼쳐질 생활상 역시 얼마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부터의 일탈로 여행을 꿈꾸겠지요. 무엇이 되었든, 어디가 되었든 지금 이곳으로부터 떠난다는 생각은 반복을 견디는, 반복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한편 여행이 만드는 일상의 변화는 꼭 공간의 변화에만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흔히 여행에서 떠올리는 설렘에는 미지의 것에 대한,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이 들어 있지요. 이 새로운 경험들은 단순히 공간만 바뀐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의 변화는 무엇보다 일상을 둘러싼 규칙의 변화에 닿아 있습니다. 일상에는 일상을 지배하는 규칙들이 있습니다. 반복을 만드는 규칙들이지요. 아침에 눈 뜨는 시각,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행동, 주말의 취미 같은 생활의 규칙부터 버스와 지하철, 책상과 의자, 넥타이와 휴대전화 같은 사물의 규칙까지. 사람들이 여행에서 기대하는 새로운 경험은 다름 아닌 이 규칙들 바깥의 경험을 의미합니다.

 

한편 여행은 미지의 경험을 향한다는 성격으로 인해 종종 모험에 비견됩니다. 어쩌면 여행은 잠시지만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암묵적인 모험일지도 모르겠군요. 우리에게는 많음 모험의 기록들이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이야기들은 먼 길을 돌아야 했던 뭇 여행자들의 모험담이지요. 천 번의 밤 동안 셰에라자드의 목숨을 지켜준 이야기들 역시 모험을 거듭했던 여행자들의 전언이었습니다. 요괴들과 함께 천축국을 향해 떠나야 했던 한 스님의 이야기도,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평생을 떠돌았던 돗자리 장수 삼형제의 이야기도 따지고 보면 다 일종의 모험담인 셈입니다.

 

모험이라는 개념의 핵심을 떠나는 것이라고 했을 때, 모든 이야기는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모험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직접 겪은 모험이든 혹은 누군가에게 들은 모험이든 상상으로 체험한 모험이든 어떤 모험이든지요. 모리스 블랑쇼는 글쓰기의 조건을 가능한 한 멀리 갈 것, 그리고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으로 정의합니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의 원형으로 오디세이아를 제시하지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에서, 가장 극한의 경험을 겪은 뒤,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여정을 전하는 모습으로요.

 

자의든 타의든 모험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떠나야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오디세우스처럼 원치 않는 신탁에 떠밀려 사랑하는 가족과 정든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 했던 사람도 있고, 혜초처럼 절실한 걸음을 옮겨야 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라만차의 기사처럼 제 발로 모험의 여정을 개척하는 사람도, 카프카의 측량사처럼 익명의 제도 속에서 길을 잃는 사람도 있지요.

 

모험의 사정과 행색이 이렇게 다양합니다. 어쩌면 꼭 모험을 떠났던 사람이 직접 살아 돌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까마귀가 날고 배만 떨어져도 온갖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사람이니까요. 그만큼 삶과 이야기의 관계는 뗄 수 없이 가깝다는 의미지요. 언젠가 떠났다던 누군가가 돌아왔다는 소식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골목골목 퍼질 것이며 혹은 떠났던 누군가가 돌아오지 않는다 한들 또 그를 두고 어떤 이야기들이 담장 안팎을 두드리겠습니까.

 

또 어쩌면 이 이야기들이 사실과 달라도 이야기에게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사실이면 사실인대로, 사실이 아니면 사실이 아닌대로 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테니까요. 결국엔 어디서 시작했는지, 어디쯤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이야기들이요. (물론 이 때도 역시 이야기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의 범위, 즉 그가 도달했던 세계의 크기를 넘어설 수 없겠지요. 블랑쇼의 지적은 정확히 이 지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끝없이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은 끝없이 모험에 매료되는 것에 비견할 만합니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 Le Città Invisibili>에 등장하는 제국의 황제 쿠빌라이 칸은 수많은 영토를 정복하고도 자신이 정복했던 도시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여행자 마르코 폴로를 자신의 궁으로, 황실로, 정원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그 와 함께 관념의 영토를 순례하며 끝나지 않을 여행을 거듭하지요.

 

여행자가 묘사하는 도시의 모습들은 이야기의 제목처럼 선뜻 눈에 그려지지 않습니다. 총 아홉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야기에는 총 55개의 도시가 등장합니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불연속을 이루는 각각의 도시들은 ‘기억’, ‘욕망’, ‘기호’, ‘교환’, ‘눈’, ‘이름’, ‘죽은 자’, ‘하늘’, ‘섬세한’, ‘지속되는’, ‘숨겨진’ 등의 연결고리로 이어지지요. 구체는 때로 의미를 한정하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구체를 바탕으로 보이지 않는 더 많은 것들을 상상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구체의 정확성이 사유와 상상의 여지를 제한하기도 하지요.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약합니다. 구체적 묘사가 등장하는 지점들은 오로지 그 도시들을 더 감추는 방식으로, 구체를 통해 도시를 감춰서 도시의 진상을 상상 뒤로 숨기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사람의 정체성만 있는 게 아니라 도시에도 정체성이 있습니다. 도시 뿐 아니라 다른 사물과 사건들에도 그것을 이루는 정체성이 있겠지요. 칼비노가 마르코 폴로의 입을 빌어 표현하는 생각에 따르면 어떤 도시의 정체성은 그것을 이루는 대상들의 관계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칼비노에 따르면 도시는 교환의 총체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교환은 물질적인 것은 물론 언어, 욕망, 추억 등의 관념들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 (중략) ...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여름 밤에 꼭 어울릴 것 같은 소설입니다. 차가운 맥주 한잔과 함께 도시와 도시 곳곳을, 마을의 골목과 골목 구석구석을 누빌 수 있으니까요. 안개처럼 또렷한 관념의 도시랄까요, 여행잡지에 어울릴 법한 외국 도시의 낯선 골목과 이국적 풍광이 아닌, 기호의 거리와 상상의 성벽으로 둘러쌓인 도시를 쫓아가는 발걸음은 여름 밤의 시간을 무한에 가깝게 확장합니다.

 

칸과 여행자의 마지막 대화는 칸의 지도책과 함께 펼쳐집니다. 칸의 지도책에는 사람들이 상상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땅, 약속의 땅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토피아, 태양의 도시, 뉴아틀란티스, 이카리아 등의 이름이요.

 

먼저 유토피아부터 둘러볼까요? 아마 상상의 도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일 것 같습니다. ‘어디에서 없는 곳’이라는 의미의 이 도시는 사실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답게 이상향에 대한 일종의 대명사처럼 쓰인달까요, 흔히 플라톤이 <국가 Politeia>에서 이상적으로 제시했던 국가부터 토머스 모어가 묘사하는 도시까지 ‘세상에 없을 법한 이상적인 곳’을 가리킬 때 으레 유토피아라고 칭하곤 하지요.

 

르네상스 이후 근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이상향에 대한 상상이 다채롭게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1516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Utopia>를 시작으로1602년 토마소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 La Citta del Sole>, 1627년 프란시스 베이컨의 <뉴아틀란티스The New Atlantis> 등이 연달아 등장했지요. 이들이 그리는 이상향의 모습 역시 공상주의 공동체와 같이 사회 조직에 중점을 둔 이상 국가부터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댄 번영과 복지를 그리는 모습까지 다양합니다. (아마 상상 속에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한 시대였겠지요.)

 

이카리아는 19세기 프랑스의 공산주의자 에티엔 카베의 소설 <이카리아 기행 Voyage en Icarie>에 등장하는 실험적 공동체의 이름입니다. 카베는 대혁명 이후 프랑스의 격변기 동안 공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정치인입니다. 복고왕정 시기 동안 왕정 복고에 반대하는 비밀 결사 활동을 펼치기도 했고 7월 혁명에도 참가했지요. 상상의 도시들 가운데 이카리아가 특별한 이유는 실제로 현실에서 이루어졌던 실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카베가 최초로 자신의 소설에서 묘사했던 이카리아는 공산주의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이카리아에는 상거래도, 화폐도 없고 범죄도 전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사법이나 경찰 조직도 없습니다. 기계의 사용으로 노동 시간은 줄어들고 여가와 교양이 중시되는 사회입니다.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이런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카베는 실제로 아메리카 대륙의 텍사스를 공동체의 후보지로 선정하고 일군의 사람들과 함께 이주를 결심합니다. 1848년 2월 선발대가 텍사스로 출발한 뒤 카베도 그해 말 미국으로 건너갔지요. 이들은 일리노이주 노부에서 대통령제의 민주공화국을 표방하는 농업 중심의 생활 공동체를 꾸려나가기 시작합니다. 엄격한 도덕적 규칙들이 있었고 위반자는 공동체에서 추방되었지요. 이카리아 공동체는 몇 차례 갈등을 겪은 끝에 결국 정식으로 해산을 결정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최초 출발할 때 400명이었던 공동체의 인원은 해산을 결정할 때에는 8명의 노인만 남았다고 합니다.) 무려 50년이나 지속한 현실 속의 공동체입니다.

 

칸은 몇 가지 이상적 도시들의 모습을 여행자에게 묻습니다: ‘자, 너는 많은 여행을 했고 그 흔적들을 보았을 테니, 순풍이 이러한 미래의 도시들 가운데 어느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지 말해보라!’

 

여행자는 답하지요: ‘지금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도 도시들은 폐하의 국경 내 여기저기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런 도시들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불연속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때에도, 그런 도시를 찾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셔서는 안 됩니다.’

 

칸의 시선은 이제 악몽과 저주 속 도시들을 쫓습니다. 에녹, 바빌로니아, 야후의 나라,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에 이르기까지.

 

에녹과 바빌로니아는 성서에서 야훼의 저주를 받은 도시들의 이름입니다. 에녹은 성서에 등장하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의 첫 아들입니다. 질투심에 사로잡혀 자신의 동생을 살해한 죄로 추방당한 카인은 도망친 곳에 성을 쌓고 아들의 이름을 따 에녹이라 부르지요. (성서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동명의 에녹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종종 무한을 상징하는 기호로 등장하는 바빌로니아 역시 성서에서는 야훼와 그 백성의 대적자로 등장합니다.

 

야후는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에서 걸리버의 마지막 여행지에 등장하는 짐승입니다. 거인국과 소인국, 마법과 공상의 섬을 지난 걸리버는 마인국(馬人國)에 도착합니다. 그곳은 ‘후이늠(Houyhnhnm)’이라고 하는, 훌륭한 지성과 성품, 예절과 교양을 갖춘 말들이 지배하는 섬이지요. 후이늠들은 ‘야후(yahoo)’라는 짐승을 가축으로 사육합니다. 야후는 인간과 똑같은 형상을 하고 있지만 야만스럽고 포악하며 미개한 짐승이지요. 풍자극답게 걸리버는 고향으로 돌아온 뒤 ‘단지 언어를 사용하고 벌거벗고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야후들과 구분되지 않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는 영국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가 저술한 동명의 소설에 등장하는 미래 도시입니다. 문명과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미래 사회에서 인간은 모두 인공수정을 통해 ‘만들어진’ 뒤 유리병 속에서 자라나지요. 유전적 지능의 우열에 따라 사회에서 지위와 역할이 나뉘고 고민이나 불안 등의 감정은 모두 약물로 제거됩니다. 가장 현실에 가까운 디스토피아의 모습일까요?

 

이제 칸이 다시 여행자에게 묻지요: ‘만약 우리가 도착할 최후의 상륙지가 지옥의 도시라면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다 부질없는 짓인가?’

 

여행자가 다시 답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들 대화의 마지막에서 여행자는 지옥을 벗어나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 방법은 쉽습니다.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어려운 방법입니다. 지옥의 한복판에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구별하여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이지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바로 지금이라는 여행자의 말에 동의하시나요? 만일 그렇다면 지옥을 벗어나는 여러분의 방법은 무엇인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지금 낙원과 지옥 중간쯤 어딘가에 있겠지요. 즐거운 여행길 되시길 바랍니다.

2016. 6. 30. / 아름다운가게 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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