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16, 2020

불행의 효력은  불행한 희생자의 말을 들어주고 그의 곁에 함께 있으려는 사람의 인내심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 그래서 슬픔에 젖은 사람은 초상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혼자 남게 된다. 혹은 사람들이 그를 덮친, 그가 가진 그의 유일한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더 이상 그에게 용납하지 않기도 한다. 그 슬픔의 세상이 도저히 견딜 수 없고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슬픔은 사회적 만료 기간이 있으며, 아무도 다른 사람의 슬픔을 깊이 생각하려고 하지 않으며, 자신의 슬픔 역시 짧은 기간에만 참고 견뎌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 하비에르 마리아스, <사랑에 빠지기>

August 9, 2020

거주가 발생하는 모든 공간은 집이라는 관념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 조금이라도 몸을 숨길 만한 곳을 발견하기만 하면 사람의 상상력은 집이라는 관념을 향해 움직인다. 인간은 만져지지도 않는 그늘을 가지고 벽을 짓고, 방어의 환영 속에서 기운을 회복할 수 있다. 반대로 두터운 벽 뒤에서도 몸을 떨고, 더할 수 없이 단단한 성벽 아래에서도 공포에 사로잡힐 수 있다. 피난처의 관념 속에서 인간은 끝없는 변증법을 통해 피난처의 경계에 민감성을 부여한다. 그는 생각과 꿈을 통해 집의 현실태와 잠재태 사이에 거주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피난처들은, 모든 은신처들은, 모든 방들은 여러 서로 조화되는 꿈의 가치들을 획득한다.

   

-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August 2, 2020

모든 좋은 책은 특정한 독자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 씌어진 것이며, 바로 그 때문에 다른 모든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는 좋게 여겨지지 않는다. 좋은 책의 명성은 좁은 토대에 기초하여 서서히 쌓아질 수 있을 뿐이다. 평범한 책과 저급한 책은 많은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하고 또 많은 사람의 마음에 든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평범하고 저급해지고 만다.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July 26, 2020

그림은 세잔의 세계였으며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는 제자도 없이, 가족의 찬사나 심사위원들의 격려 한 번 받지 못한 채, 오로지 홀로 작업을 해나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오후에도 그는 그림을 그렸다. 1870년, 병역 기피 혐의로 경찰에 쫓기면서도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천직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그의 그림이 가진 새로움이 자신의 시각 이상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의 전 생애가 자신의 신체의 이상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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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스 메를로-퐁티, <의미와 무의미>

July 19, 2020

아침이 되어 재를 치우느라고 난로 아래쪽의 재받이통을 꺼내자 타버린 종잇조각들이 있었다. 혹시나 해서 손끝으로 집어들어 살펴보니 글자 같은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손가락으로 비비니 종이는 흔적도 없이 바스러져 먼지처럼 흘러내렸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기행은 무척 기뻤다. 자신이 쓴 글자들이 강철이나 바위 같은 것이 아니라 사그라드는 불씨에도 쉽게 타버려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들이어서.

   

-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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