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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거울 단계’ 논문에서 자아 자체가 편집증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이론을 발달시킨다. 기존의 자아 심리학은 정신을 자아, 이드, 초자아로 구분하는 프로이트의 관점을 논의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 위에서 자아를 이드에 맞세우고, 정신의 비이성적인 부분인 이드에 대립하는 이성적인 부분인 양 취급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신 분석의 실천은 자아의 강화와 외부 세계에 대한 적응을 지향한다. 반면 라캉에 따르면 자아는 이성적이기는커녕 정신병의 증상이다. 자아는 인식하고 사유하고 결정하는 자유의 주체가 아닌 실제 사물을 비추는 거울이나 거울에 비친 가상에 불과할 뿐더러 이마저도 주체와 사물의 접촉을 상상적인 방식으로 반영한다. 자아가 정신병의 증상인 까닭은 그럼에도 대상이자 결과물로서의 자아가 언제나 자신을 원인이자 주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진정한 주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오히려 언제나 자아는 주체가 아닌 주체의 경험 내부의 특별한 대상이라고 말해야 한다. 라캉의 이러한 주장은 의식 철학 전통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라캉의 관점에 따르면 의식과 자아, 또는 자아의 의식은 사유의 주체가 아닐 뿐더러 참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 사유로서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인 오류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의식 자체가 곧 기만이자 착란이고, 자아 자체가 정신병의 증상인 이상 자아의 모든 활동 또한 일련의 증상일 수밖에 없다.

- 김은주, '스피노자와 라캉: 욕망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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