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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오늘 함께 다룰 책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가이자 드물게도 국내에 모든 책이 번역되어 나와 있을 만큼 잘 알려진 사람이기도 하니, 개인의 약력에 대한 소개는 이 자리에서 굳이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괜찮겠지요.


쿤데라는 흥미롭고 작품을 여럿 발표한 소설가로 익히 알려져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소설이 무엇인지, 또 소설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제시하는 이론가로 꼽기에도 손색이 없습니다. 쿤데라는 특히 소설이 가진 문학적 가치에 대한 뚜렷한 확신을 바탕으로 소설이라는 형식, 소설이라는 매체가 가진 고유한 특징을 여러 차례 강조하는데, 그에 따르면 소설이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는 무엇보다 실존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에 있다고 하는군요. 이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오늘 밤 천천히 이야기 나누어 보도록 하시지요. 어떤 대상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것은 동시에 그것과 비교되는 다른 대상들의 특징 또한 함께 부각시키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쿤데라의 소설론을 통해 그가 말하는 소설의 방법은 물론 물론 문학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요.


쿤데라의 소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라면 일단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도 제목쯤은 어쩐지 익숙하게 느낄 만큼, 또 ‘참을 수 없는 어떤 것’ 운운하는 말법이 일종의 경구처럼 쓰이기도 하지요. 이 소설을 각색해 영화로 만든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시도는 소설의 유명세를 한층 더 보태기도 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했는데, 나름대로 멋들어진 영상미와 한국 관객이 공감할 만한 주제로 제법 관심을 모으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정작 쿤데라 자신은 원작의 영화화를 허락한 일을 두고, 두고두고 후회하고 불만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영화 감독이나 관객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 영화는 영화가 원작으로 내세우는 자신의 소설과 무관하다고 분명하게 선을 긋지요. 그저 단순히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거나 성에 차지 않았다거나 하는 수준의 정색이 아니라 단호하게 그건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작품이라고 단언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면 앞으로 다시는 자신의 작품을 다른 매체로 각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밝히기도 했고요. 글쎄요, 이렇게까지 말한 마당에 그 이후로도 그가 다른 제안들을 받은 적이 있었을지는 한편으로 궁금하군요. 어쨌든 이런 선 긋기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어서 조금 더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민음사에서 발행한 밀란 쿤데라의 전집에는 <소설의 기술>, <배신당한 유언들>, <커튼>, <만남>까지 단행본 기준 모두 네 권의 에세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쿤데라의 소설 만큼이나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요. 사실 어떤 작가가 직접 다루는 작업이 아닌 그의 다른 기록을 들춰 보는 것은 퍽 흥미로운 일입니다. 작품이라는 결과물로 정제되기 이전의 풍성한 생각의 갈래들을 확인할 수도 있고, 또 이러한 요소들 가운데 어떤 것이 작품으로 이어지고 어떤 것이 그 과정에서 모습을 바꾸거나 지워졌는지 천천히 확인하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지요. 또 작품 이전의 경험이나 사유가 어떻게 작품으로 이어졌는지 그 과정을 찾아볼 수도 있겠고요.


<소설의 기술> 첫 장을 펼치면 당장 등장하는 머리말에서 쿤데라는 이론의 세계는 자신과 무관하며,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무자의 고백을 담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았을 뿐이라고 덧붙이면서요. 본격적으로 책장을 넘기기 전에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실 이런 표현에는 한편으로 이상하고 한편으로 교묘한 장치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을 두고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는 일이야말로 이른바 이론이, 학문이 하는 일이 아니었던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론이나 학문과 무관하게 어떤 대상이 무엇인지 밝히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사실 머리말에서 쿤데라는 이미 말하고 있습니다. “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밝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일이다.”


퍽 중요한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쿤데라의 생각을 좇아가면서 차츰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흥미롭게도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며 1935년 5월 빈의 후설을 소환합니다. 후설은 1년 뒤 이 강연을 바탕으로 일부를 보완해 그의 마지막 저작,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을 발표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전체 3부의 내용 가운데 1, 2부는 강연 이듬해 학술지를 통해 발표되었고, 미완으로 남은 3부는 추후 유고집 발간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후설은 현대 철학의 대단히 중요한 줄기라고 할 수 있는 현상학을 정초한 철학자인데, 우리는 일단 쿤데라를 따라서 ‘선험적 현상학’보다는 ‘유럽 학문의 위기'에 초점을 맞춰봅시다.


이 저작에서 후설은 먼저 학문 일반이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했고,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당연하게도 아무 이유 없이 학문을 그 자체로 신성시할 까닭도 근거도 없기 때문에, 학문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학문이 왜 필요한가, 무엇을 위해 학문이 필요한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 가장 문제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먹는 것이나 입는 것? 권력이나 사랑의 문제? 세계를 더 잘 이해하고 잘 살아가는 것? 퍽 중요하고 심오한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것들은 어떻게 보면 죄다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무엇보다 인간적인 문제,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니까요.


후설에 따르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간 자신입니다.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자 철학이 궁극적으로 문제시하는 것 또한 인간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물음을 던집니다. 다른 대상과 자신이 어떻게 다른지 탐색하면서요. 후설은 인간이 가장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탐색하는 작업이 바로 철학이라고 규정합니다. 물론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탐색하고 규정하는가에 따라 인간 존재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스스로와 세계를 어느 정도까지 탐색해 들어가고 이해할 수 있는지는 인간의 위대함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후설은 학문의 위기를 지적하면서 이것을 곧 인간성의 위기로 읽어냅니다. 한 시대의 학문이 드러내는 것은 곧 인간의 위치와 성취를 확인하는 지표인 셈이니까요. 인간이 다른 대상에 대해 탐구하는 활동으로서의 학문이 근본적으로 인간 스스로에 대한 탐색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이러한 학문 활동의 위기는 곧 인간 자신에 대한 탐색의 위기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 후설은 이렇게 모든 학문이 인간의 삶에 기반하고 있고, 따라서 인간 삶의 모든 의미와 밀접하게 관련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또 인간은 이러한 탐구 역량을 바탕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인 세계에 대해 자유롭게 어떤 태도를 취할 수도, 그 세계를 능동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할 수도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으로서의 세계는 단순히 물리적인 요소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에 축적된 시간과 그에 상응하는 수많은 의미들로 이루어져 있겠지요. 그래서 후설은 학문의 모범은 정신적이고 역사적인 것을 포함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리와 규범과 이상을 그려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학문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이성과 이성을 지닌 인간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고 확인할 수 있는 매체로서의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강연의 제목이 ‘인간의 학문'이 아니라 ‘유럽 학문의 위기'라는 점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후설은 우선 방금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은 논의의 전개 과정에서 그것을 ‘유럽의 학문’으로 한정하고 있거니와, 또한 그것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자신의 진단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후설은 당시 학계의 지배적 경향인 실증주의가 감각적, 경험적 확인을 학문의 궁극적인 기준으로 내세우면서 대상의 역사적이고 정신적인 측면까지 함께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오히려 포기했다고 비판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유효합니다.) 학문과 인간의 관계에 따라 학문 활동의 특징이 이렇게 한정되면 학문 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특징에도 제한이 생기겠지요. 학문이 감각만으로 세계를 설명하려 할 때 그러한 세계에서 성립하는 인간의 위치는 그저 세계를 감각하는 존재로 국한됩니다. 인간 또한 세계를 이루는 감각들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이렇게 후설이 진단하는 유럽 학문의 위기는 곧 인간이 처한 위기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 위기의 본질을 명확히 밝히고 타개하기 위해 후설은 르네상스를 비롯해 갈릴레이나 라이프니츠에 이르기까지 다시 폭넓은 논의를 전개하지만, 우리는 이쯤에서 쿤데라로 다시 돌아옵시다. 후설이 말하는 ‘유럽'은 고대 희랍 문명의 탄생에서 출발해 차츰 지리적으로 유럽 대륙 바깥까지 확장한 정신적 동질성을 의미합니다. 역시 처음은 언제나 고대 희랍이군요. 유럽 정신의 태동으로 이 시기가 왜 그토록 중요한가 하니, 확인할 수 있는 역사 상 처음으로 인간이 자신의 작은 경험 세계를 초과하는 ‘세계 전체’라는 이념을 발명했고, 그것을 풀어야 할 수수께끼, 즉 탐구의 대상으로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수수께끼를 푸는 목적이 실용적인 목적이나 실제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앎에의 열정이 사람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지요. (이 대목에서 철학이 문자 그대로 앎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철학은 때로 우울한 날의 희망이 되거나 누군가에게 삶의 무기가 될 수 있을지언정 언제나 그것은 앎과 사랑 사이에, 오직 그 사이에서만 성립합니다.)


후설이 유럽 학문의 위기를 설파했던 시기는 파시즘의 대두와 압도적인 기술 문명의 폐해에 대한 공포가 퍽 만연하게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오늘날의 기준으로 비춰 본다면 당시의 기술 문명이라는 것이 새삼 뭐 그리 파괴적일 수 있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본래 어떤 대상에 대한 예민함은 그것의 세력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가 아닌 그것이 막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가장 날카로운 법입니다. 예컨대 시끄러운 공사장 소음 속에서 몇 사람이 고함을 더 보탠들 말소리도 잘 분간하기 어렵겠지요. 반면 고요 속이라면 옆 사람의 작은 숨소리 또한 귓전에 생생하게 와닿을 겁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쿤데라가 무질의 소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대목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후설의 준열한 비판을 뒤로 하고 쿤데라는 후설이 간과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바로 후설이 학문의 본질로 규정했던 어떤 활동이 실은 비단 학문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쿤데라에 따르면 후설이 결정적으로 간과한 것은 학문의 위기가 태동한 근대 정신이 데카르트와 함께 시작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세르반테스로부터 출발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후설의 지적처럼 철학이나 과학이 어느샌가 인간의 존재를 망각한 것처럼 보이고, 또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이 망각된 존재로서의 인간, 혹은 인간의 실존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사고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으니 바로 세르반테스와 함께 시작한 유럽의 예술, 즉 소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후설에 이어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의 중요한 측면들이 유럽 철학의 전개 과정에서 망각, 은폐되었다고 지적하고 이에 대한 분석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쿤데라가 보기에 유럽의 근대, 망각이 정점으로 치달았던 바로 그 시기에 소설은 인간 실존의 중요한 주제들을 계속해서 포착하고 제시해 왔습니다. 쿤데라에 따르면 변화하는 시대상에 따라 소설은 나름의 방식과 고유한 논리를 찾아 실존의 상이한 면모들을 밝혀 왔습니다. 세르반테스와 함께 소설은 고정된 관성의 세계로부터의 일탈, 즉 모험의 의미를 묻고, 리처드슨과 함께 인간의 내면, 즉 감정의 은밀한 움직임을 검토하기 시작합니다. 발자크는 자신이 그것을 인지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역사에 뿌리내린 인간 삶의 모습을 드러내고, 플로베르와 함께 소설은 미지의 세계였던 일상의 지평을 탐사합니다. 톨스토이를 통해 소설은 사람들의 결정과 행위에 어김없이 개입하는 비합리적인 요소를 조명하기 시작했고, 프루스트를 통해 붙잡을 수 없는 과거의 순간들이라는 시간성을, 조이스를 통해 언제나 흐르는 것, 유동하는 시간으로서의 현재를 탐색했습니다. 늘 그랬습니다, 소설은. 인간사의 미지의 영역과, 혹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알지 못하는 어떤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영역을 찾아내고, 탐사해 왔지요. 소설의 태동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언제나처럼요. 간단하게 소설의 역사를 일별한 뒤 쿤데라는 이어서 헤르만 브로흐를 인용합니다. “오직 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만을 발견하라. 그것만이 소설의 유일한 존재 이유다.” 이제 쿤데라가 왜 그렇게까지 자신의 작품을 각색해 만든 영화와 자신의 소설이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하는지, 또 왜 다시는 자신의 작품을 영화든 연극이든 다른 어떠한 매체로도 옮기는 것을 거부하는지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그에게 있어서는 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 오직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을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바로 소설의 유일한 이유이자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이렇게 소설의 고유성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먼저 무엇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요? 소설,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소설의 주제나 이야기의 구조 따위도 물론 중요하겠습니다만 등장 인물을 제외하고 소설이 가진 특징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소설에는 무엇보다 사람, 혹은 꼭 사람이 아니어도 동물이든 귀신이든 어떤 행위자가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소설을 몇 가지 계기로 연결되어 있는 행위자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보여주는 글 뭉치라고 정의한다면 아마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겁니다. 소설에 따라 등장하는 인물의 비중이나 중요성, 또 등장 인물을 제시하는 방식이나 소설 안팎에서 등장 인물이 수행하는 기능이 다를 수는 있지만 인물은 소설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소설이 발견한 중요한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소설가는 등장 인물과 사건을 통해 주제를 드러냅니다. 자신의 생각을 그저 단순하게 나열하거나 설명하는 글은 누가 보더라도 별로 소설처럼 보이지 않겠지요. 소설은 인물들의 행위를 멀리서 관찰함으로써 어떤 주제를 드러낼 수도 있고, 혹은 행위 안쪽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말과 생각을 통해 주제를 직접 다룰 수도 있습니다. 소설이 단순히 역사나 사회 현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보고하는 것이 아닌 다른 주제를 가질 수 있다면, 이러한 까닭에 그것은 언제나 인물에 관한 것, 그러니까 사람에 대한 것이 되기 마련이지요.


소설의 기술에 대해 쿤데라와 대담을 진행한 크리스티안 살몽은 바로 이런 점에서 모든 소설은 심리 소설이 되는 것, 즉 인간 심리 상태의 수수께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소설이 역사나 사회적 배경을 전면에 내세우든 혹은 인간의 일상과 내면을 전면에 내세우든 간에, 소설적 사건은 얼마간 그 사건에 얽힌 인간의 심리를 다루게 될 테니까요. 소설이 가진 이런 특징을 고려한다면 어떤 소설이 인물의 심리를 다른 소설에 비해 더 직접적 다루고 있다고 해서 그 소설만을 ‘심리 소설’이라고 특칭하는 것은 어색하거나 불필요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인물을, 그리고 인물의 심리를 다루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소설은 이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니까요.


쿤데라에 따르면 모든 시대의 소설은 자아라는 수수께끼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아직 ‘소설'이라는 장르가 채 만개하기도 전에, 유럽 최초의 이야기꾼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은 심리적 접근법이라고는 이름도 방법도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인물의 심리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데카메론>에서 보카치오는 오직 인물들의 행동과 모험만을 보여주지만, 행동과 모험으로 이루어진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었지요. 행동이 가진 이러한 특징은 ‘모든 행동의 의도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단테의 표현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정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태초에 행동은 마치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초상화처럼 그의 모습을 드러냈지만, 초상화의 모습과 주인의 모습이 달라지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지요. <운명론자 자크>에서 자크는 친구의 약혼자를 꼬여 내고 기뻐합니다. 아버지가 이를 꾸짖으며 매를 들자 자크는 홧김에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군대에 입대하지요. 첫 전투에서 무릎을 다친 자크는 죽을 때까지 다리를 절게 됩니다. 군대에 입대한 바람에 기껏 유혹한 친구의 약혼자와도 떨어지게 되었고, 홧김에 내린 충동적 선택은 그를 평생 불구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크는 이를 사랑의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행위가 있는 곳과 행위의 주인이 있는 위치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이지요. 바로 이 발견이야말로 소설의 기원입니다. 행위와 행위의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틈을 발견한 것, 행동의 역설적인 측면을 발견한 순간 소설은 ‘이야기’로부터 구분되어 나온 겁니다. 때문에 모든 탁월한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이 틈새의 문제를 다루기 마련이고요.


행위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소설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그것이 이야기와 소설을 구분하는 얇지만 선명한 경게선이니까요. 인간은 행위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가 하는 행위의 총합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톨스토이를 참조해볼까요. 한 여자와 남자가 각자의 삶을 살다 우연히 마주칩니다. 몇 번의 마주침을 통해 서로에게 호감을 품은 이들은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게 되기를 내심 소망하며, 고백을 위한 적당한 시기를 기다립니다. 어느 날 이들에게 숲속에서 밤을 주우러 갔다가 일행과 떨어져 단 둘이 남은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방해가 되거나 신경 쓰이는 다른 사람들도 없겠다, 둘만 걷는 조용한 숲길의 분위기는 고백에 꼭 알맞게도 느껴집니다. 마침내 오랫동안 기다리던 기회가 만들어졌지만, 그리고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들은 어쩐지 어색한 마음에 어느 한 쪽도 선뜻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그저 걸으면서 밤을 주울 뿐이지요. 온 마음과 관심은 이미 온통 상대방에게 쏠려 있는 상태인데도요. 오랜 침묵 끝에 여자가 먼저 말을 꺼냅니다. 느닷없이, 마음에도 없는 밤 이야기를 건네지요. 그런 다음 다시 침묵이 흐르고, 남자는 여자에게 건넬 말을 찾다가 결국 그 또한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마음에도 없는 밤 이야기를 꺼내고, 이들은 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속으로 점점 절망적인 무력감에 젖어듭니다. 고백은 점점 멀어지는군요. 집에 돌아온 남자는 자신이 방금 전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 까닭은 죽은 부인에 대한 추억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는 그것이 거짓 이유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톨스토이는 밤을 주우며 안나와 브론스키가 엉뚱한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부터 방에 돌아온 브론스키가 생각을 정리하는 장면까지를 매우 짧게 묘사하고 넘어갑니다. 매우 소설적인 이런 장면은 사실 <안나 카레니나> 전체를 통틀어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물들이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미끌어져 엉뚱한 행동을 하고는, 그런 다음 어물쩡 합리화하고 넘어가는 모습을요.


어떤 결정과 행위와 그것에 대한 사후적 의미 부여는 소설의 구성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하나의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이 어떻게 행위로 전환되는가, 행위들은 어떻게 연쇄하는가, 와 같은 일련의 질문과 이에 대한 응답이 소설을 구성합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이야기꾼들은 내적 논리,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롯의 논리적 필연성이라고 부른 원칙에 의해 이 질문을 구성합니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누가 보더라도 쉽게 납득할 수 있고 그럼직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러한 전통을 물려받은 초기의 소설가들은 삶이라는 기이하고 혼란스러운 재료에서 명징한 합리성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행위를 만드는 동기는 어쨌거나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하나의 행위가 다른 행위를 유발한다면 행위의 연쇄 또한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베르테르는 친구의 부인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친구를 배신할 수는 없지요. 그렇다고 자신의 사랑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사랑의 격정을 표현하고, 친구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자신의 사랑을 숨기거나 부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랑을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어떠한 선택도 불가능한 갈등 속에서 자책하다가 결국 자살하는 것이지요. 수학 공식처럼 명료하고 분명한 죽음입니다.


반면 안나는 왜 목숨을 끊었을까요? 그날 숲길에서 브론스키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브론스키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존중과 예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요. 또 그렇게 따지면 안나 또한 자식들과 세간의 소문들을 신경 쓰느라 브론스키와 그리 다르지 않은 처지였을 때가 많지 않았던가요? 베르테르의 죽음과 비교해 안나의 죽음 바로 앞 장면을 떠올려본다면 이런 의문은 더 선명해집니다. 베르테르의 죽음은 마치 방정식과 같습니다. 방정식의 풀이 과정은 좌변과 우변의 수를 옮기거나 더하고 빼는 일련의 연산 끝에 마지막으로 ‘x=0’과 같은 정답을 이끌어내지요. 한편으로 연산의 모든 과정은 논리적 규칙을 따라 진행됩니다. 마지막의 명료한 정답에 도달할 때까지요. 다른 한편 연산 과정과 별개로 정답은 이미 맨 처음 복잡한 방정식 속에서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연산을 그것을 분명하게 꺼내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베르테르의 사정 또한 방정식처럼 일련의 합당한 연산 과정과 그것에서 연유하는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삶이 그렇게 흘러가던가요? 삶이 진짜로 그렇게 흘러갈까요? 만약 진짜 삶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금 브론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오로지 시간이 지난 다음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조정하기 때문입니다. 안나의 사정은 베르테르와는 전혀 다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 두 죽음의 차이는 우선 괴테가 베르테르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과 톨스토이가 안나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 사이에 존재하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소설의 역사에서 초기 소설이 주제를 구성하고 드러내는 방식과 시간이 지나며 소설이 새롭게 발견한 자신의 영토에서 수행하는 탐구와 표현의 방식 사이에 존재합니다.) 안나가 기차역에 간 것은 자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브론스키를 마중 나온 것이었는데요. 그녀는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기차에 몸을 던집니다. 행위가 결정에 선행하는 것이지요. 합리성이라는 돋보기를 들고 행위와 선택 사이를 아무리 뒤적여도 아무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방정식과 같은 연산 과정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안나의 선택의 의미는 합리적 인과성 너머에서 성립하니까요. 톨스토이는 어떻게 비논리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이 행위에 개입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줌으로써, 소설이 수행하는 위대한 탐구의 선로에서 올라섭니다.



… (중략) …



헤겔은 데카르트처럼 코기토, 즉 생각하는 나를 기반으로 삼아 세계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를 영웅적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오늘날의 그 흔한 자기중심적 사고나 나르시시즘으로 오해하는 것은 정말 곤란합니다. 반성 없이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 경험을 기준으로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자의적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자기중심성과, 기존의 확실성이 사라진 세계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다시 정초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인간 이성을 내세우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니까요.


쿤데라는 데카르트적 이성의 영웅적 면모를 강조한 헤겔의 지적에 한 가지 사실을 덧붙입니다. 바로 세계의 확실성을 다시 정립하는 것 만큼이나 그 반대 측면, 그러니까 세계의 애매성과 불확실성을 견디는 것 또한 그에 못지 않은 큰 힘을 요구한다는 점이지요.


우리는 소설을 이루고 있는 많은 요소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이나 줄거리, 주제나 소재, 소설에 등장하는 장면들, 대화들, 실감 나는 묘사나 소설가가 포착한 당대의 특징 등이 소설 속에 뒤섞여 있을 겁니다.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질료라고 할 만한 이런 요소들 외에, 소설을 이루고 있는 속성 가운데에는 재미나 흥미, 호기심이나 지적 자극, 이해와 감동과 같은 요소들 또한 함께 자리하고 있을 테고요. 우리는 이 중에 어떤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거나 핵심적이라고 특정할 수 있을까요? 주인공이나 딱히 줄거리라고 할 만한 이야기가 없는 소설, 특징적인 대화나 묘사가 등장하지 않는 소설을 떠올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혹은 흥미로운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다거나 특별히 감동적인 장면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면 좋은 소설이 아닐까요?


쿤데라에 따르면 소설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정신은 복잡성의 정신입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복잡성이 등장인물이 많다거나 줄거리가 복잡하다거나 그런 특징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실제 세계의 다양하고 복잡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는다는 소설의 특징을 가리키는 표현이지요.


인간은 피아와 선악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세계를 원합니다. 이해하기에 앞서 판단하고, 판단보다도 앞서 행동하려는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래서 소설의 언어를 견디지 못하지요. 마치 세계의 복잡성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세계를 자신의 경험 안으로 욱여넣고 재단하는 방식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소설의 언어란 대체로 상대적이고 애매하고 괴팍한, 그래서 판단과 행동에는 영 쓸모가 없는 말들입니다. 재미나 감동을 주는 것으로 소설을 정의할 수 있을까요? 재미와 감동을 꼭 소설만의 고유한 힘으로 한정 짓는 일이 가능할까요? 당장에 소설 바로 옆에 있는 시나 극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재미와 감동이라면 뭐 축구 경기나 달리기 시합에서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어쩌면 소설에서 재미와 감동을 찾고 발견하는 사람보다 이쪽이 더 많을 것도 같은데요.)


소설은 독자에게 사태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끝없이 증언합니다. 이것만이 소설의 영원한 진실이자, 소설이 말하는 유일한 진실이지요. 온전한 사실이라는 게 본래 그렇지 않던가요? 사람들은 자기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세계를 원하지만, 세계가 언제 사람들 바람처럼 그렇게 단순했던 적이 과연 있었던가요. 자, 이렇게 본다면 단순성이라는 환상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견디지 못하는 무력한 사람들의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무력함조차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만큼 나약한 사람들이 세계를 앙상하게 축소시키고 있는 꼴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 진리로 세계를 지탱하는 것 만큼이나 객관적 진리가 사라진 (혹은 어쩌면 원래부터 없었던 것일까요?) 세계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세계를 떠받치는 아틀라스의 과업에 견줄 만한 일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고 오늘 이야기를 마치지요. 쿤데라에 따르면 소설의 정신에는 복잡성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연속성 또한 소설의 정신의 중요한 측면을 이루고 있지요. 모든 소설은 그에 앞선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며, 자신에 앞선 모든 체험들을 자신 안에 담고 있다고 쿤데라는 말합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우리의 정신은 현재의 시간, 자신의 시간에 고정되어 있지요. 이 현재의 시간은 너무도 방대하고 강력해서, 인간의 사고에서 과거를 멀찌감치 밀어내고 인간을 현재에 붙들어 맵니다. 유럽 학문의 위기를 통렬히 지적했던 후설처럼, 쿤데라 또한 이 ‘현재’가 모든 것을 집어삼킨 오늘날, 현재에 갇히지 않는 연속성의 정신으로서 소설이 가질 수 있는 자리를 조심스레 의심합니다.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는 사람들의 수다만 남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고서요. 쿤데라는 소설이 소설로서 진보하고자 한다면, 세계의 진보에 역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언급합니다. 시대에 역행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 그리고 시대의 흐름이야 그 자신의 본성과 정의에 의해 언제나 순행일 수밖에 없으므로, 소설의 시대는 이미 이렇게 끝난 것일까요? 쿤데라 자신 또한 이 문제에 대한 확답을 유보하며, 한편으로 우스꽝스럽지만 한편으로 더없이 진지한 대답이라는 의견을 덧붙여 자신은 오로지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 그러니까 소설과 소설적인 것의 발견을 소중히 여길 뿐이라는 생각을 밝히는군요. 단순성의 함정에 다시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 역시 이 문제를 두고 당장에 그렇다, 아니다, 하고 답을 내리기보다는 답이 아닌 질문을 품고 돌아가는 것 역시 나쁘지 않겠습니다. 마치 소설 읽기가 그런 것처럼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20. 5. 14. / 교보북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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