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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민, <취향의 정치학>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가운데 루드비히 포이어바흐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생소한 이름입니다만 기독교와 종교 연구, 그리고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 나름대로 유명한 사람이지요.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 가운데 나중에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들(Thesen über Feuerbach)’이라는 이름이 붙은 원고가 있을 정도로, 당시 철학계에는 제법 많은 영향을 미친 학자이기도 합니다. 국내에도 일부 저작이 번역되어 있기도 하고요. 혹시 ‘인간은 그가 먹는 무엇이다'와 같은, 이런 비슷한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까요? 이 말을 남긴 사람이 바로 포이어바흐입니다. 대체로 원작자의 의도와 다른 엉뚱한 맥락에서 언급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요.


포이어바흐가 지적과는 역시나 조금 다른 맥락입니다만, 어느샌가 먹는 일은 현대인의 거의 가장 중요한 행사로 자리매김한 것 같습니다. 음식이 식탁이 아닌 TV나 SNS를 오르내리는 것 역시 그리 새삼스럽지 않은 일이 되었고요. 새삼스럽기는커녕 오히려 거의 당연한 일이 된 것 같은데요. 경쟁적으로 자신이 먹는 음식이나 먹는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또 그것들을 찾아보는 일도 퍽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자리잡은 것 같더군요. 한편으로는 먹는 행위 자체가 어느 누구 한 사람 피할 수 없이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삶의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또한 일상을 이루고 있는 사소하지만 매우 중요한 활동이기도 하기 때문이겠지요. 다른 한편 시몬 베유 같은 철학자들은 적게 먹고 많이 생각하라고 담담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이 말을 받아온 다른 철학자는 현대인이 너무 많이 먹고, 적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과 비판을 제기하기도 하지요. 이들의 비판이 단순한 공염불만은 아닐 겁니다. 이들 또한 매일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사람인 이상 먹는 일의 중요성을 잊기야 했겠습니까. 요즘 세상 분위기에는 적게 먹고 많이 생각하라는 경구는 적게 먹어야 하니까 무엇을 먹을지 신중하게 많이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로 여기거나, 막상 먹을 수 있는 것은 조금밖에 없으니까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는 의미 정도로 생각하는 편이 차라리 더 잘 어울릴 것 같군요.


음식이나 먹는 행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만 벤야민 같은 친구가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퍽 의미심장합니다. (20세기 초반 독일에서 활동했고 나치를 피해 망명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바로 그 벤야민입니다.) 유년 시절을 보낸 베를린을 회상하며 그는, 엄청나게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매일매일 자신의 사무실과 집을 오가면서, 일터와 가족이라는 사회적 조직 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대도시 시민들에게 있어 기분 전환은 대단히 중요하고 원초적이고 필수불가결한 활동이라고 지적합니다. 일상이 아닌 다른 세계에 빠져보는, 혹은 그런 느낌을 내는 활동이 바로 이 기분 전환의 핵심인데, 사실 일상에서 진짜 벗어나서 ‘다른 세계에 빠진다’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한 활동이 뭐 얼마나 되겠으며, 또 막상 그런 선택을 일상에서 쉽게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벤야민은 지금과는 다른 과거 특정한 시대의 분위기를 연출한 카페나, 이국적인 식당들이 유행하는 까닭을 바로 여기에서 찾습니다. 일상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대도시 시민들의 필수 활동으로서 기분 전환! 일상을 바꿀 수는 없으니 일상을 벗어난 경험을 끝없이 찾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그렇기 때문에 더 새롭고 더 낯선 것일수록 더 환영받는 도시 생활의 특징이 새로운 카페와 식당과 술집의 등장을 부추기는 것이지요.


자, 이렇게 본다면 이제 새로 생긴 식당을 찾거나 맛집 앞에서 줄을 서는 것도 순전히 개인의 선택이라거나 단순히 유행 따라 돌고도는 우연한 사건들이라고만 보기는 어렵겠지요. 벤야민이 방금 지적한 것처럼 이국적인 식당이 꾸준히 생겨나고 문전성시를 이루는 사정의 배후에 단조롭고 공고한 도시의 생활 양식이 자리하고 있다면, 그 식당을 찾아가는 개인들의 선택 또한 이러한 토대나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까요.


사실 개인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지극히 많습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과연 ‘개인의 선택’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요. 어떤 선택을 특정한 개인, 특히 그 선택을 결정한 개인에게 전적으로 귀속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대단히 까다로운 작업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외부 요소를 배제한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개념이 성립해야 하지만, 외부 요소에 대한 배제라는 개념도, 또 자유라는 개념도 어느 하나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녹록한 상대가 아니지요. 판단의 주체와 판단의 대상이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선명하게 나뉘는가 하는 문제를 포함해 허다한 논의들이 있겠지만 이 자리에서는 더 깊게 다루지 않겠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경험 과학 또한 개인의 선택이 그리 개인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경험적으로도요. 예컨대 슈퍼마켓에서 풍선껌이나 사탕 따위가 놓인 매대의 위치에 따라서 판매량이 크게 달라진다는 류의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계시겠지요. 사람들이 과자 더미들 사이에, 혹은 그 옆에 있었을 때라면 사지 않았을 풍선껌을 계산대 바로 옆에서 발견했을 때, 필요한 물건을 전부 바구니에 담은 다음 계산대 앞에서 결제를 기다리고 있다거나, 결제를 마친 다음 마침 주머니에 동전이 생겼다거나 하는 상황에서 훨씬 더 쉽게 구매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그리 새로울 것도 없이 당연하게 여겨지는데요. 어떻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풍선껌을 집어 드는 것도 개인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풍선껌의 판매 위치를 유기농 야채 코너나 건강 식품 옆으로 고정한다면 풍선껌의 판매량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야채 코너 옆에 있었다면 사지 않았을 풍선껌이 계산대 옆에 놓인 것을 보고 무심코 다른 물건들과 함께 구매했다면 내가 풍선껌을 사기로 선택했다, 내가 그것을 결정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오히려 선택과 결정의 주인은 내가 아닌 매대나 매장 관리자라고 하는 편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어쨌거나 이 문제를 오늘 여기에서는 길게 다루지 않기로 했으니, 인간사를 다루는 경험 과학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경제학이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정도만 간단히 언급해두지요. 간단합니다. 경제학은 선택 자체를 의문시 하지 않으니까요. 왜냐, 그것이 누구의 선택이든 간에 일단 인간은 선택을 하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이 뭔가 선택을 하는 상황이 있다, 즉 선택이 경험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 자체는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선택을 문제 삼지 않고 ‘어떤 선택'인지에 대한 물음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지요.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명쾌한 해법입니다.


경제학이 말하는 ‘어떤’ 선택은 무엇보다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그리고 합리적인 선택은 곧 유인에 반응하는 선택을 의미하고요. 경험 과학으로서 경제학은 선택의 철학적 의미나 가능성, 타당성 따위를 따지기보다는 경험 과학으로서 말 그대로 선택의 경험적 의미를 탐구합니다. 먼저 선택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서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선택들의 공통 속성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을 취하면서 경제학은 인간의 선택을 합리적인 선택으로 규정합니다. 경제학이 규정하는 선택의 합리성은 무엇보다 유인에 반응하는 것이고요. 다시 말해 인간의 선택이 무작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 자극이나 조건의 유불리를 판단하고 이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이지요.


조건이 달라지면 선택이 달라지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예컨대 건강 식품을 장바구니에 담을 때 풍선껌을 사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도, 거스름돈을 받아 생긴 잔돈으로 그에 맞는 가격의 막대사탕을 구매하는 것도 모두 다 그러한 결정을 내린 사람의 선택이라고 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가게 주인의 교묘한 매대 배치와 여기에 유인 당해 풍선껌을 사는 당신의 선택을 둘러싸고 행위자의 자율성이라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지요. 외부에서 주어지는 환경의 차이가 애당초 선택의 조건으로서 선택에 반영되는 것으로 설정한다면요.


자, 선택이라는 주제를 둘러싼 이러한 논의들은 꼭 음식이 아니더라도 어느 분야에서나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60년대풍 재즈 음악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의 취향은 그 사람의 고유한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가 빈티지나 레트로 따위의 유행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런 음악이 멋지게 어우러졌던 드라마 속 아름다운 장면의 효과일 수도 있고요. 또 어쩌면 그는 그가 동경하는 다른 사람의 취향을 흉내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재즈 음악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실상 음악 자체가 아닌 동경하는 선배의 인생관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선택의 문제를 이런 차원까지 확장하면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해집니다. 앞서 간단히 살펴본 것처럼 선택의 원인과 귀속 주체를 문제 삼을 수도 있겠지만 선택의 대상 쪽에도 만만치 않은 문제들이 놓여 있으니까요.


한편으로 소위 취향이라고 불리는, 어떤 사람이 가진 기호의 체계나 그가 가진 선호나 기준을 드러내는 특징들은 두말할 것 없이 자명한 개인의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둘러싼 환경이나 조건의 반영물이거나 심지어는 특정한 의도를 지닌 어떤 자극의 산물일 수도 있으니까요.


몽테뉴가 회고하는 그의 어린 시절 일화에는 한 사람의 취향을 둘러싼 개인의 선택과 외부 환경 사이의 문제가 잘 드러납니다. 몽테뉴의 아버지는 몽테뉴가 젖을 떼자마자 그 시절 귀족 집안의 일반적인 양육 방식을 따라 유모를 집으로 들여 아이를 돌보게 하지 않고, 몽테뉴 성에서 멀리 떨어진 가난한 벌목꾼들의 촌락으로 보내 그곳에서 몇 년 간 자라게 했습니다. 젖 뗀 직후라면 그야말로 아직 갓난아기와 다를 바 없는 때였을 텐데요. 몽테뉴의 회고에 따르면 어린 시절 벌목꾼들의 검소하고 소박한 음식에 길들여진 그는 사탕, 잼, 쿠키가 아닌 딱딱하고 검은 빵, 베이컨, 마늘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과연 통상적인 방식으로, 즉 자신이 태어난 가문에 따라 귀족적인 방식으로 유년기를 보냈다면 과연 그는 같은 입맛을 가진 사람으로, 기존과 동일한 기호를 지닌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 이렇게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요인에 그 자신이 지닌 과거의 경험이나 기억까지 포함시킨다면 선택의 원인에 대한 논의는 훨씬 더 복잡한 성격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선택이라는 개인의 행동과 그것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규범적인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오늘 살펴볼 부르디외가 소위 취향이라고 불리는 선택과 기준의 체계를 중심으로 자신의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나갈 무렵, 그의 주변 세계에는 크게 두 가지 접근 방법이 놓여 있었습니다. 다소 거친 구분이긴 합니다만 일단 실존적, 개인적 접근 방식과 구조적 접근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겠지요. 전자의 관점은 개인의 행동은 수많은 외부 조건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개인의 결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만큼, 개인의 행동에 대한 탐구 역시 어디까지나 그 개인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봅니다. 반면 일단 구조주의라고 묶을 수 있을 법한 다양한 시각들을 포함하는 후자의 관점에 따르면, 개인의 행동은 그에 앞서 선행하는 유무형의 구조, 이를테면 언어의 규칙과 문법, 역사와 관습, 사회적 권력 관계들, 심지어는 자연 환경이나 도시의 물리적 구조 따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면 개인은 그저 구조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까지 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부르디외의 생각은 어떤지 살펴봅시다. 부르디외는 우선 개인의 선택이 그가 가진 주관적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다만 이러한 선택에는 그에 앞서 누적된 사회적 관행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또한 강조하지요. 부르디외에 따르면 사회적 관행은 중립적이거나 보편적인 구조가 아닌 계급적 편향과 권력의 논리에 따라 발생하는 불평등을 반영합니다. 딱딱하고 검은 빵을 베이컨과 함께 먹는 벌목꾼의 선택을 과연 어디까지 그의 취향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애당초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 자체가 기존의 불평등을 반영하고 있다면, 그래서 한 사람에게 제공되는 선택지와 다른 사람에게 제공되는 선택지가 애당초 달랐다면, 나아가 어떤 것을 ‘좋은 것’으로 느끼고 어떤 것을 ‘나쁜 것’으로 느낄 것인지에 대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외부의 영향이 작용하고 있었다면 어떨까요?


이 문제를 조금 더 살펴보기 위해 적당한 예시를 떠올려볼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여기 책상 위에 있는 연필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책상 위에 연필이 한 자루 있다고 했을 때, ‘이것은 연필이다', 혹은 ‘이 연필은 초록색이다'라고 판단하는 것과 ‘나는 이 연필을 좋아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동일한 종류의 판단일까요? 전자의 판단은 눈앞의 정보를 종합해서 대상의 객관적 사실을 판별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후자의 판단은 무엇을 판별하고 있을까요? 언뜻 생각하면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 사이의 차이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사실 관계와 가치의 평가 사이의 문제는 아닙니다. 어떤 대상을 좋다고 판단하는 것은 실이 곧장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과 이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나는 이 연필이 좋다, 혹은 마음에 든다고 판단하는 사태를 다루기 위해 칸트는 취미 판단(geschmacksurteil)이라는 기준을 도입합니다. 여기에서 칸트가 말하는 취미는 우리말에서 취미 활동을 가리킬 때의 그 낱말과는 다른 의미로, 미적 감각이나 취향을 가리키는 독일어에 대응하는 개념이지요. 취미 판단 대신에 미감적 판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미적 판단 정도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일단은 큰 무리가 없겠습니다. 영어로는 ‘judgement of taste’라고 하는데, 미감과 취향 사이의 연결고리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다시 예시로 돌아간다면, 그러니까 ‘여기에 연필이 있다’는 판단이 특정한 상황에서의 구체적인 사실을 드러낸다면, ‘나는 이 연필이 좋다'라는 판단은 그가 가진 특정한 마음의 상태를, 또 그러한 상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미적 기준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좋음’의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어떤 것을 좋다고 느끼고 그것을 좋다고 판단하는 마음의 상태가 당장에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기 때문인데요. 이를테면 전화 통화를 하다가 급하게 뭔가 옮겨 적을 일이 생겼는데 마침 연필이 눈앞에 있어서 좋다고 느끼는 판단과, 연필 수집가가 마침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연필을 발견하고 좋다고 느끼는 판단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앞서 어떤 대상을 좋다고 느끼는, 특히 미감적으로 좋다고 느끼는 판단의 문제를 다루는 칸트를 언급했었지요. 어떤 대상이 왜 좋은가, 왜 그것을 좋다고 느끼는가에 대한 칸트의 생각은 명확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어떤 대상이 순수하게 미감적으로 좋은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해관계로부터 분리해야 한다고 하는군요. 고통스러울 만큼 타는 듯한 갈증 속에 있는 사람에게 물이든 사과주스든 겐넨다면 뭐든 시원하게 들이키지 않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사과주스를 마시고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그가 사과주스를 좋아한다고, 사과주스가 그의 취향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뭐 꼭 이런 절박한 상황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고학자가 유물을 좋아하는 일이나, 제작공이 손에 잘맞는 공구를 좋아하는 일을 두고 단순히 그것이 그의 취향에 잘 맞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다소 고전적인 예시를 들어봅시다. 사실적으로 매우 생동감 있게, 탁월하게 잘 그려진 사자의 그림이 하나 있다고 해볼까요. 뛰어난 이 그림을 보고 감탄하고, 좋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동물원 사육사입니다. 그가 그림을 보고 감탄하는 까닭은 자신이 매일 마주치는 진짜 사자의 모습을 그림이 매우 생생하게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살펴봅시다. 사육사의 옆에서 그림을 보고 역시 함께 감탄하고 있는 어떤 사람은 지난해 케냐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암보셀리 초원을 트레킹으로 지나며 먼 발치에서나 야생의 사자를 직접 목격했을 때의 전율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더 구체적인 상황을 설정할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로 해두지요.) 그가 그림을 보고 감탄하는 까닭은 너무도 빼어난 솜씨로 묘사된 사자를 보니 그때의 감동과 전율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사정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이 그림을 아주 좋아합니다. 흡족하게 마음에 들어하면서요. 조금 더 우리의 논의에 맞춰서 이들의 대답을 가공해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그림을 본 이들에게 그림이 마음에 드는지 묻자, 이들이 입을 모아 자신의 취향에 꼭 맞는다고 대답했다고요.


그런데 칸트의 생각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 이 두 사람은 사자의 그림을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한 사람은 직업과 관련된 관심이나 호기심에 기인하는 즐거움을 경험했을 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인생의 특별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외부의 자극을 인상적으로 받아들였을 뿐이지요. 요컨대 두 사람 모두 그들 각자가 가진 특수한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어떤 대상에 대한 선호를 판단하고 표현했을 뿐입니다. 칸트는 미적 판단은 이런 개별적인 특수성과는 전적으로 무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어린 시절 동물원에서 사자를 보고 크게 공포에 질렸던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림을 보고 질색했을 수도 있겠지요. 칸트에 따르면 미적 판단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통 감각에 의거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는 보편적 판단입니다. 칸트는 오직 여기에 부합하는 판단만이 순수하게 미적인 판단이라고 규정합니다. 때문에 특수한 개인이 가진 이해나 관심과는 무관한, 무관심성(Interesselosigkeit, disinterestedness)에서 연유하는 판단만이 미적 판단으로서 적합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당연히 칸트의 이런 생각에는 의문의 여지가 따라붙습다. 이런 판단이 현실적으로 진짜 가능한지부터 시작해 칸트의 이런 생각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해서도요. 칸트의 논의나 이에 대한 이 자리에서 비판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겠지요. 부르디외 역시 칸트의 이런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개인이 가진 미적 판단의 기준은 보편적이거나 공통적이기는커녕 매우 특수하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데, 특히 이러한 미적 판단의 기준, 곧 취향이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중략) …



부르디외에 따르면 미적 성향과 미적 능력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당연합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좋아한다고 할 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식별할 수 있고, 그것의 가치를 판별할 수 있어야 할 테니까요. 그런데 어떤 대상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은 이전까지의 경험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테면 베토벤을 취향으로 갖기 위해서는 당장에 먼저 베토벤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취향으로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지요. 와인을 좋아할 수 있으려면 먼저 와인을 먹어봐야 하고, 어떤 와인이 좋은 와인인지 구별하고, 또 자신의 취향에 꼭 맞는 와인을 알아내고 그것을 취향이라고 특정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와인을 많이 경험해봐야 합니다. 요컨대 미적 능력이 미적 성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미적 능력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일까요? 혹은 칸트의 생각처럼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을까요? 부르디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미적 능력은 인간이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선험적인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학습을 통해 형성되는 것입니다. 즉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미적 능력의 형성은 과거와 현재의 물질적 조건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단적으로 예를 들면 동네에서 딱지와 구슬을 치며 놀던 아이가 자신의 환경에서 키울 수 있는 미적 능력과, 펜싱이나 승마 따위를 배우며 자라는 아이가 자신의 환경에서 키울 수 있는 미적 능력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에 학습할 수 있는 미적 경험도 다를 수밖에 없고요. 혹은 고급 사진기를 여러 개나 가지고 전문적인 강의를 수강하면서 수 년 째 유명 작가의 전시를 빠트리지 않고 다녀온 사람이 가진 사진에 대한 취향과, 이제 막 장만한 스마트폰으로 셀카만 열심히 찍는 사람이 가진 사진에 대한 취향이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자 이렇게 물질적 조건의 미적 능력의 차이를 만든다면,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적 성향이 결국은 미적 능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결국 한 개인이 가진 미적 성향 또한 그가 가진 물질적 조건에 크게 의존하고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쯤에서 다시 언급해야겠군요. <구별짓기>를 통해 구별 짓는, 구별 지어지는 현상 비판하는 부르디외가 은연 중에 다양한 사회적 활동의 위계를 당연시하며 우열을 구분 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나 반발이 떠오를 수 있으니까요. 예컨대 클래식 연주회에 가는 행위는 고상하고 아이돌 음악을 듣는 일은 저속한가, 혹은 승마는 구슬치기보다 더 우월한 스포츠인가 따위의 근본적이고 비판적인 성찰이 얼마든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당연하게도 여기에서 부르디외가 수행하는 작업은 취향의 위계를 설정하거나 우열을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사회 안에서 어떤 것을 우월한 것으로 여겨지게 만들고, 또 어떤 것을 열등한 것으로 구분하고 있는, 혹은 그렇게 통용되도록 만드는 사회 권력을 탐구하고 비판하는 것이지요.


사회학자로서 부르디외는 무엇보다 학문의 ‘성찰성’을 강조합니다. ‘성찰적 사회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지요. 부르디외에 따르면 사회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객관적 사물을 탐구의 대상으로 갖는 여타의 학문 연구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탐구의 과정에서 연구자 개인이 가진 관점이나 편향이 그가 생산하는 지식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객관적인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서 사회학자에게는, 자신의 위치와 관점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이 필수적이라고 부르디외는 지적합니다. 또한 이러한 과정이 적절히 이루어졌을 때 만들어진 사회학적 지식은,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위치나 자신이 속한 사회의 상황에 대한 성찰을 촉진시킴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에 이바지할수 있습니다. 즉 사회학은 현행하는 지배 체제를 탈신비화하고 각종 구조적 제약에 대한 행위자들의 인식을 확장시킴으로써 그 변혁 가능성을 제고한다는 것이지요.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리면 사회학의 진정한 의미는 “사람들의 자유, 행복과 자기완성에 대한 정당한 열망을 무수히 침해하는 진정한 사회경제적 결정 요인들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것을 통제하고 극복할 수 있는 지적인 힘을 제공하는 것에 있습니다. 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성찰성을 발휘하는 거대한 심급으로 작동하는 셈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부르디외가 한편으로는 불편할 정도로 취향의 위계를 나누는 것처럼, 다시 말해 좋은 취향고 나쁜 취향, 우월한 취향과 열등한 취향을 구분하는 것처럼 보이는 맥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사회가 그것을 바로 그런 방식으로 구분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 그의 탐구가 겨냥하는 문제의식이기 때문이지요.

미적 성향과 미적 능력이 경제적, 물질적 조건에 의존하는 이상, 당연하게도 사람들의 미적 취향은 소속 계급에 따라 나뉩니다. 흔히 사회학이나 서구의 학문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은 동아시아의 전통과는 매우 상이한 맥락에서 형성, 발달해온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적절하게 우리말로 옮겼을 경우에도 그 고유한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계급과 같은 개념 역시 마찬가지고요. 계급이라고 하면 즉각적으로 귀족과 천민, 혹은 양반과 노비 같은 신분에 따른 위계와 구분을 떠올리기 쉽습니다만, 사회학적 의미에서 계급이라는 개념을 다룰 때에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마르크스적인 고전적 의미에서 계급은 생산수단과 관련한 사회적 공간의 구분을 의미했습니다. 쉽게 말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으로 계급을 구분한 것지이요. 더 쉽게 단순화하면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구분 따위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나뉘는 계급을 가리킵니다. 시간이 지나며 계급의 의미는 처음 마르크스가 제시했던 것보다 한층 복잡한 차원으로 확장하는데, 단순히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나 부의 분배에 따른 구분만을 나타내는 의미가 아니라, 점차 사회적 존경의 획득 여부나 생활 양식과 같은 상징적 자원의 차원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변화한 것이지요.


부르디외가 사용하는 계급 개념 역시 기본적으로 같은 맥락에서 출발합니다만, 그는 계급을 나누는 중요한 기준으로 문화자본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문화자본은 단순히 화폐나 부가 아닌 지식, 제도화된 학위, 통용되는 자격, 특정 재화가 나타내는 문화적 상징물, 취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습관이나 태도 등을 모두 포함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단순히 생산 수단이나 금전적 자본을 가졌는지 가지지 못했는지, 혹은 얼마나 가졌는지에 따라 계급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자본에 따라 계급이 나뉜다고 보는 것이지요.


앞서 미적 성향은 미적 능력에 달려 있고, 미적 능력은 특정한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경험과 그러한 경향을 가능케 하는 물질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고 언급했었지요. 물질적 조건이 경험을 매개하는 계기가 바로 교육입니다. 문화자본은 기본적으로 교육을 통해 재생산됩니다. 즉 교육을 통해 규범적인 구분을 배우고, 특정한 대상에 대한 의식적인 표현 수단을 학습하는 방식 따위를 통해 취향의 우열이 좋은 취향을 가진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 나뉘고, 더 많은 문화자본을 소유한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 나뉘는 것이지요. 이렇게 교육은 취향에 질서를 부여합니다.


자 이쯤이면 이제 취향은 한 사회 안에서 일종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이데올로기는 다분히 마르크스주의적인 맥락에서, 사회적 사실을 특정한 방식으로 왜곡하고 은폐하는 장치를 의미합니다. 예컨대 소위 지배 계급이 가진 취향이 더 고급스럽거나 우월한 것으로 통용되는 까닭은 지배 계급이 장악하고 있는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권력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취향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취향의 차이는 개인의 차이로 여겨지지요. 부르디외에 따르면 이처럼 취향은 사회적 구조와 개인적 실천 사이에 놓인 불평등을 은폐하는 가장 핵심적인 매개체입니다.


부르디외가 보여주듯 취향은 이렇게 단순히 개인의 기호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질서의 산물이자 그것을 지탱하는 계기이기도 한데요, 그렇다면 취향이 문화자본을 상징하고 문화자본을 중심으로 사회 질서가 작동하는 사회 질서를 문화자본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겁니다. 시간 관계 상 매우 단편적으로밖에 다룰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오늘 다룬 내용들은 그야말로 차마 빙산의 일각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만큼 지극히 단편적인 토막 내용에 불과하므로, 언제라도 기회가 닿으면 조금 더 꼼꼼하게 오늘 언급했던 문제들을 하나씩 살펴보신다면 좋겠습니다) 부르디외가 문화자본, 혹은 그것을 중심으로 한 사회 질서를 비판하는 까닭은 단순히 문화자본이 불평등을 드러낸다거나, 혹은 불평등이 드러나지 않도록 은폐한다거나 하는 차원에 있지 않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문화자본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부의 소유나 생산 수단에의 접근 가능성처럼 결과적인 불평등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애당초 문화자본 자체가 차별과 배제를 본질적인 성격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문화자본은 제한된 사회집단에 배타적으로 축적되는 성질을 갖습니다. 문화자본을 습득해야겠다, 습득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것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구분을 강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문화자본을 습득하려는 욕망을 갖는다는 사태 자체가 이미 문화자본을 신체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확연한 사회적 차이가 벌어져 있는 사태의 효과라는 뜻입니다.


이미 뒤쳐져 있다, 이미 차이가 벌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만이 문화자본을 욕망합니다. 가진 것이 아니라 갖지 못한 것을 향해 움직이는 욕망의 본성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이런 욕망에서 출발해 문화자본에 접근하는 사람일수록, 노력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문화자본이 손에 닿지 않는다는 느낌을 통감하게 됩니다. 문화자본의 획득을 목표로 한 동기 자체의 불순함이 그들의 노력을 끝없이 따라다니기 때문이지요. 부르디외가 냉소적으로 지적하는 문화자본의 역설이 여기에 있습니다. 문화자본을 습득하려는 발상 자체가, 즉 문화자본을 손에 넣어서 이를 바탕으로 더 많은 자원의 획득과 계급 상승을 노린다는 동기 자체가, 그 동기를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접하는 모든 대상을 비문화적인 것으로 변질시키기고 마는 것입니다. 문화자본의 편재로 인해 계층화된 사회에서는, 문화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몸짓 자체가 곧 문화자본의 결여를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일이 되고 맙니다. 노력하면 진다, 노력할수록 크게 진다는 것이 바로 이 게임의 규칙인 셈이지요.


그래서 문화자본주의는 상승 지향이 있지만 그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사람을 조직적으로 양산합니다. 문화자본을 획득하여 사회적 신분 상승을 이루기를 열망하는 사람이 제아무리 금욕적인 노력으로 교양이나 예의범절을 익혀봤자, 노력해서 익혔다는 점에서 그가 획득한 문화자본에는 처음부터 이류라는 꼬리표가 붙고 맙니다. 사실 이건 부조리하리만치 굴욕적인 경험인데요. 전후 일본의 소설가 가운데 사카구치 안고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 국내에는 조금 생소한 이름입니다만 흥미로운 작품을 많이 남긴 작가이기도 하고요. 그가 했던 이야기 가운데 이 대목에서 주목할 만한 발언이 있습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억지로 머리를 숙였던 경험은, 훗날 언젠가 반드시 다른 사람의 머리 위에 발을 올리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굴욕은 굴욕으로밖에 씻어지지 않으니까요. 헌데 과연 이런 방식으로 성취감이나 승리감을 맛보았다고 해서 굴욕이 사라질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굴욕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굴욕감을 떨치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자신에게 굴욕을 느끼게 한 그 위치에까지 올라가고자 분투합니다. 그리고는 마치 과거의 감정을 만회라고 하겠다는듯이 동일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굴욕감을 선사하며, 굴욕을 재생산하지요. 그런데 자신이 누군가를 짓밟는다는 사실, 누군가의 위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거꾸로 뒤집으면 누군가가 짓밟히고 있다는 사실, 누군가의 아래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되고 맙니다. 자신이 느꼈던 바로 그 굴욕의 구조가 동일한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굴욕을 안기는 일은 반드시 그 자신의 굴욕을 재생산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위로 올라가도, 아무리 많은 사람을 짓밟아도 결코 해소되지 않는 굴욕감입니다. 오히려 올라갈수록, 짓밟은수록 선명해지는 굴욕감이지요.


문화자본의 논리에 있어 이런 식의 굴욕을 경험한 사람은 문화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사람, 혹은 노력했지만 자기네만큼은 획득하지 못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깔봄으로써 그 굴욕을 해소하려 듭니다. 이를테면 타고난 귀족에게는 서민을 깔볼 이유가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벼락 귀족은 자기보다 아래쪽에 있는 사람을 찾는 일에 열중하지요. 그것만이 자신의 욕망과 노력을 입증하는 방법이니까요. 하지만 그들이 노력을 통해 달성하거나 획득한 문화자본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이야말로 실은 그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플로베르가 생생하게 그려내었듯 근대 프티 부르주아들의 실상이 추악한 까닭은 그들에게 충분한 자산이나 교양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과도하게 의식한 나머지 이를 부끄러워하고 은폐하려 들며, 동시에 자기보다 더 추악한 대상을 찾아내어 자신의 우위를 뽐내며 상대방을 비웃는 일에 열중하는 모습 속에 있지요.


자, 어느새 일어나야 할 시간이 되었군요. 플로베르의 시선이 향했던 곳은 19세기 파리의 속살입니다. 부르디외의 계급 연구는 1970년대 프랑스 사회를 분석하고 있지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이들의 시선은 얼마간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텐데요. 하지만 이들의 낯선 시선을 좇아 가는 일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 지성이 있기 때문에, 고려해야 할 변수가 늘어나면 그에 맞춰서 사고 방식 또한 복잡하게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복잡한 대상에 맞춰서 자신의 사고 방식를 다원화시키는 방향으로, 예컨대 다양한 변수를 풀어낼 수 있는 다차원 방정식으로 사고 방식을 진화시키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변수의 종류가 지성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면, 이제부터는 이해에 조금씩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수중에 있는 방정식만으로는 자신을 둘러싼 변수의 세계를 해석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의 방정식을 복잡화하려는 노력을 멈추고, 지적 부하를 덜어내기 위한 방향으로 사고 방식을 다시 조정합니다. 쉽게 말해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쉽게 생각해버리는 것이지요.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고, 알고 있는 대로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편이 맞다고 믿어버리고, 그 믿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경험을 해석합니다.


이 과정을 쉬운 말로 표현한다면 일종의 노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연의 시간과 사고의 시간은 언제나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어서, 나이를 먹어도 사고의 노화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얼마 먹지 않은 나이에도 벌써부터 노화가 잔뜩 진행된 사고를 지닌 사람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화라는 개념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퍽 흥미로운 접근입니다. 노화의 반대편에 있는 개념으로 성장을 떠올릴 수 있을 텐데요. 성장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과, 그럴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는 것, 그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노화의 의미 또한 선명해지지요.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자 그럴 수 있는 역량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바로 트라우마입니다. 트라우마라고 해서 꼭 극단적인 사고나 극심한 폭력을 떠올릴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동일한 경험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는 것, 아무리 새로운 일을 경험해도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트라우마니까요.


이렇게 자기 경험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상력이란 여름 휴가지를 미리 머릿속에 떠올리며 즐거워하는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을 머릿속에 그리는 힘이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이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편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이 지금 보는 것이 누군가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또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상상 가능하도록 제도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닌지 의심을 품고, 그 한계의 바깥을 향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쳐 나가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겁니다. 다시 말해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분방한 공상을 즐기는 일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이 분방한 공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빈약함과 한계를 염려하는 일이 될 겁니다. 부르디외가 성찰이라고 일컫은 바 있는 활동과도 아주 가깝겠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20. 4. 16. / 교보북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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