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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 때의 서얼 이대순은 경학에 정통했고 예문도 많이 알아, 서얼임에도 어린이를 가르치는 동몽훈도 벼슬을 했다. 제자 중에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 선 사람이 적지 않았다. 왜란 후 그가 살던 금천 고을이 유락해 먹고 살 길이 없어지자, 이를 딱하게 여긴 한 대신이 서울로 그를 불러 다시 훈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이대순은 상경해서 남대문 안쪽 길가에 서당을 열었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많은 아이들이 그의 서당을 찾았다. 그의 학습법은 엄격했다. 전날 읽은 것을 외우지 못하면 종아리를 때렸고 도착한 순서대로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나이 순서대로 앉혔다. 그러자 학생들이 대들었다. 서얼보다 아래 앉혔다고 성을 냈고 선생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순서를 놓고 툭하면 다퉜다. 이대순이 이를 보다 못해 나무라면 반드시 면전에서 스승을 욕보였다.

이대순은 대신의 집에 찾아 작별을 고했다. 대신이 연유를 묻자 그가 답했다. “제 나이 예순이 넘었지만 지금과 같은 꼴은 처음 봅니다. 젖비린내 나는 아이들이 당색을 나누고, 글자도 모르는 녀석들이 시정을 평가합니다. 서당에서 책을 읽다가도 거리에서 행차 소리라도 들리면 앞다퉈 뛰어나가 재상 아무개로군, 아무 쪽 편의 사람이야, 사람이 크게 간악하지, 하고, 또 아무개 어르신이야, 아무 쪽 편의 사람인데 아주 어지신 분이지, 하고 말을 주고받습니다.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비단옷을 입고 자신이 속한 당색이 아니면 고관대작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마구 업신여기고 저희들끼리 욕을 보입니다. 이런데도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곧 망할 것입니다. 하찮은 녹 때문에 서울에 머물다가는 틀림없이 화를 입을 것입니다. 그래서 떠납니다.” 1622년 겨울의 일이었다. 이듬해 인조반정이 일어나 세상이 뒤집어졌고 사람들이 이대순의 선경지명에 크게 놀랐다.


- 이덕형, <죽창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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