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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뒤쪽 어딘가에


등장 인물을 빼놓고 소설이라는 장르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소설에 따라 등장하는 인물의 비중이나 중요성, 또 등장 인물을 제시하는 방식이나 소설 안팎에서 등장 인물이 수행하는 기능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인물은 누가 보더라도 소설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소설이 발견한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소설가는 등장 인물과 사건을 통해 주제를 드러냅니다. 자신의 생각을 그저 단순하게 나열하거나 설명하는 글은 누가 보더라도 별로 소설처럼 보이지 않겠지요. 소설은 인물들의 행위를 멀리서 관찰함으로써 어떤 주제를 드러낼 수도 있고, 혹은 행위 안쪽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말과 생각을 통해 주제를 직접 다룰 수도 있습니다. 소설이 단순히 역사나 사회 현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보고하는 것이 아닌 다른 주제를 가질 수 있다면, 이러한 까닭에 그것은 언제나 인물에 관한 것, 그러니까 사람에 대한 것이 되기 마련이지요.

소설의 기술에 대해 쿤데라와 대담을 진행한 크리스티안 살몽은 바로 이런 점에서 모든 소설은 심리 소설이 되는 것, 즉 인간 심리 상태의 수수께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소설이 역사나 사회적 배경을 전면에 내세우든 혹은 인간의 일상과 내면을 전면에 내세우든 간에, 소설적 사건은 얼마간 그 사건에 얽힌 인간의 심리를 다루게 될 테니까요. 소설이 가진 이런 특징을 고려한다면 어떤 소설이 인물의 심리를 다른 소설에 비해 더 직접적 다루고 있다고 해서 그 소설만을 ‘심리 소설’이라고 특칭하는 것은 어색하거나 불필요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인물을, 그리고 인물의 심리를 다루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소설은 이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니까요.

쿤데라에 따르면 모든 시대의 소설은 자아라는 수수께끼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아직 ‘소설'이라는 장르가 채 만개하기도 전에, 유럽 최초의 이야기꾼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은 심리적 접근법이라고는 이름도 방법도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인물의 심리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데카메론>에서 보카치오는 오직 인물들의 행동과 모험만을 보여주지만, 행동과 모험으로 이루어진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었지요. 행동이 가진 이러한 특징은 ‘모든 행동의 의도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단테의 표현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정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태초에 행동은 마치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초상화처럼 그의 모습을 드러냈지만, 초상화의 모습과 주인의 모습이 달라지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지요. <운명론자 자크>에서 자크는 친구의 약혼자를 꼬여 내고 기뻐합니다. 아버지가 이를 꾸짖으며 매를 들자 자크는 홧김에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군대에 입대하지요. 첫 전투에서 무릎을 다친 자크는 죽을 때까지 다리를 절게 됩니다. 군대에 입대한 바람에 기껏 유혹한 친구의 약혼자와도 떨어지게 되었고, 홧김에 내린 충동적 선택은 그를 평생 불구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크는 이를 사랑의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행위가 있는 곳과 행위의 주인이 있는 위치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이지요. 바로 이 발견이야말로 소설의 기원입니다. 행위와 행위의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틈을 발견한 것, 행동의 역설적인 측면을 발견한 순간 소설은 ‘이야기’로부터 구분되어 나온 겁니다. 때문에 모든 탁월한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이 틈새의 문제를 다루기 마련이고요.

행위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소설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그것이 이야기와 소설을 구분하는 얇지만 선명한 경게선이니까요. 인간은 행위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가 하는 행위의 총합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톨스토이를 참조해볼까요. 한 여자와 남자가 각자의 삶을 살다 우연히 마주칩니다. 몇 번의 마주침을 통해 서로에게 호감을 품은 이들은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게 되기를 내심 소망하며, 고백을 위한 적당한 시기를 기다립니다. 어느 날 이들에게 숲속에서 밤을 주우러 갔다가 일행과 떨어져 단 둘이 남은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방해가 되거나 신경 쓰이는 다른 사람들도 없겠다, 둘만 걷는 조용한 숲길의 분위기는 고백에 꼭 알맞게도 느껴집니다. 마침내 오랫동안 기다리던 기회가 만들어졌지만, 그리고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들은 어쩐지 어색한 마음에 어느 한 쪽도 선뜻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그저 걸으면서 밤을 주울 뿐이지요. 온 마음과 관심은 이미 온통 상대방에게 쏠려 있는 상태인데도요. 오랜 침묵 끝에 여자가 먼저 말을 꺼냅니다. 느닷없이, 마음에도 없는 밤 이야기를 건네지요. 그런 다음 다시 침묵이 흐르고, 남자는 여자에게 건넬 말을 찾다가 결국 그 또한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마음에도 없는 밤 이야기를 꺼내고, 이들은 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속으로 점점 절망적인 무력감에 젖어듭니다. 고백은 점점 멀어지는군요. 집에 돌아온 남자는 자신이 방금 전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 까닭은 죽은 부인에 대한 추억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는 그것이 거짓 이유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톨스토이는 밤을 주우며 안나와 브론스키가 엉뚱한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부터 방에 돌아온 브론스키가 생각을 정리하는 장면까지를 매우 짧게 묘사하고 넘어갑니다. 매우 소설적인 이런 장면은 사실 <안나 카레니나> 전체를 통틀어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물들이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미끌어져 엉뚱한 행동을 하고는, 그런 다음 어물쩡 합리화하고 넘어가는 모습을요.

어떤 결정과 행위와 그것에 대한 사후적 의미 부여는 소설의 구성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하나의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이 어떻게 행위로 전환되는가, 행위들은 어떻게 연쇄하는가, 와 같은 일련의 질문과 이에 대한 응답이 소설을 구성합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이야기꾼들은 내적 논리,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롯의 논리적 필연성이라고 부른 원칙에 의해 이 질문을 구성합니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누가 보더라도 쉽게 납득할 수 있고 그럼직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러한 전통을 물려받은 초기의 소설가들은 삶이라는 기이하고 혼란스러운 재료에서 명징한 합리성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행위를 만드는 동기는 어쨌거나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하나의 행위가 다른 행위를 유발한다면 행위의 연쇄 또한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베르테르는 친구의 부인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친구를 배신할 수는 없지요. 그렇다고 자신의 사랑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사랑의 격정을 표현하고, 친구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자신의 사랑을 숨기거나 부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랑을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어떠한 선택도 불가능한 갈등 속에서 자책하다가 결국 자살하는 것이지요. 수학 공식처럼 명료하고 분명한 죽음입니다.

반면 안나는 왜 목숨을 끊었을까요? 그날 숲길에서 브론스키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브론스키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존중과 예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요. 또 그렇게 따지면 안나 또한 자식들과 세간의 소문들을 신경 쓰느라 브론스키와 그리 다르지 않은 처지였을 때가 많지 않았던가요? 베르테르의 죽음과 비교해 안나의 죽음 바로 앞 장면을 떠올려본다면 이런 의문은 더 선명해집니다. 베르테르의 죽음은 마치 방정식과 같습니다. 방정식의 풀이 과정은 좌변과 우변의 수를 옮기거나 더하고 빼는 일련의 연산 끝에 마지막으로 ‘x=0’과 같은 정답을 이끌어내지요. 한편으로 연산의 모든 과정은 논리적 규칙을 따라 진행됩니다. 마지막의 명료한 정답에 도달할 때까지요. 다른 한편 연산 과정과 별개로 정답은 이미 맨 처음 복잡한 방정식 속에서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연산을 그것을 분명하게 꺼내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베르테르의 사정 또한 방정식처럼 일련의 합당한 연산 과정과 그것에서 연유하는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삶이 그렇게 흘러가던가요? 삶이 진짜로 그렇게 흘러갈까요? 만약 진짜 삶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금 브론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오로지 시간이 지난 다음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조정하기 때문입니다. 안나의 사정은 베르테르와는 전혀 다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 두 죽음의 차이는 우선 괴테가 베르테르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과 톨스토이가 안나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 사이에 존재하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소설의 역사에서 초기 소설이 주제를 구성하고 드러내는 방식과 시간이 지나며 소설이 새롭게 발견한 자신의 영토에서 수행하는 탐구와 표현의 방식 사이에 존재합니다.) 안나가 기차역에 간 것은 자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브론스키를 마중 나온 것이었는데요. 그녀는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기차에 몸을 던집니다. 행위가 결정에 선행하는 것이지요. 합리성이라는 돋보기를 들고 행위와 선택 사이를 아무리 뒤적여도 아무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방정식과 같은 연산 과정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안나의 선택의 의미는 합리적 인과성 너머에서 성립하니까요. 톨스토이는 어떻게 비논리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이 행위에 개입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줌으로써, 소설이 수행하는 위대한 탐구의 선로에서 올라섭니다.

… (후략)

2019. 9. 27.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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