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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향연>


철학자라고 하면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가장 먼저 떠올릴까요? 어딘가에 틀어박혀 책이나 종이 뭉치를 뒤적이며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 아니면 사람들이 모인 강의실에서 어떤 이론이나 사상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모습? 또 아니면 반쯤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맹렬하게 자기 주장을 설파하고 있는 모습이나 속세를 등진 구도자의 모습일까요? 홀로 조용히 사색에 잠긴 모습이나 신중한 관찰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권력자의 지근거리에서 적당한 조언을 건네거나 고민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충고를 건네는 모습은 아무래도 어색한가요?

사람들이 철학자의 형상에서 거의 전범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런 모습들을 떠올리는 까닭은, 당연히 이런 모습들의 철학자들이 지난 시대에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고 있는 헤겔이나 하이데거의 모습을, 집필에 몰두하는 칸트와 아도르노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혹은 이들 자리에 학자 아무개나 교수 아무개를 넣어도 무방합니다.) 또 바그너의 추종자들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니체의 모습과 경건한 고독 속에 자신의 생각을 다듬는 노년의 루소나 파스칼의 모습도 떠올릴 수 있지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나 공원 벤치 구석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대화를 관찰하는 푸코나 벤야민의 모습도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꼭 마키아벨리가 아니더라도 당대의 권력자에게 자신의 저술을 헌정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권력자의 자선에 기대어 생활을 이어간 사람들도 많고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나름의 비법을 담고 있으며, 노후를 잘 보낼 수 있는 방법이나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 따위를 담고 있는 저술도 철학사에 슬쩍 자리하고 있습니다.

언뜻 이런 것들은 ‘철학자’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기에는 그리 비슷하게 보이지 않는 모습들이기도 합니다만, 또 그렇다고 어떤 모습은 철학자에게 어울리고 어떤 모습은 어울리지 않다고 구분하는 것도 영 이상한 일처럼 보입니다. 상이한 여러 모습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철학자에게 어울리기도, 어울리지 않기도 하는 것은 철학자의 모습을 떠올리기에 앞서 철학자가 도대체 누구냐, 무엇이냐는 규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는 연필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초록색과 보라색은 다르지만, 초록색이든 보라색이든 ‘어떤 조건’을 갖추었을 때 그것이 연필이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물이 연필인지 아닌지를 규정하는 조건은 색깔이 아니니까요. 육각형과 삼각형은 분명하게 다르지만 어떤 사물의 외형이 육각이든 삼각이든 연필로서 갖추어야 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면 사람들은 주저 않고 즉각적으로 그것을 연필이라고 판단할 겁니다. 이 연필의 끝 부분에는 작은 지우개가 달려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이것을 지우개가 달린 연필이라고 생각하지, 연필이 달린 지우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요.

자, 이렇게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철학자의 형상에서 떠올리는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상이한 모습들이라는 문제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산책을 하든 책을 읽든 강연을 하든 화를 내든 권력자에게 조언을 건네든 가난한 이들의 친구를 자처하든 간에, 그가 무엇을 하는지에 앞서 철학자란 무엇인가, 철학자는 누구인가, 하는 ‘어떤 조건'이 곧 철학자의 모습을 규정할 것이라고요.

그럼 철학자는 누구인가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음 일단 이 문제는 단순합니다. 철학자니까 철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겠지요. 그래서 철학자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은 곧장 철학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으로 이행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어쩌면 그리 단순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일단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철학을 정의한다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원리와 본질 따위를 탐구하는 학문’ 정도가 되겠으나, 인간이나 세계의 원리와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 왜 꼭 철학이어야 하는가 하는 반론이 곧장 성립합니다. 그래서 사회학, 역사학, 물리학, 생물학 따위의 알맞은 분과와 구분과 명칭이 있겠고, 또 이에 따라서 알맞은 탐구의 대상과 방법을 정할 수도 있겠지요. 혹은 그런 탐구 활동의 명칭이 왜 꼭 철학이어야 하는가, 예컨대 학문이나 과학이라는 명칭이 더 정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또 세상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현상이 ‘인간’이나 ‘세계’라는 거대한 명사 아래 마치 단일한 대상인 것처럼 묶이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이나, 현상 이면에 반드시 보편적인 원리나 본질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던져볼 수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철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철학자가 누구냐는 물음을 밝히는 것보다 오히려 더 까다로운 문제인 것처럼도 보이는군요.

사람들에게 아는 철학자가 누가 있는지 묻는다면 어렵지 않게 이런저런 이름들이 나올 겁니다. 니체, 칸트, 데카르트, 스피노자, 헤겔, 푸코 … 운운. 그런데 철학자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사정은 조금 달라집니다. 니체는 왜 철학자일까요? 칸트는 왜 철학자일까요? 책을 쓰거나 발표했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이 세상이 미친 영향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의외로 에디슨이나 포드 같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까요?

철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혹은 철학자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문제입니다. 당장에는 아주 가까운 최근에 들뢰즈나 러셀 같은 철학자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구체적인 제목의 저술을 직접 남기기도 했거니와, 플라톤은 자신의 저작 곳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라는 이름을 사실상 공유하고 있었던 당대의 소피스트들과 어떻게 다른지 구분하고 보여주기 위해 애쓰기도 했을 만큼 오랜 문제이기도 하지요. 달리 말하면 그만큼 소피스트와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진정한 철학자를 구분하는 것이 까다로운 문제라는 것에 대한 반증이기도 합니다. 자동차와 비행기처럼 어떤 대상들이 특징이나 기능 모든 면에 있어 한눈에 척 봐도 다르게 보인다면, 굳이 구분하기 위해 노력할 이유 또한 없겠지요. 즉 플라톤이 그토록 진정한 철학과 철학처럼 보이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 애썼다는 것은 한편으로 진정한 철학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이 녹록치 않은 작업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대에서 철학자는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사안들을 신중하게 숙고한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겼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들은 뻔하고 자명한 것들에 대해 불필요한 설명을 덧붙이며 시간을 낭비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귀찮게 만드는 그저 유별난 사람으로 보일 뿐이었지요.

자 조금 더 신중하게 이 문제에 접근해봅시다. 흔히 철학의 기원이라고 하면 고대 그리스를 떠올리고, 그 중에서도 최초의 철학자라고 하면 탈레스를 꼽습니다. 서구 문명의 기원으로 그리스/로마 문화를 거론할 때에도 항상 맨 먼저 나오는 이름이 고대 그리스이지요. 물론 이러한 관점도 아무 이유 없이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옛날’이기 때문인 것도 아니고요. 로마야 당장에 오늘 주제와는 관련이 먼 편이니 차치하고서라도, 고대 그리스가 항상 맨 처음 등장하는 까닭은 고대 그리스에서 최초로 ‘어떤 질문'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요? 물질을 이루는 최소 단위로서의 원자나, 더 구체적으로 말해 원자를 이루고 있는 전자나 원자핵 따위의 입자를 떠올려 볼 수도 있겠지요. 어떤 입자가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그에 상응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고, 오늘날에는 힘을 가진 입자의 최소 단위를 양자라고 부른다는 것 또한 아마 다들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처음 떠올린 것은 현대의 과학자들이 아닙니다. 세계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거대하게 보이는 물리 현상을 계속해서 쪼개고 또 쪼개면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어떤 최소한의 물질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생각을 처음 떠올린 사람들이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이었습니다. 글쎄요, 여기까지만 해도 기본적으로 뛰어난 통찰이긴 합니다만 이런 생각의 발견이 서구 문명의 기원으로서 고대 그리스가 가진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그들이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는가, 하는 물음, 즉 이러한 발상을 낳은 물음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이지요.

고대 그리스인들을 사로잡았던 질문, 우리가 오늘 다루는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보다도 한참 먼저 시작해,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지나 무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 질문은 바로 ‘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입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세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단순히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치고, 계절이 바뀌고 강산이 변하는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존재하고 운동하는 이 세계 전체의 근본 원리가 존재할까요? 그렇다면 그 원리는 무엇일까요? 바로 이 물음과 함께 인간은 자신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작은 세계를 초과하는 ‘세계 전체’라는 이념을 발명했고, 그것을 풀어야 할 수수께끼, 즉 탐구의 대상으로 설정했습니다. 철학이라고 할 만한 활동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수수께끼를 푸는 목적이 실용적인 목적이나 실제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앎에의 열정이 사람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지요. 이 대목에서 우리는 철학이 문자 그대로 앎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철학은 때로 우울한 날의 희망이 되거나 누군가에게 삶의 무기가 될 수 있을지언정 언제나 그것은 앎과 사랑 사이에, 오직 그 사이에서만 성립하니까요.

자, 플라톤의 <향연>은 한편으로 세계를 풀어야 할 수수께끼로 설정한 철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 이 수수께끼를 지탱하는 앎에 대한 열정이라는 문제를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기록입니다. 물론 철학이니 그리스니 하는 이런 사정들을 죄다 무시하더라도 그 자체로 상당히 흥미로운 텍스트이기도 하고요. 음 오늘날의 기준에 비춰 본다면 얼마간 낯선 장면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쩌면 당장에 재미가 눈에 띄지는 않을 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다시 숨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겠네요.

먼저 향연을 포함해 플라톤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을,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살펴봅시다. 익히 널리 알려진 전기적 사실들은 차치해놓고, 앞서 니체, 칸트, 헤겔, 데카르트, 파스칼 등등 몇몇 ‘철학자’들을 줄줄이 언급했습니다만 소크라테스야말로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아닐까 싶군요. 그는 직접 저작을 남기지도, 또 공식적으로 학파나 모임을 만들어 사람들을 특별히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아테네를 떠돌며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눴을 뿐이지요. <향연>도 바로 그런 장면 중 하나를 담고 있고요. 신은 죽었다거나 사과 나무를 심겠다거나 뭐 이런 말들보다 훨씬 더 잘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는 저 유명한 경구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향연>에도 등장하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소크라테스가 건넸던 조언이지요. 잘 알려진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를 떠돌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혹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만나기 위해 그를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고요.) 흔히 ‘소크라테스적 논박’이라고 불리는 논증의 기술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종종 그들을 궁지로 몰아 넣었습니다. <향연>만큼 유명한 <국가>의 첫 장면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젊은 친구들이 아테네의 명망 높은 원로 케팔로스와 마주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들이 케팔로스에게 올바름이 무엇인지 가르쳐달라고 청하자 그는 진실을 말하고 빌린 것을 정직하게 돌려주는 것이라고 대답하는데, 소크라테스가 정중하게 끼어들어 만약 친구가 거의 이성을 잃어 사람을 해칠 것만 같은 기세로 빌려주었던 칼을 돌려달라고 요청할 경우에 그때도 친구의 손에 정직하게 칼을 쥐어주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 되묻습니다. 케팔로스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피하고,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올바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대화가 펼쳐지지요. 자 매사에 이런 식이었던 소크라테스의 다음 운명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형이지요, 뭐.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낯선 규범을 퍼뜨려 도시의 안녕을 위협했다는 것이 그의 공식적인 죄목이었습니다. 도시의 시민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했고요.

다음엔 향연, 즉 그리스식 주연의 특징을 살펴봅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술을 꽤나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나름의 문화나 취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수준으로 음주 문화를 발전시켰던 것 같고요. 이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이방인들을 죄다 야만인 취급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이들이 야만이라고 조롱했던 이웃의 풍습 가운데에는 맥주를 마시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포도주를 나름의 방식으로 혼합해서 마셨는데,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대개 두세 배 가량의 물에 포도주를 희석해서 마셨다고 합니다. 포도주를 물에 희석하지 않고 그냥 마시는 것 또한 야만인으로 취급하면서요. 주연의 개최와 초대가 매우 흔한 일상일 만큼 술을 자주, 또 많이 마셨지만, 술에 취하는 것은 대체로 누구도 반기지 않았습니다. 혼자 마시는 일도 없었고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것 또한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복잡한 규칙이 있었던 셈이지요. 이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향연>의 마지막 장면에 술 취한 알키비아데스의 일행이 초대 받지 않은 잔치에 들이닥친 장면(212c)은 사실 꽤나 예외적인 독특한 광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날의 ‘향연’이 유별났던 점은 끝날 무렵의 소동 때문만은 아닙니다. 플라톤이 묘사하는 향연이 당대의 풍습과 어긋나는 지점들은 곳곳에 있으니까요. 먼저 향연의 규칙이랄까요, 당대의 풍습을 살펴봅시다. 향연은 언제나 개최자의 집에서 열렸습니다. (당대의 자유 시민들만이 향연을 개최해 손님을 초대할 수 있고, 초대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서른 명쯤 되는 사람들이 모였던 향연의 기록도 남아 있지만 거의 예외 없이 향연에는 열 명 내외의 사람들이 모였고요. 참가자들은 초대자의 집에 도착하면 우선 아주 간단한 식사를 짧게 마쳤습니다. 그런 다음 안드론이라는, 향연을 위한 별도의 장소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앉거나 누울 수 있는 소파 같은 자리가 참가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을 겁니다. 연회장의 벽에는 술과 관련한 신화 속 장면들이 그려져 있었고, 잔치가 진행되는 한 구석에서는 여자 노예가 피리를 연주할 예정입니다. 배석이 끝나면 노예들이 술이 담긴 큰 독을 향연장에 들고 들어왔고, 그런 다음 다른 병에 물과 포도주를 희석해 옮겨 담으면 얼추 기본적인 준비는 끝난 셈입니다.

하지만 아직 마실 때는 아닙니다. 헌주 의식이 남았어요. 오늘날에 견준다면 술자리에서 건배사를 하듯이, 참가자들은 주연을 시작하며 조상과 신들에게 축사를 바치고 개최자는 기도문을 낭송했습니다. 아테네의 주연은 통상적으로 세 차례의 헌주를 마친 뒤에 시작했는데, 역사학자들은 헌주의 사이사이 꽃이나 향수를 함께 바치는 의식도 함께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니까 헌주를 마칠 때쯤이면 아마 다들 얼른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잔뜩 차올랐겠지요.

그럼 헌주가 끝났다고 이제 술을 자유롭게 마실 수 있었는가, 하면 물론 그것도 아닙니다. 요즘도 여럿이 모인 술자리에서 잔을 부딪치지 않고 혼자 잔을 비우거나 빈 잔을 홀로 채우면 핀잔을 주는 사람들이 있나 모르겠군요. 아테네식 주연에서는 그랬습니다! 참가자들은 모두가 술잔을 하나씩 받았고, 모든 사람이 잔을 비워야 다시 잔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잔을 비우는 것 또한 개최자의 신호(?)와 함께 모든 사람이 동시에 진행했는데, 개최자가 술을 마시자는 제안을 하지 않았는데 혼자서 술을 마시는 행위나 혼자 술잔을 먼저 채우는 행위는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분위기에 취해 마시거나 남이 권하는 족족 술을 받아서 마시다보면 과음하거나 예정에 없이 만취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을 텐데요. 어쩌면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불쾌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겠고요. 아테네식 주연에서라면 그런 걱정은 없습니다. 개최자의 계획에 따라, 아주 체계적이고 공개적으로 다 함께 취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날의 음주가 느긋한 시음회 정도가 될지, 흥청망청 술잔치가 될지는 전적으로 개최자의 마음에 달려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사정을 알고 본다면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아테네의 주연은 처음부터 엉망이었던 셈입니다. 비극 경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아가톤이 주연을 베풀고자 사람들을 초대했는데(173a), 식사를 마치고 향연장에 들어선 다음 헌주를 마치자마자 손님 중 한 사람이 제일 처음 꺼낸 이야기가 어제 과음해서 나는 술을 못 마시겠다, 당신들도 마찬가지 아니냐, 뭐 이런 말이었으니까요(176a). 아테네식 연회의 사정을 알고 본다면 이건 정말 거의 남의 고희연에 상복을 입고 가는 꼴과 다름없습니다.

이상한 조짐은 바로 앞 장면에도 등장합니다. 잔치집에 도착한 소크라테스가 안에 들어오지 않고 잠시 밖을 배회하자, 집주인인 아가톤이 노예들에게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준비하라고 시키면서 “너희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식탁에 차려 놓으라"고, “너희가 손님을 만찬에 초대했다고 생각하고 시중을 들라”고 말하지요. 그러면서 옆에 있는 친구에게 ‘나는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었다’고 속삭입니다.(175b) ‘이래도 괜찮은 건가? 문제 없는 건가?’ 뭐 이런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건 뭐 주연의 개최자가 시작부터 진행을 포기한 셈이군요. 그러니까 이 연회는 주인의 역할도, 손님의 역할도, 심지어 노예의 역할까지도 처음부터 뭐 하나 맞게 돌아간 것이 없었습니다. 전날 과음해서 나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무례한 손님의 발언은 기어코 충격적인 결과로 이어집니다. 먼저 어떠한 권유나 강제도 없이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만큼만 마시자는 합의와, 피리 부는 시동도 밖으로 내보내서 혼자 불든지 자기들끼리 불든지 알아서 하게 두자는 결정과, 오늘밤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는 연회의 개최자가 아닌 손님 중 한 사람이 결정하자는 제안이(176e) 바로 그것입니다.

… (중략) …

소크라테스는 그날의 향연에서 만티네아의 한 무녀에게 들은 에로스의 탄생 설화를 이야기합니다.(203b) 그에 따르면 다른 모든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에로스의 본성 또한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조건과 운명에 의해 결정되지요. 에로스는 풍요의 신인 포로스와 궁핍의 신 페니아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포로스는 아프로디테의 탄생 축일 잔치에서 페니아를 만나 동침했고 그 결과 페니아는 에로스를 낳았지요.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는 에로스의 가장 중요한 몇 가지 특징들을 읽어낼 수 있는데, 먼저 에로스 탄생의 배경이 아름다움의 신의 탄생을 기리는 잔치였다는 점에서 에로스 또한 얼마간 아름다움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과, 상반되는 두 속성을 대표하는 신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에로스의 본성이 가진 이중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에로스는 본성 상 언제나 궁핍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결여한 어떤 것을 욕망하지요. 욕망의 대상을 획득하기 위한 술책을 꾸미는 일에도 능숙합니다. 쉴새 없이 모략을 짜내는 열정적이고 탁월한 사냥꾼이기도 합니다. 에로스의 빈곤하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능수능란하게 계책을 만들어야 하지만, 궁핍한 본성으로 인해 그의 욕망은 언제나 완전히 충족되지 않은 채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한 풍요도, 그렇다고 완전한 결핍도 아닌 셈이지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욕망은 언제나 결핍에 대한 욕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결핍은 상당히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핍은 부재와 다릅니다. 방금 에로스의 이중성을 언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결핍은 어떤 것이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닌 그 사이의 어디쯤에서 성립합니다. 한편으로 이미 키가 큰 사람이 큰 키를 바라지 않고 힘이 센 사람이 센 힘을 바라지 않고 날쌘 사람이 날쌘 것을 바라지 않고 건강한 사람이 건강을 바라지 않겠지만(200b), 다른 한편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어떤 것을 욕망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결핍에 대한 욕망이 가진 독특함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완전히 가졌다면 욕망하지 않겠지만, 전적으로 갖지 않았다면 그것을 욕망할 수도 없다는 독특함을요.

잘 알려진 것처럼 철학의 한편에는 ‘앎(sophia)’이, 다른 한편에는 ‘사랑(philia)’이 놓여 있습니다. 앎을 뜻하는 ‘sophia’는 라틴어의 어근 ‘sap-’으로 이어지는데, 칸트의 저 유명한 격언 ‘sapere aude’ 즉 ‘알려고 하라'라는 경구나 생각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종 ‘homo sapiens’ 등을 떠올려본다면 의미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어 ‘sophia’에 해당하는 라틴어 ‘sapies’에는 안다는 것 외에도 다른 뜻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맛보다, 음미하다는 뜻이지요. 영어로 치면 ‘savour’에 해당하는 낱말일 텐데, 불어에서 ‘알다’와 ‘맛보다’를 의미하는 두 단어 ‘savoir’와 ‘savourer’를 보면 생각보다 무척 가까운 거리에 이들 개념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용적인 의미에서의 음미가 아닌, 여기에서의 맛보기는 말 그대로 음식을 먹고 맛을 느끼는 일을 가리키는데, 곰곰히 이 음미의 의미를 음미해보면 퍽 흥미로운 통찰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음미는 사물에 대한 맛보기와 거리두기를 동시에 요청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맛을 보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자신의 경험 안으로 가져와야 하고, 그러면서도 판단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판단하고 말하는 나와 맛보고 경험하는 내가 분리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물을 자신의 안이자 밖인 입속에 둬야 하는 것이지요. 마치 에로스가 자신이 갖지 않은 어떤 것,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연루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을 끝없이 욕망하는 것처럼요.

철학은 세계를 하나의 수수께끼로 바라봅니다. 정답을 알고 있다면 수수께끼가 아니겠지요, 수수께끼는 오직 아직 해답을 확정할 수 없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수수께끼로서 성립합니다. 그러므로 철학은 이 수수께끼의 답을 자신이 결핍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출발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철학은 해답을 결핍하고 있지만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그것을 욕망할 수 있는데, 이 욕망이 바로 세계를 질문으로 바꾸고 수수께끼를 수수께끼로 만들고 수수께끼 앞에서 어쩌면 영원히 풍요에 도달할 수 없는 해답을 기꺼이 갈망하는 상태로 자신을 몰아세웁니다.

자 이렇듯 결핍에 대한 욕망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즉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열망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아직 여기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여기에 없다는 사태 속에서도 그것을 향한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것을 결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한 번도 가졌던 적이 없는 것에 대한 상실감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음 다소 불필요할 만큼 낭만적인 느낌이 따라붙은 듯한 우려도 살짝 듭니다만 바로 이 열망, 결핍(한 어떤 것)에 대한 확신과 열정이야말로 철학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러고 보니 소크라테스가 언급하는 에로스의 본성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랑과 욕망의 결합은 언제나 어떤 것의 탄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지요. 세계라는 수수께끼를 향한 인간의 열망이 끝없이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9. 9. 26. / 교보북살롱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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