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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민 김종규씨는 연평도에서 자동차 타이어를 정비하는 가게를 경영하고 있다. 김씨는 1932년생으로, 화살머리에서 전사한 박재권보다 한 살 아래다. 김씨는 전쟁 초기에 황해도 해주에서 연평도로 남하 이주했다. 전쟁 때는 국군 특수부대요원으로 참전했고, 국방부와 보훈처 가 주는 국가유공자 상장을 받았다. 제대 후에 김씨는 참전용사들의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1년에 네 번씩 육지를 드나들었다.

연평도에 포격이 시작되자 김씨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김씨는 우선 대한민국 정부가 준 상장들을 불태웠다. 이 상장을 지니고 있다가 북한군이 연평도에 들어오면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을 김씨는 늘 지니고 있었다.

김종규씨는 연평도에서 한평생을 살면서 군부대에서 훈련하는 포성을 일상적으로 들어왔고, 두 차례에 걸친 연평해전을 목도했다. 전쟁의 공포는 그의 생애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훈장이 곧 죽음일 수 있다는 현실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 현실감각은 그가 전 생애를 통해서 터득한 피와 눈물의 교훈이었을 것이다. 그는 연평도 포격이 시작되자 지체 없이 대한민국 정부가 준 상장을 불질렀다. 나는 그의 이 정확한 생존술을 글정한다. 이 민첩한 생존술을 그가 한국 현대사 속에서 겪어낸 모든 광기와 야만성, 폭력과 억압으로부터 작동되는 생물적 조건반사였다. 이 조건반사는 이념이 아니고 당파성이 아니다. 애국이 아니고 매국이 아니고 혁명이 아니고 반동이 아니다. 이것은 충성이 아니고 배신이 아니다. 총칼을 들이대면서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이념의 폭력 앞에서 거기에 대답하지 않고 훈장을 태워버리는 행위는 정직한 삶의 길이다. 김종규씨의 부인 유씨는 인천으로 피난 갔다가 곧 연평도로 돌아와서 하다 만 김장을 기어이 마무리했다.

- 김훈, '이등중사 박재권의 구멍 뚫린 수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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