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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고독


여러분께서는 아마 시간과 타자라는 제목에서 꽤나 익숙한 이미지들을 쉽게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굳이 철학이나 인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타자라는 말은 더 이상 그리 생소한 개념이 아니니까요. 제목 가운데 시간이야 우선 둘째 치더라도, 타자라는 이름은 즉각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과 가난한 자들, 저마다의 이유로 박해 받았던 자들, 난민들, 여성들, 인간이 아닌 동물들 따위의 형상을 소환합니다. 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도 얼마간 문제가 되고 있는 것들이지요. 세미나에서 이런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나 해법을 기대하셨다면, 어쩌면 남은 밤이 조금 실망스러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레비나스의 논의에서 이들 문제를 다룰 수 있을 만한 참조점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가능하겠지만, 세미나는 레비나스를 통해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보다는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타자 담론의 근간을 이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니까요.

일반적으로 철학은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밝히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철저한 해명으로 자신의 기반을 구축합니다. 반면에 레비나스의 철학은 윤리학, 그러니까 행동과 책임의 차원을 근간에 두고 있지요. 하지만 레비나스 철학의 이러한 형편과, 책임과 환대를 종용하는 레비나스 자신의 호소와, 타자에 대한 이해가 절실한 작금의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세미나에서는 구체적인 사례나 현실의 이런저런 모습이 아닌 레비나스의 논의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타자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문제보다 ‘타자라는 문제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선행하고, 레비나스의 철학이 윤리학을 가장 중요한 문제 영역으로 삼고 있음에도 레비나스가 던지는 화두는 윤리학을 넘어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강력한 물음을 제기하기 때문입니다.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환대를 주장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레비나스의 주장은 최종적으로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대를 제시하기에 이르지만, 그에 앞서 타자라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지, 즉 타자가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먼저 제기합니다. 이 세계에 타자의 자리가 있는가, 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나와 다른 어떤 것이 (나의)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몇 번이고 바꿔서 다시 물을 수 있습니다, 이 물음이 가진 중요성과 파괴력을 온전히 실감할 수만 있다면. 유럽의 정신적, 문화적 전통에서 타자를 사유할 수 있는가? 라고도 물을 수 있고요.

흔히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상대방을 곧장 타자라고 간주하곤 합니다. 그는 나와 다르니까요. 어쩌면 이건 굳이 의심이나 생각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자명한 사태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내가 아니니까, 나는 나고, 너는 너니까. 생각은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그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그는 나의 친구인가? 적인가? 그저 지나치는 타인들 가운데 한 사람인가? 그가 내게 나로서는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용인할 수 없는 어떤 특징이나 요소를 그가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잠을 자고 싶은데 그는 춤을 추길 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모두가 사는 내내 피할 수 없이 경험하는 일이고요. 매일 같이 목격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방법을 찾지 않을 수 없지요,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을 더 알아가기 위해, 더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아니면 아예 등을 돌리고 관계를 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불편할 것 같은 사람이나 상황이라면 애당초 그런 장면을 피해 가는 것도 적당한 방법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서로 양보하고 타협해서 일종의 규칙이나 규범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때의 규칙이나 규범이 꼭 명시적일 필요는 없겠지요, 노골적으로 어떤 약속을 정하지 않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서로 ‘도를 넘지 않으며’ 관계를 이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봅시다, 내가 타자라고 생각했던 상대방이 타자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일이지만 그 근거를 한번 생각해보자는 말입니다. 여성인 너는 남성인 나와 다르지만, 이 차이를 식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별이라는 공통의 척도가 존재해야 합니다. 너는 나와 다르다, 너는 내게 있어 타자다, 라는 판단에 앞서 사실 너와 나를 모두 포함하는 하나의 기준이 선행한다는 것이지요. 그 기준에 의해서 너와 내가 나뉜다면, 우리는 너와 나로 나뉘기에 앞서, 서로에게 타자로 존재하기에 앞서 하나의 공통된 기준에 속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예시는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나는 축구를 좋아하고 너는 축구를 싫어하니까 너와 나는 다르다, 라는 판단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너와 내가 공유하는 축구라는 어떤 활동이 선행해야 합니다. 춤을 잘 추는 사람과 잘 추지 못하는 사람, 대식가와 소식가, 달변과 눌변, 노인과 청년, 어느 경우든 마찬가지입니다. 춤과 음식과 언변과 나이라는 공통의 척도가 선행하고, 차이는 어디까지나 그 다음에 생겨납니다. 즉 차이는 척도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차이를 핵심으로 갖는 타자라는 개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와 나는 서로에게 타자이기에 앞서 하나의 동일한 기준을 가질 수밖에 없지요. 무게중심을 어디로 옮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야구를 좋아하고 너는 등산을 좋아한다면? 너와 나는 서로 좋아하는 활동이 다르니까 서로에게 타자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것으로 충분합니까? 글쎄요, 이 경우에도 우리는 저마다 각각의 것을 좋아한다는, 행위의 척도를 공통의 기준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구분의 경계를 단순히 어떤 대상이 아니라 행위나 속성의 차원으로 옮긴다면 타자의 문제가 가진 두 번째 차원이 따라서 드러납니다. 자, 나는 등산을 좋아한다는 너를 마주합니다. 너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등산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드러낼 수 있겠지요. 하지만 네가 등산을 어떻게 좋아하는지,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좋은지, 좋다고 말하는 너의 그 기분과 상태가 정확히 무엇인지, 또 그것이 너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등을 알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알 수가 없지요. 굳이 따진다면 헤아리거나 짐작할 수 있을 뿐, 혹은 임의의 어떤 근거를 (예컨대 신경계의 전자적 신호 같은) 동원해서 문제를 잠시 가릴 수 있을 뿐 나는 너를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기술이 부족하거나 노력을 덜 기울여서가 아니라, 그냥 근본적으로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몇 가지 간단한 예시를 살펴봤지만, 이러한 예시가 시사하는 바는 뚜렷합니다. 사실 타자라는 개념은 도무지 가능하지가 않다고요. 너는 나와 다르지만 너와 나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결국 차이에 선행하는 공통의 기준입니다. 나는 나와 다른 어떤 것으로서 너를 바라보지만, 어디까지 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인식은 결국 나의 경험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의 인식은 그저 대상으로 너를 잠시 경유했을 뿐, 나에서 출발해 나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타자는 없습니다.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관습적으로 너와 나를 구분하고, 혹은 필요와 편의에 따라, 목적과 상황에 따라 경험적 차원에서 임의의 분절을 설정하고 있을 뿐, 근본적으로 이 세계에 타자의 자리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철저하게 혼자입니다. 혼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건 곁에 사람이 있고 없고 경험이 많고 적고 뭐 그런 차원의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스스로에게 갇힌 채, 서로에게 도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제아무리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별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인간의 굴레, 천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사실 네게 드리운 나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너를 부르기 위해 내가 내는 소리는 결국 나의 이름일 수밖에 없습니다.

레비나스의 질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성립합니다. 하나의 질문이지만, 가히 인류사적 도전이라고 칭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타자는 무엇인가? 타자는 가능한가? 타자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함께 읽을 <시간과 타자>는 레비나스가 1946년부터 1947년 사이에 진행했던 강의의 기록인데, 강의는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왜 타자와 함께 시간이 핵심으로 등장하는지는 레비나스의 강의를 따라가는 동안 자연히 밝혀질 텐데, 그의 생각이 과연 타당한지도 천천히 함께 따져봅시다. 짧은 시간인 만큼 레비나스 철학의 배경과 맥락과 영향들을 모두 살피는 것은 대체로 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레비나스의 목소리를 따라서, 이 강의에서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봅시다.

오늘날 현대 철학이라고 하면 흔히 현재 세계적인 명성을 날리고 있는 바디우나 랑시에르를 비롯해 들뢰즈, 푸코, 데리다, 메를로-퐁티, 알튀세르 같은 쟁쟁한 이름들, 또 외연을 조금 넓힌다면 롤랑 바르트, 바슐라르, 라캉, 페르낭 브로델, 레비-스트로스 등등에 이르기까지 20세기 프랑스 철학자들을 먼저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역시 잘 알려진 사실처럼 20세기 프랑스 철학은 2차 대전 이후 독일 철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신의 개성과 성과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헤겔, 후설, 하이데거의 사상이 프랑스 철학 전반에 미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레비나스의 사상은 후설과 하이데거의 사상과 상당히 인접해 있습니다. 물론 레비나스가 설정하고 있는 문제나 겨누고 있는 주제는 후설이나 하이데거의 그것과 상이하지만, 그럼에도 레비나스가 이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사실 당연하겠지요, 후설과 하이데거에게서 직접 배웠으니까요. 1906년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레비나스는 1923년에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후설을 직접 사사하기 위해 1928년 프라이부르크로 향했고요. 프라이부르크에서 하이데거를 만나 그의 강의를 직접 듣기도 했습니다. 1930년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온 레비나스는 후설의 직관이론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대강의 사정만 두고 보더라도 레비나스가 후설과 하이데거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거니와, 레비나스의 저작을 직접 펼친다면 이러한 심증을 뒷받침할 단서를 확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당장에 세미나에서 다루는 <시간과 타자> 또한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며 시작하는 하이데거의 저 유명한 존재 물음이라는 문제를 우선 경유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방금 언급한 것처럼 레비나스가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계승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이데거의 거대한 논의를 몇 줄로 요약하는 것은 여러 모로 여러 사람에게 모욕적인 일이 되겠으나, 부득이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차이를 단적으로 짚는다면 하이데거의 사유가 존재자에 함몰된 상태에서 벗어나 존재를 다시 사유할 것을 요청한다면 레비나스의 사유는 오히려 익명적 존재 방식인 존재 그 자체에서 탈출해 이름과 얼굴을 가진 존재자에 도달할 것을 요구하니까요.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중요한 개념 구분을 먼저 짚어봅시다. 일단의 논의에서 여러 차례 등장했던 ‘존재’와 ‘존재자’라는 개념입니다. 개념사와 용례를 모두 살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선은 레비나스의 논의를 좇아갈 수 있을 정도로만 가볍게 짚어두지요. 간단히 말하자면 ‘존재자’는 존재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고, ‘존재’는 어떤 것의 ‘있음’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해둘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여기에 있다’라는 상황을 예로 든다면 ‘이것’에 해당하는 어떤 것이 ‘존재자’라고, ‘있다’라는 사태가 ‘존재’를 가리킨다고 우선 말할 수 있겠지요. 뭐 이렇게 본다면 말만 낯설지 그리 어려운 구분이나 복잡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 개념들을 구분한 뒤에야 비로소 열리는 문제의 차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장에 우리는 있음과 없음만 가지고 대상을 식별하거나 사태를 판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무엇이다’와 같은 판단이 더 일반적인 판단의 방식이지요. 이러한 판단을 나누면 이것인 어떤 것이 있다와 무엇인 어떤 것이 있다라는 두 사태가 나오는데, 따지기 시작하면 이 두 사태 각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이들의 연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부터 시작해 무궁무진한 철학 놀이터가 열리는 셈입니다. 물론 반대 방향으로도 얼마든지 논의의 차원을 설정할 수 있겠지요.

일반적으로 어떤 개념이 가진 보편성이 커질수록, 그 개념이 가진 내용은 작아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동물이라는 개념은 인간이라는 개념보다 더 많은 것들을 포괄할 수 있는, 더 보편적인 개념이지만, 인간 개념이나 동물 개념이 포함하는 다른 개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구체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움직일 수 있으며 자신 이외의 다른 유기물로부터 영양을 획득하는 생명체’, 정도로 동물 개념을 정의했을 때, 동물에 포함되는 포유류나 파충류, 혹은 인간이나 사자처럼 하위 개념으로 갈수록 보편성은 줄어들고, 구체성은 증대됩니다. 달리 말하면 개념의 보편성을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에 속하는 개별적인 것들의 구체성을 사상해야만 하지요.

반면에 ‘존재’라는 개념을 생각해봅시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존재 개념은 녹아 있습니다. 굳이 ‘존재’라는 개념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지 않더라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표현에는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녹아 있습니다. 존재하는 어떤 것 가운데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 이라고 풀어 쓸 수 있을까요? 일종의 동어반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존재는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개념에 닿아 있지요. 이렇게 본다면 존재 개념은 모든 존재자를 아우르는 최상위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개념의 추상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보편성의 증대와 구체성의 축소와는 별개의 차원에 존재합니다. 하이데거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시했지만, 일단 오늘 밤 우리는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주의하지요, 오늘 밤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 즉 존재자들이 서로 함께 있다는 사태는 존재의 본질적인 상황입니다. 다만 인간이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지요. 인간(이라는 존재자) 역시 다른 존재자들과 함께 이 세계 속에 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꾸 그 사실을, 즉 자신 또한 존재의 일부임을 망각한 채 다른 존재자들을 도구적으로 바라봅니다. 때문에 인간을 제외한 존재자들이 인간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다분히 인간에 의해 포착된, 특히나 도구적으로 포착된 차원에 한정될 수밖에 없고요. 인간의 도구성 앞에 세계의 모습이 감춰지는 것이지요. (물론 이러한 분석은 지극히 예비적인 고찰일 뿐, 하이데거의 논의는 이에 대한 극복에 이르기까지 훨씬 큰 차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존재는 본래 철저하게 홀로 있는 것, 고독한 것이라고요. 우리는 오늘 밤 이미 이 문제를 살펴본 바 있습니다. 영원한 ‘나’들의, 절대적인 나로 가득한 세계에 대해. 내가 너를 만질 때, 내가 느끼는 것은 나의 손의 촉감입니다. 내가 너를 볼 때 내가 보는 것은 나의 눈에 비친, 너의 형상이지요.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러한 관계에서 어떠한 교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능하지 않아요. 나의 존재는 그저 내가 나인 채로 존재한다는 순수한 그 사태 때문이지,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세계와 공유할 수 있는 어떤 의미내용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설령 나의 인식이나 표현이 미치는 범위가 확장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홀로 존재할 뿐이라는 내 존재의 양태에 아무런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하이데게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 속에서 다른 존재자들의 함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 레비나스에게 있어 인간이 잊고 있는 것은 자신의 홀로 있음이지요. 레비나스는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를, 즉 홀로 있음이라는 사태를 자각하는 것을 ‘홀로서기(hypostase)’라고 부릅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홀로서기는 어쩐지 성숙하고 결연한 인상을 자아내는 독립이나 자립 같은 개념과는 별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주체가 자기자신과의 관계에 몰두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주체가 다른 대상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조차 실은 자기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몰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상을 향한 주체의 어떤 노력도 대상에 닿을 수 없으니까요.

레비나스에 따르면 존재는 주체가 자기자신으로 홀로 서기 이전의, 근본적으로 익명적인 상황입니다. 그저 있을 뿐, 아무런 의미도 내용도 없는 사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레비나스는 우선 이러한 공허한 존재에서 어떻게 존재자가 생기는지에 주목합니다. 이를 위해 잠이라는 은유를 제시하지요. 잠은 무엇보다 깨어남, 깨어 있음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자지 않는 사람은 깨어 있을 수도 없는데, 깨어 있는 상태란 바로 항상 깨어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기 위해서는 먼저 깨어나야겠지요, 그렇다면 잠, 깨어남, 깨어 있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가 이와 같습니다. 레비나스가 ‘형이상학에는 물리학이 없다'고 간결이 덧붙이는 바, 존재에서 존재자로 나아가는 이 과정을 단순히 우리에게 익숙한 사건의 인과나 시간 계열로 파악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신경세포의 활성화 정도를 가지고 잠과 깨어남을 구분하는 일 또한 이 경우에는 적절하지 않겠지요. 레비나스가 예시하듯이, 의식은 잠과 같은 익명의 존재에서 주체로서의 존재자로 깨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주체의 홀로서기에 해당하지요. 이제 존재자로서의 주체는 자신의 존재를, 자신이 존재한다는 그 사태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자기자신을 실행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자아는 애초에 어떤 존재자, 즉 여러 존재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존재의 양식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 (중략) …

레비나스에 따르면 홀로 선 주체는 참여, 또는 향유라는 방식을 통해 타자와 조우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이것을 주체가 타자와 맺는 관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레비나스가 원시인의 사고를 예로 들듯이 ‘논리 이전'의 인간 활동에 해당하는 참여는, 일종의 무아경과 같은 혼융으로서 관계항들의 이원성(내지는 다원성)을 충분히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참여란 나와 너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가 아닌, 제3의 어떤 것, 공동의 것과 관련해서 주체가 맺는 관계입니다. 국가, 공동체, 신화, 뭍한 이데올로기 따위가 제3항으로 기능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제3항을 매개로 만나는 타자는, 주체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의 타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레비나스는 다른 저작에서 이렇게 제3항을 매개로 주체에게 나타나는 타자를 ‘옷을 입은 존재들'이라고 칭하는데, 이들이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에 의해 지배 당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주체가 맺는 참여라는 관계는 것은 타자(처럼 보이는 어떤 이)가 입고 있는 옷과 같은 옷을 입는 것일 뿐, 그와 타자로서 관계 맺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향유의 경우는 어떨까요? 레비나스는 향유, 인식, 노동, 거주 등 고독하게 존재하는 주체가 일상에서 수행하는 활동을 통틀어 ‘존재의 일반 경제’라고 부릅니다. 이 가운데 레비나스가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이 바로 향유이지요. 향유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본격적으로 다루도록 합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주체가 타자와 맺는 관계 가운데 향유 개념은 사실 상당히 흥미로운데, 이에 따르면 주체는 우선 대상 앞에서 자신을 잊고, 관계 이후에는 대상을 자신에게로 동화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없거나, 대상이 없거나, 둘 중 하나는 없는 것이지요. 당연히 타자와의 관계 또한 성립하지 않습니다.

홀로 선 주체는 과연 타자와 조우할 수 있을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9. 1. 11.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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