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밤의 경험


지난 시간 블랑쇼는 문학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물음이 되는 순간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자기자신을 물음으로 삼는다는 것의 의미는 의외로 가까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자신을 물음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곧 나에 대해서 묻는 것, 나는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묻는 것이니까요.

어떤 대상에 대한 물음과 해답은 일종의 주술관계, 그러니까 주어와 술어가 결합한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계속 해서 ‘나’의 경우를 예시로 사용한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나는 사람이고, 여성이고, 회사에 다니고 있고, 포도를 좋아하고, 낯선 장소를 싫어하고, 하는 식의 해답에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나'라는 주어가 ‘사람이다’, ‘여성이다', ‘회사원이다’ 등의 술어와 결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것을 조금 더 자세히 분석한다면 자신을 지칭하는 대명사 주어 ‘나’라는 개념이 ‘사람', ‘여성', ‘직장인’ 등의 개념과 결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 여성, 직장인과 같이 비교적 의미나 뜻하는 범위가 명확한 개념은 물론, 같은 방식으로 주어를 노련하다, 온화하다, 와 같이 다소 추상적인 개념에 연결시키는 것도 물론 가능하고요.

이렇게 해도 물음이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았다면, 즉 주어의 의미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면 같은 과정을 한 번 더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즉 노련하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다시 물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노련함이 주어의 자리에 들어갑니다. 물음에 대한 해답의 자리에서 물음을 받는 대상의 자리로 옮기는 것이지요. 노련함은 경험이 많은 것이다, 능수능란한 것이다, (어떤 일을) 익숙하게 여기는 것이다, 와 같은 식으로 다시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처음 물음의 대상이었던 ‘나’라는 주어에서 출발해 노련함으로, 또 능수능란함으로 술어가 이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이런 과정은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습니다. 또 몇 번의 연결 끝에 도착한 해답이, 이동 과정이나 맨 처음 출발했던 대상에 썩 일치하지 않는다면 오류가 생긴 지점을 찾아 다시 연결을 이어갈 수도 있고요. 어떤 대상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는 것은 이렇게 일차적으로는 그 대상을 한정하면서 이를 통해 특정한 방식으로 대상의 의미를 확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그것이 아닌 것들로부터 구분해내는 것이지요. 이러한 작업을 세계 전체에 대해 수행한다면 어떨까요? 이것과 저것을,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 각각을 구분하는 과정이 되겠지요? 단순한 과정인 것 같지만 의외로 철학의 근간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중요한 작업입니다. (이런 식의 사고라면 단연 소크라테스를 으뜸으로 꼽을 수 있을 텐데, 유럽의 전통 철학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러셀조차 어쩌면 철학은 ‘소크라테스처럼 생각하는 방법’에 다름 없을지도 모른다고 인정했을 정도이니 그 중요성은 새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블랑쇼로 돌아와서 이 방법을 문학에 적용해봅시다. 우리 앞에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 물음이 닿아 있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건 문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예술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문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제적 주어를 어떤 술어에 연결할 수 있을까요? 어떤 개념과 결합했을 때 문학은 자신이 가진 고유함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나는 사람이다, 라는 연결은, 실은 나는 누구/무엇인가에 대한 썩 충분한 해답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도 너와 그녀와 그를 포함해서 많으므로, 나는 사람이다, 라는 연결만으로는 내가 누구/무엇인지 충분히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사람이다, 라는 술어를 가짐으로써 나는 동물이나 식물과 구분되었지만, 실은 여전히 많은 것들과 뒤섞인 상태에 불과합니다.

같은 문제가 문학에 대해서도 성립합니다. 사람들이 문학에서 흔히 떠올리는 어떤 속성들, (오늘 우리가 다루는 맥락에서는 문학이라는 주어에 결합시키는 술어들이라고도 볼 수 있겠군요.) 이를테면 문장의 운율이나 글의 수사적 효과, 혹은 철학적이거나 역사적이거나 심리적이거나 사회적인 어떤 의미들의 구성이 문학을 규정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물론 이들 속성은 문학과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는 특징들입니다만, 앞서 몇 차례 언급했던 것처럼 적어도 블랑쇼는 이것들만으로는 문학이 무엇인지 밝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특징들로 환원되지 않는 문학의 어떤 지점에 주목하면서 블랑쇼는,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작품이라는 분석이나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없고 텍스트 내부에서 객관적인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글쓰기와 독서가 만들어내는 어떤 효과나 작용의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 (중략) …

블랑쇼가 소개하는 <이지튀르>는 말라르메의 미완성 소설입니다. 원래 제목을 그대로 옮기면 <이지튀르, 또는 엘베농의 정신착란>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아쉽지만 이 텍스트는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고, 불어판 말라르메 전집에 실려 있을 뿐입니다.

<이지튀르>의 기획이 미완으로 그쳤다는 사실은 사실 퍽 의미심장합니다. 어떤 기획이 있었고, 그 기획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말라르메는 <이지튀르>를 통해 어떤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바로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의 가능성이지요. <이지튀르>의 기획은 덜 분석되었거나 충분히 사유되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적절한 술어를 찾기 못했거나 다른 연결고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애당초 분석될 수 없고 연결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문학의 핵심이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말라르메가 생각하는 문학적 언어, 즉 시적 언어는 단순히 운율이 잘 살아 있는 언어나 아름다운 수사가 적절하게 배치된 언어, 또 철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의미를 충만하게 가진 언어도 아닙니다. 낱말로 이루어졌지만 낱말의 뜻으로 환원되지 않는 언어라고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블랑쇼는 낱말의 틈새나 바깥 같은 표현을 통해 시적 언어가 가진 어떤 특징을 환기하고자 노력하지요.

말라르메가 주관했던 모임 ‘화요회(Mardis)’에 참가했던 친구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그가 발견했던 이러한 언어의 특징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요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모임에서 말라르메가 발표한 작품과 작품을 발표하는 말라르메를 두고 ‘마법(magie)’ 같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 바 있습니다. 이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모임에서 말라르메는 시나 산문을 발표하며 어떤 말을 했지만, 말라르메가 말을 마친 뒤 그가 했던 말의 의미나 메시지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떻게 설명도, 요약도 할 수 없는 기묘한 상황이 반복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매우 구체적이고 명료한 낱말들로 이루어진 말인 경우에도. 또 말하는 말라르메의 행위 자체는 특별할 것 없이 매우 조용하게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강렬한 인상의 행위였다고 합니다. 그 행위 속에서 말을 하는 사람이 평소 자신들이 알고 있던 말라르메의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어떤 인간으로 느껴질 정도로요.

바로 이 지점, 내가 하는 나의 말이 아닌 누군가가 하는 어떤 말, 공간과 시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분절하는 기이한 경험의 말이 바로 말라르메가 모임에서 행했던 마법이자, 그가 감지하고 실천하고 작품을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시적 언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블랑쇼가 인용하는 편지에서 고백하듯이, 시구를 끝까지 파고드는 과정에서 자신이 발견한 무라는 심연과 이 심연 앞에서 완전히 죽어버린 자신의 존재, 그리고 이렇게 비인칭이 된 나머지 자신은 이제 더 이상 네가 알고 있는 스테판조차 아니라는 것을 말라르메가 고백하는 까닭은 바로 그가 문학의 이러한 절대적 익명성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말라르메는 작품에서 작용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았고, 부재의 작업을 경험했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긍정의 능력을 포착했습니다. 블랑쇼는 이것을 ‘존재들의 집요한 긍정’이라고 표현하지요. 말라르메에게 시는 언어가 달성하는 의미와 그것의 결정에 봉사하지 않는 직접적인 사건입니다. 즉 어떠한 대상도 가르치거나 설명하거나 지시하거나 구획하지 않는 말과 말하기 그 자체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언어는 언제나 익명의 언어,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언어이며,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 자체의 언어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자 말라르메의 기획이 가진 가능성 한 가지를 추가로 생각해보면서 오늘 이야기를 정리하지요. 인간이 구획한 세계의 어떠한 것 하나 모방하지 않고 재현하지 않으려는 말라르메의 기획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가장 순수한 문학의 가능성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 가운데 하나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라르메의 기획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함의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문학이 가진 정치적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세계와 세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사물을 규정하는 방식이 바로 언어를 통한 의미작용입니다. 쉽고 흔한 말로 바꿔 말하면,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구성한다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이렇게 본다면 세계는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입니다. 세계를 구성하는 언어의 힘이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지요.

말라르메의 시는 바로 그 힘이 부정되는 지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언어를 통한 의미의 모든 구획을 거부하는 말라르메의 기획은 곧 언어의 구성적 힘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미를 결여한 말, 말 그 자체일 뿐 아무것도 아닌 말은 세계에서 무력하기 때문에 정치적입니다. 그것은 언어와 개념으로 구획된, 위계와 질서가 반듯한 세계의 한계를 명백하게 드러내니까요. 의미를 생산하는 언어의 바깥이 존재한다는 말라르메의 증언은, 그러한 의미로 이루어진 세계의 기원이 실상 자의적이고 상상적인 방식의 언어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묵묵히, 하지만 강력하게 드러냅니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침묵으로 전하는 증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블랑쇼가 말하는 문학은, 문학의 모든 감동과 환희에도 불구하고 고독한 가운데, 고요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바로 문학의 행위가 언어가 묶어내는, 이전까지의 세계에 존재하는 틀에 박힌 연결을 거부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문학은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소란한 환호가 아닌 침묵으로 열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 다음 시간에는 작품과 죽음의 공간이라는 블랑쇼의 주제 가운데 마지막 장으로, 릴케의 이야기를 다루겠습니다. <문학의 공간>의 영역자는 ‘작품과 죽음의 공간'이라는 책의 4부 제목을 무려 ‘릴케와 죽음의 요구’라고 바꿔서 번역했는데요, 그럴 만큼 이 주제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지 함께 살펴봅시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8. 10. 26. / Rolling School

info@labyrinthos.co.kr

#MauriceBlanchot #LespaceLittéraire #모리스블랑쇼 #문학의공간 #말라르메 #StéphaneMallarmé #Mallarmé #labyrinthos #라비린토스

© Labyrinth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