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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죽음


왜 글을 쓰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고서도 분명히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누구든 종이와 연필만 있다면 무엇이든 쓸 수 있을 겁니다. 쓸 수는. 하지만 문학에 대해서라면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그렇게 쓰인 것이 문학인가, 누구든 언제든 뭐든 쓰기만 하면 전부 문학인가, 라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석연찮은 기분이 어쩐지 고개를 들지요. 아무개가 종이와 연필을 들고 어찌어찌 적어낸 일기장과 베르테르의 편지 뭉치 사이의 차이는 그저 독자가 느끼는 재미나 감동의 차이 때문일까요? 아니면 세간이나 후대의 평가에 달린 일일까요?

블랑쇼는 문학이 물음이 되는 순간이 바로 문학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문학의 물음은 문학을 가혹하게 분석해서 작품들 가운데 어떤 공통의 이념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살펴보는 일이라고 덧붙이지요. 쓴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학적 글쓰기는 도대체 무엇인가? 앞서 작업과 고독의 관계, 또 세계 속에서 작품이 갖는 의미와 위치에 대한 성찰을 통해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이라고 하는 어떤 영역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문학의 공간을 이루는 작품과 그것의 요구라는 주제를 카프카를 통해 펼쳐 놓지요.

블랑쇼에 따르면 카프카의 불행은 글쓰기의 근원적 비현실성에 맞닿아 있습니다. 누구든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불행한 사람이 책상 앞에 앉아 ‘나는 불행하다'고 적는 일은 사실 기묘한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불행의 상태는 힘의 축소와 고갈을 의미하는 반면, 어떤 상태에 대한 재귀적 인식과 그것의 표현을 힘의 증대를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블랑쇼의 표현대로 ‘문학의 공간’이라고 일컫을 수 있는 어떤 영역이 있다면 당연하게도 그것은 다른 공간들과 구분되는 고유한 영역이어야 할 겁니다. 블랑쇼는 카프카를 통해 세계와 문학 사이의 근원적 긴장과 갈등을 중심으로 문학의 공간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세계의 상실이 우연과 고립의 긍정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어떤 영역에 대해, 불행이 문장의 형태를 얻어 비로소 세계 속에서 불행이라는 것이 존재하게 되는 어떤 영역에 대해.

작가가 글을 쓸 때 작가가 쓰는 글 또한 작가를 바라봅니다. 블랑쇼는 이를 작품의 요구라고 명명합니다. 여기에서의 작품의 요구는 어떤 작품이 독자에게 자신을 이런이런 의미로 읽히기 원하는 요구, 혹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건네는 요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문학의 공간 속에서, 작품이 사물로서의 형태를 얻기 위해 작가에게, 세계에게 요청하는 어떤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작가는 주인의 자리에서 자신의 말을 부려서 말을 만드는 사람이 아닌, 작품의 요구에 충실히 응답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작품의 고요한 요구에 귀 기울이고 이에 응답함으로써 문학의 공간에 다가서는.

그런데 이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모순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블랑쇼에 따르면 문학의 공간은 작업과 작품 속에서 존재합니다. 작품은 고유한 요구를 통해 문학의 공간을 드러내지요. 작품이 없이는 문학이라는 공간도 없고, 작품은 작업이라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요구를 통해 문학이라는 공간을 드러냅니다. 문제는 작품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업의 시간에서 발생합니다. 순전히 논리적인 문제입니다. 문학의 공간이 작품을 통해 드러난다고 했을 때, 작업 과정에서는 작품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문학의 공간 또한 아직 존재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의 작품의 요구를 문학의 공간의 요구로 볼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카프카에 대한 논의에 바로 뒤이어 ‘가능한 죽음’이라는 이름의 다소 생경한 논의가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작품 없이는 문학의 공간도 없다, 문학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데 작품이 문학을 요구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사유를 가로막는 논리적 장애물을 돌파하기 위해.

우리는 이미 한 차례 비슷한 문제를 돌파한 경험이 있습니다. 불가능한 글쓰기를 살펴보면서요.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시작부터 글쓰기를 위해서는 재능이 필요하다는 모순에 봉착합니다. 하지만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이 자신에게 작가가 될 능력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글을 쓴 다음에야 자신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쓰기 위해서는 쓸 수 있는 재능이 필요하지만, 쓰지 않고서는 재능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모순이 갖는 정신사적 의미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이미 중요하게 다룬 바 있습니다. 어떤 활동을 통해 실천적 현실과 접촉하지 않는 한, 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므로, 그는 자신이 어떤 활동을 시작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지 활동의 목적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행위를 통해 현실에 도달해야 하지만, 자신이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는지 행위 이전에는 알 수도 없고 결정할 수도 없다는 모순적인 상황. <정신현상학>에서 인간 활동의 문제를 상세히 다룰 때 헤겔이 목숨을 건 투쟁이니, 도약이니 운운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둔감한 사람들이야 아무것도 모른채 대수롭지 않게 책장을 넘길 수 있겠지만 실은 어떤 행위의 순간에 도달한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일 정도로 깊은 심연을 뛰어넘는 일이니까요.

자, 우리는 헤겔을 통해 어떤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알아야 하지만, 해보지 않고서는 내가 그것을 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는 논리적 모순 앞에 도달했습니다. 문학과 글쓰기의 문제 또한 똑같은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확인할 수 없으므로 실행이 불가능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다는 불가능한 순환 속에서, 블랑쇼는 작품은 계획될 수 없고 단지 실현될 수 있을 뿐이라고 단언합니다. 블랑쇼에 따르면 작가는 현실에서 작품의 자리는 단어와 단어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태를 명확하게 의식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블랑쇼는 그러므로 상황이 어떻든, 시작, 중간, 끝의 과정을 염두에 두지 말고, 즉각적으로 시작하고 즉각적으로 행위의 차원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덧붙이지요. 이렇게 해서 작가는 글쓰기를 가로막는 순환 고리를, 즉 쓰기 위해서는 재능이 필요하지만 쓰지 않는 한 재능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다는 순환 고리를, 또 실천적 활동을 통해 현실에 도달하지 않는 한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한 실천적 활동으로 현실에 도달할 수 없다는 순환 고리를 단절할 수 있습니다. 쓰는 것을 통해, 오직 그 방법만으로.

자, 다시 수수께끼로 돌아옵니다. 문학이 없이는 작품도 없다, 하지만 작품이 없이는 문학도 없다는 모순을 돌파하기 위해 블랑쇼는 죽음의 문제를 소환합니다. 죽음과 문학의 유사성은 첫 시간에 이미 예비적으로 살펴본 바 있지요.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죽음이 실은 불가능하다는 것, 기획도 실행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불가능한 죽음이라는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블랑쇼는 우선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을 참조합니다. 27세 청년 키릴로프는 자살이 위대한 인간적 행위라고 믿습니다. 그는 세계와 신, 인간과 자유 등을 두고 고민하다가 죽음에 대한 인간의 공포가 신을 만들어냈으므로 인간은 자살을 통해 신의 부재와 자신의 자유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또 신이 인간의 죽음을 관장한다면 자살, 즉 인간이 자신의 선택을 통해 자신에게 죽음을 부여한다는 것은 인간이 신과 같은 위치에 오르는 길이라고 결론 짓지요. 그는 죽음을 완전히 인간적인 가능성으로 만들고자 결심합니다.

뒤이어 블랑쇼는 아리아와 그의 남편 포에투스를 소환합니다. 플리니우스의 서간집에 이들의 일화가 남아 있지요. 포에투스는 반란 혐의 로마 황제에게 자결 명령을 받았습니다. 죽음의 명령 앞에 남편이 머뭇거릴 때 아리아는 자신의 가슴에 먼저 칼을 찔렀다가 빼낸 뒤 남편에게 칼을 건넵니다. 아프지 않다고 말하면서요.

블랑쇼에 따르면 두 죽음 모두 어떤 초과를 담고 있습니다. 키릴로프는 죽음의 순간이 자아의 본질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자아의 자유가 최고에 달한 순간이기를 소망하지요.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죽음의 순간 그가 맞닥뜨리는 것은 자아의 부재입니다. 완전한 공백. 죽음 속에서 자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아가 없으므로 자아의 죽음 또한 없습니다. 이미 우리가 여러 차례 다룬 것처럼 자아는 죽을 수 없습니다.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는, 완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은 자신의 가능성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를 덮치오는 것일 뿐이고, 그러므로 이 세계에는 자신의 죽음이 아닌 누군가의 죽음이, 언제까지나 익명과 타자의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자아의 본래성이 확인되는 사건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향해 선구적으로 자신을 열어보임으로써 자신의 실존을 확인할 수 있고, 이 경험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순수하고 고유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면 블랑쇼가 말하는 죽음은 자아의 비본래성, 자아의 바깥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나의 죽음은 자아의 불가능성을 드러냅니다.

… (중략) …

블랑쇼가 인용하는 편지에서 발레리는 진정한 화가는 평생을 다해 회화를 찾고, 진정한 시인을 시를 찾는다고 적었습니다. 평생을 다한다는 것은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게 느껴지는 요구입니다. 블랑쇼가 언급하는 지점은 흔히 어떤 분야에 남들보다 아주 오랜 기간 종사해왔다는 것을 일컫는 ‘평생 그 일을 했다’는 관용구의 의미와는 다를 테니까요. 이를 테면 어머니의 임종일에도 붓을 놓지 않았던 세잔을 떠올릴 수 있겠지요. 어머니를 매장하기 위해 고작 하루 정도 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어떤 엄격함이랄까요.

그런데 이런 정도의 엄격함이라면 그저 작가의 개성 정도로 쉽게 치부할 수 없을 겁니다. 혹은 이런 정도의 엄격함이 그저 자기 표현에 대한 강한 욕구만으로 환원될 수 있을까요? 그림이 그에게 무엇을 요구했기에 세잔은 그토록 엄격하게 그의 작업에, 작품에 몰입했던 것일까요? 블랑쇼가 발레리의 편지를 인용하며 엄격함을 환기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세잔을 안심하고 붓을 놓을 수 있는 순간, 혹은 카프카가 만족스럽게 죽음의 침상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어떤 순간.

블랑쇼가 말하는 엄격함과 죽음에의 요구가 단순히 만족스러운 어떤 작품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고뇌나 번민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한편으로 그런 차원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한편 작업에 매진하는 엄격함을 작가의 개성이나 표현욕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처럼 가능한 죽음의 순간 또한 작품의 완성과 심리적 만족의 관계만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블랑쇼에 따르면 시는 시인에게 진리나 확실성으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시인인지 모르고, 시가 무엇인지, 시라는 것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시는 철저하게 그에게 달려 있고, 그의 탐구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기묘한 의존관계 속에 시의 자리, 문학의 자리가 존재합니다. 블랑쇼가 차근히, 그러나 힘주어 논하듯 자명한 죽음이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혹은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죽음이 실은 이 세계에 의심할 수 없이 확고한 것처럼 양쪽의 긴장 사이에, 그 틈새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요. 자명한 죽음은 실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어떤 시도도 죽음에 도달할 수 없으며, 죽음에 대한 제아무리 강력한 의지도 죽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에 대한 모든 시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키릴로프와 아리아의 경우처럼 어떤 시도는 의미가 있다고, 의미가 충만하다고 볼 수 있지요. 문학의 공간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확인할 수 없는 죽음이 확고한 방식으로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또한 문학의 공간 역시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어떤 시도가 여타의 죽음들과는 구분되는 모종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문학에 공간에 도달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 역시 모종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가능한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가, 의 이분법적 구분이 아니라 그 틈새에 말이지요. 그래서 블랑쇼는 말합니다. 문학은, 예술은 작품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어떤 정신이라고요. 왜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지 우리 또한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시간은 다시 말라르메를 향합니다.

2018. 10. 19.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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