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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르메의 경험


작가와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작업’이라는 활동의 본질을 다루기 위해 릴케를 소환했던 블랑쇼는 이제 본격적으로 문학의 공간을 구획하기 위해 말라르메를 불러냅니다. 앞 장에서 블랑쇼는 ‘본질적 고독’이라는 개념을 통해 홀로 묵묵히 자신의 작업을 수행하는 작가의 모습,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의 이러한 이미지에서 고독과 몰입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작업자는 작업의 과정에서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떤 것’이 그와 그의 작업에 깊게 관계하고 있음이 드러났고요.

블랑쇼에 따르면 글쓰기는 이 ‘어떤 것’의 부름을 긍정하는 것, 받아들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알 수 없음에도 그것의 부름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것은 일종의 강력한 매혹과도 같습니다. 아니, 일종의 매혹이라기보다 차라리 가장 순수한 매혹 그 자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군요. 좋은 부분도 있고 좋지 않은 부분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끌리고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고, 하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한 사로잡힘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그렇습니다.

블랑쇼는 이와 같은 글쓰기의 매혹을 무한에 대한 매혹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온전히, 완벽하게, 알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매혹 당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마치 현대 경제학의 핵심 전제 가운데 하나인 합리적 행위자 가설에서와 같이, 제한적인 정보를 가지고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행위자라는 모델은 여기에서 전혀 유효하지 않습니다. 블랑쇼가 말하는 매혹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선택, 기준와 선호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성립합니다. 이미 우리는 금지된 대상, 그러므로 자신에게 부재하는 대상을 향하는 것이 욕망의 기본 법칙이라는 것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쓰는 사람은 쓰는 동안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내가 그것을 쓴다는 것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럴수록 글쓰기가 중단 없이 수행될 때, 쓰는 사람과 쓰는 행위와 쓰인 결과물의 관계, 즉 작가와 작업과 작품을 둘러싼 관계는 끝까지 불가해한 것으로 남고요.

이러한 맥락에 따르면 흔히 이야기하듯 자신이 수행한 작업의 결과물로서의 작품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가 아닌, 작업을 매개로 작품에 관계하는 작가의 자리가 드러납니다. 글쓰기는 이 무한한 작업에 자신을 내맡기는 행위이며, 따라서 쓴다는 행위는 무한한 것, 끝나지 않는 것의 매혹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을 의미하고요.

이렇게 보았을 때 문학의 본질에 충실한 작가는 ‘나'에 대한 권리를 상실합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상실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작가는 작품에 대한 권리 역시 주장할 수 없습니다. 작품은 매혹의 흔적이자 불가능의 증거일 뿐입니다. 문학이라는 것이 여기에 있었다, 문학이라는 것이 이렇게 존재한다, 는 확고한 증언일 뿐, ‘어느 작가의’ 작품 내지는 ‘누군가의’ 문학, 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지요. 블랑쇼에 따르면 문학이 드러내는 것은 문학의 이념, 즉 문학 그 자체입니다. 문학에서 드러나는 것 또한 문학 그 자체이고요. 이렇게 블랑쇼는 작품에서 드러나는 것은 오직 문학 그 자체의 이념 뿐이라고 조용히 주장하지요.

자, 문학의 이념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글쓰기의 매혹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발레리가 전하는 말라르메와 드가의 일화에서 출발해도 좋겠군요. 발레리는 드가와의 첫 만남을 1893년 내지는 그 이듬해로 회상하면서, 드가의 작업에 대한 대단히 흥미로운 성찰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발레리의 기록에는 드가의 작품에 대한 내용 외에도 드가에 얽힌 몇 가지 일화들이 함께 등장하는데, 발레리의 스승이기도 한 말라르메와 드가가 어느 날 만나서 주고받은 대화의 장면은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드가는 시 창작, 특히 소네트 창작에 대단한 관심과 열정을 보인 바 있습니다. 가끔은 자신의 본업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보다 더 깊게 열중할 정도였지요. 시 창작에 열중하던 드가는 어느 날 친구인 말라르메를 만나 시 창작이 그에게 야기하는 극도의 고통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소네트에 매달렸는데도 단 한 발자국도 진전이 없었다고 고백하면서, 드가는 하지만 생각이 모자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은 너무도 많다고 언급합니다. 드가의 불평에 대한 말라르메의 대답은 의미심장합니다: “하지만 드가, 시는 생각을 가지고 만드는 게 아니라, 말을 가지고 만드는 거라네.”

잘 알려진 것처럼 말라르메의 작업은 난해하기로 유명합니다. 말라르메라는 이름에는 한편으로 프랑스 상징주의 시학의 상징과도 같은 명성과, 다른 한편 의미 없는 난해함과 겉멋으로 치장한 문장들이라는 악명이 따라붙습니다. 말라르메 사후 발레리가 1933년 1월 파리의 아날 대학에서 말라르메와 그의 작업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을 때, 말라르메와 가장 가까운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발레리조차 ‘아주 희귀하고 읽기 어려운 몇 개의 글’이라는 표현으로 말라르메의 작업을 지칭하며 이야기를 시작할 정도니까요.

블랑쇼가 문학이라는 언어의 고유성을 제시하기 위해 말라르메를 맨 먼저 불러내는 것은 당연하지만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블랑쇼에 따르면 쓰는 자는 끝나지 않는 것과 끊이지 않는 것을 들은 사람입니다. 어쩌면 들어버렸다, 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군요. 앞서 죽음, 문학, 몰입, 매혹 등의 관계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그것을 들었기 때문에 그것에 매혹 당하고, 자신에 무엇에 매혹 당했는지, 자신을 매혹하는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지 못한 채 그것에 몰입하는 것이 곧 글쓰기의 본령이기 때문입니다. 블랑쇼는 끝나지 않는 것, 끊이지 않는 것과 글쓰기의 관계를 말과의 공모에 들어서는 것이라고 제시합니다. 끝나지 않고 끊이지 않는 그것을 말로서 듣고, 그 말과의 공모에 들어서서, 말과의 공모 가운데 자기자신이기를 그치고 말의 요구를 따르며, 그 한계까지 밀고 나가 그 말을 발음하는 것이라고요.

문학의 공간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하며 블랑쇼는 한계에 대한 사유를 첫 머리에서 제시합니다. 말의 한계는 어디일까요? 안타깝게도 언어의 한계 운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의 어휘력 내지는 표현력의 한계, 그러니까 자신의 언어 능력의 한계와 언어 그 자체의 한계를 한심할 정도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실제로 인간은 언어의 한계에 도달할 수 있긴 한 걸까요? 언어의 한계점과 문학의 관계를 살펴보며 블랑쇼는 다시 죽음을 소환합니다. 첫 시간에 우리가 예비적으로 살펴보았던 바로 그 죽음입니다. 블랑쇼에 따르면 시구를 파고 들어가는 사람은 다름 아닌 죽어가는 자이며, 언어의 한계점에서 자신의 죽음을 만나는 자라고 합니다.

… (중략) …

말라르메의 중심에는, 그의 작업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겨냥하고 있는 그 지점에는 가장 순수한 언어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일상의 언어와는 물론 사유의 언어와도 구분되는 절대적인 언어, 순수한 말로서 일상의 언어와는 다른, 불멸의 말로서의 사유 언어로도 그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블랑쇼가 인용하는 편지에서 밝히고 있듯이 ‘순수한 작품에 대한 무시무시한 희망’으로 말라르메는 시구를 한계로 몰아붙입니다. 사유가 아닌 말 그 자체로, 자신의 한계에서 마침내 언어가 스스로 자신을 말하는 그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발레리가 말라르메의 작업을 소개하며 일상의 말이 운문화된 말과 다른 것 만큼이나 시의 내용 또한 일상의 사고와 달라야 한다고 요약하는 것은 어쩌면 말라르메의 이상이 갖는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블랑쇼가 말라르메를 통해 ‘활동적 삶의 움직임을 거스르면서 그 움직임을 전복시키는 것에 만족할 때, 우리는 예술이라는 사태를 너무나도 안이하게 다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날카롭게 언급하듯이, 문학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를 넘어서는 것을 넘어 사유의 언어 마저도 넘어서는 어떤 지점을 가리키고 있으니까요.

자, 글쓰기라는 작업이 갖는 매혹에서 출발해 이제 우리는 블랑쇼가 ‘문학의 공간’이라고 일컫는 모종의 지점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다음 장에서 블랑쇼의 시선은 카프카로 향합니다. 바로 그 카프카로.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8. 10. 5.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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