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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적 고독


오늘 밤은 지난 시간 살펴본 죽음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블랑쇼의 언급에서 출발합시다. 죽음이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자명하고 뻔한 사태를 촘촘히 분석하면서, 블랑쇼는 죽음은 불가능하다, 특히 나의 죽음은 불가능하다는 명제를 제시합니다. 나는 나의 죽음을 확인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죽음과 마주칠 수 없다, 죽음에 한없이 가까이 접근하는 그 순간에도 살아 있는 나는, 살아서 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요. 절대로.

죽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통찰과 정반대로, 블랑쇼에 따르면 죽음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이고 비인칭의 죽음입니다. 나는 절대로 나의 죽음이라는 결과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죽음이라는 나의 행위를 완료할 수 없고 완료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즉 죽음의 본질은 나와 죽음이 동시에 사라져가는 사태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죽음에 도달하고자 하는 기획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기획이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유예입니다. 죽음 속에서 나는 죽음과 함께 사라져가고 있지만 나는 이 사라짐의 완료를 영원히 환수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살아 있는 사람 또한 자신의 죽음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상상하고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을지라도 끝내 그것을 완수할 수는 없으니까요.

블랑쇼는 이 끝나지 않는 과정으로서의 죽음과 문학의 공통점을 간파합니다. 블랑쇼가 일컫는 죽음은 존재의 고통 운운하는 거짓 예술가의 착란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술 창작의 과정이 죽음과 닮았다는 시시한 이야기도 물론 아닙니다. 블랑쇼가 날카롭게 간파한 사실은 예술가와 작업(작품) 사이의 기이한 관계가 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인간이 죽음과 맺는 관계와 닮아 있다는 점입니다. 둘 다 강고한 의지로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지만, 어떤 심사숙고와 결연한 행위도 자신의 완료를 환수할 수 없다는 사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어떤 방식으로 결말과의 관계가 강제되어 있는 이 사태가 바로 문학이라는 것이지요.

<문학의 공간>에서 블랑쇼는 여러 작가와 작품들을 소환하며 문학의 본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맨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릴케입니다. 릴케의 편지 가운데 한 구절을 인용하며 블랑쇼는 작품의 기원, 즉 작업 속에서 일어나는 사태가 무엇인지 밝히고자 합니다. 1907년 8월 3일 솔름즈 라우바흐 백작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릴케는 몇 주 전부터 두 번의 짧은 멈춤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있다고, 완전히 밀폐된 과일의 씨앗처럼 자신은 고독한 작업 속에 있다고 적었습니다. 블랑쇼에 따르면 릴케가 고백하는 고독은 본질적으로 고독이 아닙니다. 살면서 가장 길게 말을 하지 않았던 적이 언제인지, 얼마 동안인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간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몇 주 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상황은 퍽 드문 일이겠지요.

고독은 본질적으로 홀로 있음을 의미합니다. 릴케가 그랬듯이, 대체로 작업의 순간은 작가 혼자만의 내밀한 시간이라고 여겨지기 쉽습니다. 릴케가 작업의 고독을 이야기할 때, 블랑쇼는 릴케가 과연 정말 홀로 있는가에 주목합니다. 릴케는 글을 씁니다. 과일의 씨앗처럼,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그의 내면을 이해할 지기는 고사하고 지인의 왕래조차 극히 드문 일입니다. 이따금 필요에 따라, 상황에 따라 편지를 주고받는 경우가 고작이지요. 이쯤이면 그냥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치부하기도 어렵겠고, 누가 봐도 퍽 고독한 상황이라고 인정할 법합니다.

하지만 블랑쇼의 생각은 다릅니다. 릴케는 혼자가 아닙니다. 릴케는 작품과 함께 있으니까요. 앞서 언급한 죽음의 기획과 문학이 공유하는 지점을 상기해보시기 바랍니다. 릴케는 분명히 무언가와 함께 있습니다. 무엇인가와 함께 있는데, 그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한정될 수 없으므로, 무한한 어떤 것이라는 것만 간신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작품을 쓰는 자는 작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블랑쇼가 거듭해서 말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블랑쇼가 작품의, 문학의 무한성을 강조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성찰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위대함을 과장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문학의 무한성은 작품을 쓰는 자를 작품에 연루시키면서도 작품을 쓰는 자에게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어떤 것으로서의 문학의 본질로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문학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영원히 명석판명하게 밝혀질 수 없다는 사태, 즉 무엇인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무엇인 어떤 것으로 존재할 것이다, 라는 사태로 말이지요.

물론 작업에는 물리적인 끝이 있을 겁니다. 어느 순간 회랑이나 응접실에 작품이 걸리는 순간이 있겠고, 인쇄기를 통과한 종이 뭉치가 책으로 묶여 독자의 책상 위에 도달하는 순간이 있을 겁니다.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이 그에 앞서 있을 테고, 작품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오가는 순간과 명예나 불명예를 획득하는 순간도 있을 겁니다. 쓰레기통이나 폐지 뭉치로 돌아가는 상황 또한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타의 상품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와 작품의 그것이 구분되는 지점은 무엇일까요? 어느 신발짝과 꽃병의 운명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요?

작품의 의미를 그것의 완결성이나 여러 차원의 미적 가치로 제시하는 여타의 관점과 달리, 블랑쇼는 문학이라는 무한성을 기준으로 작품의 의미를 제시합니다. 이 무한성 속에서 작품을 쓰는 자는 자신이 수행하는 작업임에도 작업의 주인임을 자처할 수 없습니다. 이 무한성은 작업을 마친 작가를 작품 바깥으로 쫓아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지닌 무한성이 닫히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이 말하는 것은 다름아닌 작품이 존재한다는 사태 그 자체니까요. 무한한 것으로서의 작품 그 자체는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좀 더 살펴볼까요? 블랑쇼는 작가의 손에서 일어나는 거의 가학적인 붙잡음을 언급합니다. 연필을 손에 쥐고있는 사람이 그것을 놓고 싶어도 손이 연필을 놓아 주지 않는 경우를. 오히려 손이 연필에 붙들려 있다고 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태가 어떻게 가능할까요? 릴케는 몇 주 동안 한마디 말도 없이 무얼 하고 있던 걸까요? 블랑쇼는 이러한 사태를 매혹이라고 일컫습니다. 우선은 글쓰기의 매혹. 능동적이고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의지를 지닌 활동으로서의 글쓰기가 아니라, 쓰지 않고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것에 대한 매혹부터 살펴봅시다.

다시 돌아가볼까요. 그러므로 이 매혹은 무한에 대한 매혹입니다. 내가 온전히, 완벽하게, 알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부터의 매혹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에서 프로이트나 라캉을 소환해 촘촘한 논증을 펼쳐 보이기는 어렵겠지만 욕망이 작동하는 기본 원리와 동일합니다. 금지된 대상, 그러므로 자신에게 부재하는 대상을 향하는 것이 욕망의 기본 법칙입니다. 눈에 뻔하게 보이고 자명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태를 ‘강제로 연필에 붙잡힌 채' 기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설령 쓰고자 하는 것에 대해 완벽에 가까울 만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상상한다 치더라도 그렇다면 그것을 왜 쓰는가, 왜 그것을 쓰는가, 라는 물음은 오히려 그럴수록 불가해한 것으로 남습니다.

따라서 작품이 작가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에 속합니다. 블랑쇼에 따르면 쓴다는 행위는 무한한 것, 끝나지 않는 것의 매혹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문학의 본질에 충실한 작가는 ‘나'에 대한 권리를 상실합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상실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작가는 작품에 대한 권리 역시 주장할 수 없습니다. 작품은 매혹의 흔적이자 불가능의 증거일 뿐입니다. 문학이라는 것이 여기에 있었다, 문학이라는 것이 이렇게 존재한다, 는 확고한 증언일 뿐, ‘어느 작가의’ 작품 내지는 ‘누군가의’ 문학, 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지요. 블랑쇼에 따르면 문학이 드러내는 것은 문학의 이념, 즉 문학 그 자체입니다. 문학에서 드러나는 것 또한 문학 그 자체이고요. 죽음, 무한, 불가능, 매혹, 블랑쇼가 문학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 제시하는 핵심 개념들과 문학의 관계가 조금씩 보이신다면 좋겠는데요.

이번에는 글쓰기의 매혹에서 한걸음 나아가 봅시다. 블랑쇼가 제시하는 것은 부재하는 시간의 매혹입니다. 엄밀히 말해 우리 세계의 물리 법칙에서, 특히나 인간의 어떤 행위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라면 시간의 부재라는 개념은 어불성설입니다. 하지만 블랑쇼는 이번에도 조용히 상식에서 비켜섭니다.

… (중략) …

블랑쇼는 글쓰기를 매혹이 위협하는 고독을 긍정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이 고독 속에서 시간은 정지한다기보다 차라리 사라집니다. 그에 따르면 영원한 새로운 시작만 있을 뿐인 시간의 부재 속에서, 언어를 매혹 아래에 두는 것이 바로 글쓰기의 본질입니다. 무한과 매혹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에 이어 이제 블랑쇼는 무한이 이끄는 매혹, 매혹이 이끄는 글쓰기의 예시로 말라르메를 소환합니다. 무한과 언어의 관계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무한한 것을 어떻게 언어로 만들 것인가, 혹은 언어를 어떻게 무한하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언어로 무한성을 어떻게 포착하고 제시할 것인가, 라고 여러 차례 바꾸어 물어도 좋습니다. 말라르메를 호명하며 블랑쇼는 말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다시 던집니다. 돌아오는 밤 우리가 함께 풀어볼 문제이기도 하고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8. 9. 28.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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