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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정체성>


오늘 밤 이야기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입니다. 쿤데라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중간중간 눈길을 끄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만 우리는 우선 샹탈과 장마르크에게 초점을 맞춰봅시다. 이야기의 큰 줄기를 따라서요. 소설의 등장 인물인 샹탈과 장마르크는 연인입니다. 두 사람은 파리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느 여름, 샹탈과 장마르크는 노르망디 해변으로 휴가를 떠납니다. 샹탈이 장마르크보다 하루 먼저 도착했고, 장마르크는 이튿날 정오쯤 그곳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샹탈은 장마르크를 기다리며 잠시 호텔 앞 해변가로 산책에 나섭니다. 해변을 거닐며 주위를 둘러보다 문득 그녀는 모든 남자들이 ‘아빠’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배우자와 함께 유모차를 밀고 가는 남자, 혹은 아이를 둘러업고 가는 남자, 아이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하는 남자들 사이에서 말이지요. 그렇지 않은 남자들은 바닷가에서 연을 날리거나 하면서 자기들끼리 놀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지나가는 여자에게, 또 샹탈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자신들만의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샹탈은 생각합니다. 세상에 오로지 ‘아빠’라는 종류의 남자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고요. 이미 아빠가 되어버린 남자들과, 가족으로부터 해방된 아빠들.

호텔로 돌아온 샹탈은 장마르크를 만납니다. 혼자 보낸 하루의 휴가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샹탈은 왠지 모를 서글픔을 감추려고 일부러 명랑하고 짐짓 가볍게 말합니다. 이제는 거리에서 아무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 같다고요. 그런데 이 말을 내뱉는 샹탈의 목소리에는 자신도 모를 쓸쓸함이 묻어납니다. 자신도 미처 몰랐던 감정이 목소리에서 드러나자 샹탈은 당황합니다. 어쩌면 이제 아무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그녀가 마음 깊숙한 곳에 묻고 외면했던 어떤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장마르크가 언젠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지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샹탈은, 그녀가 장마르크보다 몇 살쯤 나이가 더 많다는 사실 때문에 언젠가 그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둘째 치고 샹탈의 말에 정작 더 놀란 사람은 장마르크였습니다. 장마르크는 ‘그러면 나는 뭐야? 나는 당신이 어딜 가나 당신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데, 당신은 당신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 남자들을 생각하다니 그게 말이나 돼?’라고 샹탈에게 되묻습니다. 샹탈은 한편으로 자신을 감싸는 장마르크의 목소리에 안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당황스런 마음을 그에게 들킬까 염려하지요.

파리로 돌아온 뒤 장마르크는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작은 장난을 준비합니다. 그녀가 여전히 다른 남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확신을 그녀에게 돌려주기 위해, 장마르크는 샹탈 앞으로 익명의 편지를 슬쩍 보낼 계획을 세웁니다. 어느날 샹탈은 우편함에서 우표나 소인도 없는, 짧은 문구만 적힌 편지를 한 통 발견합니다: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닙니다. 당신은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편지를 확인하고 놀란 샹탈은 혹시 잘못 온 편지는 아닐까, 누가 보낸 편지일까 잠시 고민하다가 서둘러 편지를 없애려 합니다. 하지만 고민 끝에 편지를 속옷장 속에 감추어 두는 편을 택하지요. 이들의 위험한 장난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다시 노르망디로 돌아가봅시다. 샹탈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 장마르크는 호텔에서 샹탈을 찾습니다. 호텔 직원에게 그녀가 잠시 외출했다는 안내를 듣자 그녀를 찾아 거리로 나서지요. 장마르크는 거리를, 해변을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샹탈을 찾습니다. 하지만 다가오는 인파들과 교차하며 장마르크는 비슷한 체형, 비슷한 머리칼, 비슷한 걸음걸이들 속에서 몇 번이고 샹탈을 오인합니다. 멀리서 샹탈이라고 생각했던 여인은 가까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다 마침내 다른 엉뚱한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그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오해할 수가 있을까요? 샹탈은 장마르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데요. 글쎄요, 거꾸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사랑하기 때문에, 애타게 찾고 있기 때문에 멀리서 다가오는 누구에게서든 자신이 찾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장마르크가 샹탈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모습들, 그녀의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던 모습들은 번번이 장마르크의 생각을 벗어납니다. 저 걸음걸이는 샹탈과 비슷한데, 저 머릿칼은 샹탈이 아닌가 싶어 상대방을 유심히 보면서 다가가노라면 이내 샹탈이 아닌 엉뚱한 사람이 점점 더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면서요.

소설가가 붙인 이 이야기의 제목은 ‘정체성’입니다. 쉽게 생각했을 때 외모나 신체적인 특징은 누군가의 개성이나 특징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요소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은 그의 외모만을 통해 알 수 있는 일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누군가를 그 사람으로 알아볼 수 있을까요? 매번 바뀌는 옷차림을 통해? 아니면 표정이나 얼굴을 통해?

다시 소설 속 장면을 살펴봅시다. 장마르크는 종종 샹탈의 퇴근 시간에 맞춰 그녀를 만나러 가곤 합니다. 그때마다 그가 느끼는 것은 일종의 당혹감이지요. 사무실에서 나오는 샹탈의 표정과 말투와 몸짓과 분위기가 자신이 사랑하던 그녀의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장마르크는 그녀와 다시 만나 한참을 시간을 보낸 뒤에야 샹탈이 자신이 사랑하던 그 사람이라는 느낌을 회복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한참의 시간을 함께 보낸 뒤에야 샹탈이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고요. 마치 두 얼굴을 가진 사람처럼, 이런 상황 속에서 장마르크는 매번 샹탈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그 사람이 아닌 낯선 사람을 만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샹탈은 장마르크에게 자신이 두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항변합니다.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지만 원하는 삶을 위해 해내야만 하는 일들 속에서, 두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요. (물론 장마르크 역시 그녀의 사정을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샹탈에 따르면 그녀의 웃음은 장마르크를 위한 것이지 광고회사의 속물들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그녀가 두 얼굴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덧붙이지요. 자신은 두 얼굴을 가질 수 있지만 동시에 두 얼굴이 될 수는 없다고. 여기에서 다시 생각해봅시다. 전혀 다른 두 모습은 모두 샹탈의 모습입니다. 이 중 어느 하나를 가짜라고, 샹탈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두 얼굴, 혹은 여러 얼굴을 갖는 것이 그녀의 얼굴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이 두 얼굴을 포함하는 진짜 다른 모습이 샹탈의 본래 모습일까요?

정체성의 문제는 외모나 신체적 특징처럼 선명하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요소보다 누군가의 가치관이나 세계관 따위의 문제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흔히 ‘성격’이라고 일컫는 문제지요. 장마르크를 만나기 전 샹탈은 한 차례 결혼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샹탈은 그를 사랑했지만, 그와 그의 가족이 지닌 ‘공동체적인’ 생활은 진절머리가 날 만큼 불편하게 느꼈지요. 샹탈은 자신의 정체성이 온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그 울타리 속에서의 삶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이를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조화롭게 그들과 지낼 수 있었습니다. 드러내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 또 그녀의 이런 생각이나 감정들을 드러내지 않아야만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테지요. 때로 화장실에서 원치 않는 타인의 흔적 앞에 강제로 노출되거나, 시누이 부부가 온 가족들이 들으라는 듯 침대에서 교성을 질러 댈 때 역시 샹탈은 자신을 잘 감출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까지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죽었을 때, 온 가족들은 그들 부부에게 다시 아이를 낳으라고 종용합니다. 그래야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하면서요. 하지만 샹탈에게 중요한 것은 ‘잊는 것’이 아니라 ‘잊을 수 없는 것’,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샹탈은 깨닫지요. 자신이 더 이상 그들과 지낼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실행. 그녀는 조용히 이주를 준비합니다. 더 많은 소득을 찾아 직장을 옮기고, 살 집도 알아보고.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난 뒤 집을 나간다고, 그들을 떠난다고 밝혔을 때, 시누이는 적개심 섞인 경탄을 품고 그녀에게 ‘암호랑이’라고, ‘꼼짝도 하지 않다가 일격을 가했다’고 말합니다. 시누이의 눈에는 샹탈이 정말 그렇게 비쳤지 않을까요? 만족스런 가족의 구성원인 것처럼 수년 간 모두를 속이다가, 갑작스레 뒤통수를 친 것처럼 말이지요. 역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장면 아닐까요? 와 그 사람 그럴 줄 몰랐는데 알고 봤더니, 하는. 혹은 그 사람 그런 면이 있는 줄 몰랐네, 하는. 그리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지요.

샹탈이 전 남편과 헤어진 뒤 몇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시누이는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불쑥 샹탈의 아파트를 찾아옵니다. 샹탈은 자신의 오빠와 이혼했을 뿐, 우리 가족은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요. 심지어 샹탈과 장마르크를 가족 식사에 초대하기도 하지요. 견딜 수 없었던 기억을 회상하며 샹탈은 시누이를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함께 있던 장마르크가 멋쩍을 만큼, 거의 쫓아내듯이요. 그리고 다시 깨닫습니다. 자신이 예전에 이 아파트를 산 것은 자유롭고, 염탐 당하지 않고, 자신의 물건이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샹탈이 남편의 가족들과 한 집에서 생활했던 결혼 기간 동안, 또 샹탈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장마르크와 함께 살았던 시간 동안, 진짜 그녀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원치 않는 모습을 연기했던 그녀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 위에서 살아갑니다. 그가 살아온 시간 동안 겪어온 경험과 생각들, 느낌들이 모여 그의 정체성을 이루겠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정체성은 생의 총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경험의 경향과 축적된 총체성이 판단과 행동의 일관성을 만들고, 이러한 일관성이 체계화하여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체성이란 토대는 실은 그리 단단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 자신이 믿고 있는 방식에서든, 아니면 타인이 그를 바라보는 방식에서든지요. 누군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그의 모습과 다를 수 있고, 그가 실제로 지닌 어떤 특징들은 그가 원하는 자신의 모습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에는 누군가의 삶은 물론 그를 둘러싼 기만과 과장, 가장과 왜곡, 그의 자랑과 수치가 한 덩어리로 얽혀 있지요.

정체성의 민낯을 직시하는 것은 어쩌면 깨나 불편한 일일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위기의 순간들은 일상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감췄다고 생각했던 속마음이 누군가에게 들통나는 뜨끔한 상황이나 어떤 계기를 통해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는 상황들처럼 말이지요. 위기의 징후들입니다.

소설의 도입부로 돌아가봅시다. 호텔로 돌아와 장마르크에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는 샹탈은 생각보다 자신의 목소리에 쓸쓸함이 배어나자 당황합니다. 어떤 경험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강렬한 자극을 남기기도 하고, 이럴 때 가장 내밀하게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신체조차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기도 합니다. 목소리의 떨림과 작은 털 하나가 곤두서는 신체의 움직임조차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면, 자신의 신체를 대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자아가 내 몸의 주인은 나야, 이 몸은 나의 것이야, 라고 말할 때 신체는 그런 자아를 소리 없이 비웃을지도 모르지요.

장마르크는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영리한 청년이었던 그는 직업 선택의 중요성을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몇 가지 직업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검사라, 남들을 박해하는 데 일생을 보낼 뿐이고. 학교 선생? 버릇없는 아이들로부터 내내 고통 받을 것이 뻔하고. 공학 분야로 가볼까? 기껏해야 작은 편의에나 기여할까 엄청난 재난의 가능성만 키우는 일인 것 같은데. 그럼 인문학은? 공허하고 궤변으로 가득 찬 수다만 늘어놓는 것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을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낱낱이 검토한 뒤 그가 선택한 직업은 의사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의학이야말로 인간에게 유용하고 기술 발전에 따른 폐해가 적은 이타적인 분야였으니까요. 장마르크는 의대에 진학합니다. 하지만 그는 머지 않아 자신의 진로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학년 해부학 수업에서 그는 자신이 시체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요. 그 전까지 벌거벗은 사람 시체를 볼 일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자신이 시체를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알 방법이 없었겠지요. 기껏 숙고 끝에 결정한 선택과 자신의 정체성이 웃으며 빗겨 지나가는 순간입니다.

자 다른 장면을 한 번 볼까요. 파리로 돌아온 장마르크는 샹탈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어딘가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흠모하는 익명의 고백자를 가장하여. (요즘 한국 같은 분위기라면 어쩐지 위협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군요.) 샹탈은 장마르크가 농담처럼 보낸 편지에 따라, 자신이 평소 싫어했던 빨간 목걸이를 기꺼이 목에 걸고 길을 나섭니다. 누군지 모를 편지의 주인공, 그녀가 마음대로 이름 붙인 ‘뒤바로’로부터 빨간색이 자신과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서는, 좋아하지도 않던 빨간색 잠옷을 산 뒤 빨간 잠옷 차림으로 장마르크를 유혹하기도 하지요. 뒤바로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혹시 언제나 자신이 자주 다니는 길가에 몸을 숙이고 있는 걸인이 아닐까 마음에, 그가 자신에게 적선을 바라며 손을 내밀 때 무려 200프랑(한화 25만원쯤 될까요?) 지폐를 꺼내기도 합니다. 샹탈이 붉은 잠옷으로 장마르크를 유혹했던 그날 밤 이들이 함께 침대에 쓰러졌을 때, 샹탈과 함께 있는 이는 뒤바로일까요, 장마르크일까요?

샹탈과 장마르크가 함께 대화나눌 때, 이들은 종종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듭니다. 서로 공유할 수 없는, 자신만의 내밀한 생각들 속으로요. 누군들 안 그렇겠습니까. 마주 보고 둘러 앉은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저마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공유하지 않는 생각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같은 자리에 앉아 저마다의 세계로 빠져들어가는 이들, 같은 대화, 같은 낱말에서 다른 이념을 떠올리는 이들의 관계에서 이들의 정체성은 서로 마주 앉은 자리에 있을까요, 아니면 홀로 떠올리는 세계 속에 있을까요?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어긋나거나 엇갈리는 것 없이 누군가의 정체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장마르크의 장난과 샹탈이 편지들을 숨겨 왔다는 것이 드러난 그날 밤, 마주 앉은 둘은 침묵 속에서 짧게 식사를 마칩니다. 그리고 샹탈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지요. 잠들 수 없었던 장마르크가 샹탈의 방문 앞에서 귀를 기울였을 때, 그가 들은 소리는 언제나 바로 옆 가까이에서 들었던, 잠든 샹탈의 숨소리였습니다. 그리고 깨닫지요,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자신이 스스로에게, 샹탈에게 부여했던 정체성은 사랑이 작동하지 않는 순간 사라진다는 것을. 혹은 관계에 가려졌던 정체성이 모습을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이리저리 교차하던 정체성의 균열이 드러나는 순간. 이들이 우리에게 고민을 던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 (후략)

2018. 8. 14.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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