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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 매리언 영, <차이의 정치와 정의>


정치학에서 영이 주로 관심을 기울인 영역은 정치철학입니다. 정치철학은 전통적으로 국가 권력의 기원, 공동체와 구성원의 관계, 정부의 합법성과 통치의 정당성, 평등과 자유 등 정치적 가치의 문제, 정치와 윤리의 관계 등을 다루어 왔습니다. 근대 정치체의 구성에 관련한 이론적 기틀이 홉스, 루소, 로크 등의 사회계약론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면, 실제로 근대적 의미의 정치철학은 공리주의의 등장과 함께 시작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전까지의 정치철학이 주로 공동체의 구성이나 통치의 원리에 관련한 내용을 다루었다면 공리주의는 본격적으로 공동체의 의사결정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지요.

공리주의 이전의 정치철학이 주로 가치나 관념의 수준에서 논의를 풀어나갔다면 공리주의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봅니다. 즉 전통적인 정치철학이 선험적인 차원에서 정치의 문제를 다루었던 반면 공리주의는 경험적인 차원에서 정치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지요. 공리주의는 단순히 국가의 기원과 발생, 또는 통치의 기준으로서의 법의 의미, 또는 자유, 평등, 인권, 경제성장 등 가치들의 위계를 묻지 않고, 어떠한 정치적 판단, 즉 공동체의 의사결정이 그 구성원의 실질적 효용(utility)을 증진시킬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여기에서 도출되는 기준이 저 유명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지요.

처음 등장 이후 그것의 한계에 대한 많은 비판적 논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는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의사결정의 준거점으로서 강력한 편의와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럿이 무언가를 결정할 때 끝까지 의견차를 좁히지 못한다면 결국 다수가 원하는 방향, 즉 더 많은 수의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현대 국가에서 역시 정책의 입안과 집행의 중요한 기준으로 다수성과 효용을 배제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현대 정치철학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을 롤즈는 자신의 사상을 공리주의 비판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롤즈는 아주 직관적인 수준에서부터 공리주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 말은 그럴듯하지만 롤즈는 실제로 그 규칙을 누군가에게 적용한다면 어떨지 묻습니다. 이를 테면 당신한테요. 당신을 포함해 다섯 사람이 함께 여행을 가는데, 다수결에 의해 여행경비를 당신이 모두 부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당신은 물론 손해를 보고 불쾌하겠지만 나머지 네 사람은 공짜 여행으로 싱글벙글 크게 즐거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결과적으로 다섯 사람이라는 집단 전체의 효용을 따져본다면, 전체 비용을 공평하게 각출하는 방식이나 각자가 사용한 비용을 각자가 내는 방식에서 발생하는 효용의 크기보다 당신이 불행하지만 나머지 네 사람이 크게 행복할 것이기 때문에 공리주의에 따르면 이러한 판단이 ‘올바른’ 판단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물론 공리주의의 관점에서는 이 문제를 부당한 처우를 당한 한 사람이 겪을 불행의 총량이 나머지 네 사람의 행복의 양보다 크기 때문에 이러한 판단은 올바르지 않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과 같이 경제적인 방식으로 셈할 수 없는 가치의 문제라면 어떨까요? 이를 테면 당신을 포함해 일곱 사람이 타고 있던 배가 바다 한복판에서 갑작스레 침몰하는 상황에서, 구명조끼는 여섯 개밖에 없는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구명조끼를 포기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질문을 조금만 바꾸면 문제는 더 복잡해집니다. 구명조끼를 포기할 사람은 누구여야 합니까? 아마 다양한 대답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나이나 앞으로의 가능성, 생존 확률, 집단에 대한 기여도, 제비뽑기 등 많은 방법이 있겠지요.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몫을 희생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있겠지요. 하지만 ‘여섯 사람이 살기 위해서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공동체의 원칙으로 채택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누군가 자신을 희생해서 나머지 사람을 살리는 행위나, 누군가 한 사람은 구명조끼를 입을 수 없다는 당면한 사실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 원칙을 우리가 정당하다고 채택하는 순간 우리는 집단의 이익을 명분으로 개인에게 무제한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공동체, 그것이 정당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공동체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이러한 원칙을 채택한 공동체가 공동체로서 유지가 가능하긴 할까요?

롤즈는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공정으로서의 정의’라는 자신의 원칙을 주장합니다. 정의는 이익이나 효용이 아닌 형평성과 공정성이라는 기준으로 다뤄야 하는 문제라고 보면서요. 롤즈가 제기하는 정의 두 원칙이나 원초적 입장에 대한 논의는 오늘은 잠시 괄호에 넣어둡시다. 롤즈 이후로 이러한 정의관에 대한 비판 역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롤즈를 계승해서 ‘자유적 평등’을 주장한다고 볼 수 있는 드워킨이나, 롤즈가 <정의론>를 발표하자마자 강력하게 비판했던 노직, 의사소통의 과정이나 의사결정의 구조에 관한 롤즈와 하버마스와의 논쟁도 생각해볼 수 있겠군요.

어쨌거나 롤즈를 기점으로 현대 정치철학의 주요 관심사는 정의의 문제로 이행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의 핵심에는 재화의 분배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롤즈에 따르면 공정으로서의 정의란 무엇보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경제적, 사회적 재화에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을 의미하고요. 이렇게 자유에 대한 평등한 접근 가능성과 기회의 균등을 주장하는 롤즈는 결과로서의 정의가 아닌 원칙과 과정으로서의 정의에 우선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구성원들이 출발선상에서 평등한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면 결과로서의 불평등은 용인 가능한, 심지어 용인해야만 하는 것이 되니까요.

영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합니다. 분배를 중심으로 한 정치철학의 정의 담론은 결국 모든 문제를 경제적 보상에 관련한 문제로 치환하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공동체의 문제들을 축소하고 은폐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비판하면서요. 또 영에 따르면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작동하는 지배와 배제의 문제는 분배라는 기준에 선행하기 때문에 분배적 정의로는 결과적으로 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나아가 분배에만 초점을 맞춘 정의관은 사회적 자원이나 사회적 관계 전반을 물화(reification, verdinglichung)시키는 경향까지 갖는다고 비판합니다.

다양한 이야기를 전개는 영의 주장의 핵심에는 ‘정치적 책임’이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영의 사후에 출간된 유작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에서 영은 아렌트를 계승하면서 ‘죄’와 ‘정치적 책임’을 구분할 것을 제안하지요.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유대인 강제 호송에 ‘무지(ignorance)’라는 방식으로 적극 가담한 아이히만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에 따르면 재판정에서 유대인 학살에 관련해서 ‘나는 몰랐다’를 강변하는 아이히만, ‘관료로서 어쩔 수 없었다’고 자신을 변론하는 아이히만은 명백하게 유죄라고 볼 수 있지요. 아이히만은 전쟁범죄에 관련한 법적 책임은 물론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으로부터 역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인 대학살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나치에 수동적인 지지를 보낸 ‘나머지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재판정에 서지 않았다고 이들 모두가 전적으로 결백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직접 학살에 가담하지 않았으니 도덕적으로 괴로울 까닭도 없는 것일까요? 영은 후자의 경우 우리가 그에게 물어야 할 것은 도덕적, 법적인 책임과 구분되는 정치적 책임이라고 말합니다.

영에 따르면 법적 책임은 특정인을 어떤 행위나 사건의 책임자로 고발함과 동시에 그 잘못을 그에게 한정하는 효과를 낳습니다. 즉 누군가의 책임이 밝혀진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로 인해 책임을 면제받는 효과를 낳는 것이지요. 따라서 공적 영역에서 법적 책임에만 강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공동체성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영은 법적 책임과 다른 정치적 책임이라는 이념을 공적 영역에 도입하기 위해 ‘사회적 연결’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에 따르면 어떤 상황에서 잘못을 범한 특정인을 찾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상황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테면 옆집에 유대인이 살고 있다고 당국에 신고한 주민도 연행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심지어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 역시 유대인을 수용소로 싣고 달린 석탄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지요.

물론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정치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잎새에 바람만 일어도 괴롭겠지요. 역설적으로 정치적 책임은 모두에게 책임을 묻기 때문에 오히려 책임을 면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조금 어려운가요? 특정 주체를 책임의 당사자로 호명하는 법적 책임은 나머지로부터 그를 분리시켜 책임을 그에게 한정합니다. 반면 책임의 당사자로 특정인을 호명하는, 즉 책임 주체를 나머지로부터 분리해 한정하지 않는 정치적 책임은 책임의 대상이 되는 상황이나 사건 앞에서 모두가 동일한 책임을 갖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책임에 관해 모든 사람은 동등한 자리에 서게 되고 누군가를 책임의 주체로 특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 (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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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남녀 불문 유명 인사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공표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젠더와 관련한 문제의 상당수는 과거와 비교했을 때 분명 나아진 면면들이 있을 겁니다. 요즘이라면 여성이기 때문에 딸이 대학에 가지 못하게 반대하는 부모를 찾아보기는 어렵겠지요. 결혼 전부터 가사노동은 무조건 여성의 몫이라는 생각을 가진 남성이 있다면 배우자를 찾기가 그리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요? 딸을 대학에 보내는 부모의 마음에는 교육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지위 내지는 권리라는 관점보다는 막연하게나마 대학은 누구나 당연히 나와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 혹은 적당히 좋은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딸을 시집보낼 때 유리하리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결혼을 앞둔 신혼부부의 마음속에는 가사노동은 물론 부부가 함께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여성이 전담하고 남성이 돕는 방식 정도가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은연중에 묻어 있을지도 모르지요.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많은 것들이 제자리에 있거나, 혹은 더 은밀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거나 어떤 때는 그 자신마저도 속이는 방식으로요. 이를 테면 남자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사회생활에 성공하기 위해서고, 여자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결혼에 성공하기 위해서다, 와 같이, 누구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당당히 공표하지 못하지만 ‘그런 게 아니겠냐’ 정도로 은밀하게 생각하는, 또는 가사노동이야 부부가 동등하게 분담하는 게 맞겠지만 그래도 가족들 보는 눈도 있고 남자가 사회생활 하느라 고생도 더 많이 하는데 여자가 조금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게 좋지 않겠냐, 와 같이, 누구도 ‘이것이 옳다’고 선언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이쪽이 좋지 않겠냐’ 정도로 속으로 생각하는 것처럼요. 지난 밤 담론적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살펴보았듯이 젠더를 둘러싼 권력 역시 대개 누군가 권력을 행사하고 누군가 억압의 대상이 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역할과 지위를 배정하고 저마다의 자리를 분배하는 담론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진전은 더디고 개선은 어렵습니다.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때로는 문제가 무엇인지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단순히 사람들의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거나,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다고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습니다.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더디고 힘들고 복잡한 문제들도 있겠지만, 의외로 많은 문제들이 쉽고 단순하고 자명한데도 풀리지 않고 사람을 구속합니다.

젠더에 관련한 문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번의 밤 동안, 몇몇의 입장과 이론들을 함께 살펴봤지만 구체적인 현실로 문제를 끌어당기면 복잡한 논의가 무색할 만큼 선명한 문제들이 태반입니다. 똑같은 직장에서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성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파악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단지 임신과 출산의 최종 과정의 당사자라고 해서 임신과 출산으로 여성의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굳이 대단하고 거창한 사고가 필요합니까? ‘일반적인’ 경우 남성이 여성보다 신체적으로 더 많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해서 이를 근간으로 무수한 불평등을 내포하는 현실의 사회제도들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무슨 복잡하고 정교한 논리가 필요하겠습니까.​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부조리와 부정의를 파악하는 것이 그리 대단하고 거창한 일이 아니라면 역설적으로 문제는 비로소 어렵고 복잡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자명한데 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왜 달라지지 않을까? 왜 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될까? 사람들이 모두 다 멍청하기 때문이라는 쉬운 대답도 물론 가능하겠지만 문제의 해답은 그것보다는 조금 더 까다로운 것 같습니다.

이 문제가 정말 그렇게 개선하기 어려운가? 고치기 너무 복잡한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쉬워 보이는 이면에 다른 힘들의 관계가 놓여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세히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무언가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힘을 분산시키거나 굴절시키는 모종의 작용이 있는 것이 아닐까, 당장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지만 드러나지 않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와 같이요.

가벼워 보이는 작은 자갈 하나를 발로 툭 찼는데 돌멩이가 꿈쩍도 않는다면, 사실은 엄청 무겁다거나 바닥에 깊게 박혀 있다거나 어딘가에 붙어 있다거나 내가 헛것을 보고 헛발질을 하고 있다거나 어떤 것이든 무엇이든 모종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자명한 불평등의 역사가 길었다는 것은 단순한 자명함 이면에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질기고 강인한,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 만큼 끈덕지고 은밀한 힘이겠지요.

인간을 얽매는 이 힘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인간을 속박하는 자유의 굴레를 발견하고 극복하기 위해, 이 지난한 탐사를 위해 우리는 몇 가지 도구를 간신히 챙겨 들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페미니즘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사유와 실천의 지평 따위들이지요. 흔히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성에 관련한 속성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지, 서구의 근대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주체 개념은 어떤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는지, 윤리와 정의에 대한 대안적 사고는 어떻게 가능한지,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보편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억압했는지, 법적 책임이 갖는 한계와 정치적 책임의 가능성은 무엇인지에 이르기까지, 몇 가지 가능성에 기대서 내일을 전망하고 더듬으면서 앞으로 조금 더 가봅시다. 조금 더 앞으로.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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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 30. / 무중력지대 성북 info@labyrinth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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