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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2: 프루스트와 카프카


지난 시간 <이야기꾼>을 통해 벤야민의 서사 이론을 살펴봤지요. 또 소설이라는 형식과 이야기 그 자체의 관계에 대한 벤야민의 생각도 함께 다뤘습니다. 비록 벤야민은 전통적인 이야기의 방식이 소설의 그것으로 바뀌는 과정을 (이야기가 처한) 일종의 위기 상황으로 진단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라는 매체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이야기의 위기를 진단하는 벤야민의 관심은 이야기를 둘러싼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같은 시대 등장했던 소설들에 누구보다 예민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으니까요.

프루스트와 카프카의 작품은 벤야민이 관심을 보인 대표적인 소설입니다. 특히 프루스트에 대해서라면 각별한 관심을 보였지요. 프루스트의 작품에 대한 많은 노트를 남기기도 했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직접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으니까요. 숄렘에게 보낸 편지에서 벤야민은 프루스트의 작업에서 자신과 친화적인 면을 느꼈다고 밝히기도 합니다. 벤야민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원리를 기억과 서사적 기억, 회상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프루스트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프루스트야말로 어떤 소설가보다 기억이라는 문제에 깊이 천착한 작가이며, 프루스트의 작품 또한 전적으로 기억과 이야기하기의 관계 속에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중략) …

카프카의 작품을 향한 비평은 종종 카프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춥니다. 작가와의 관계를 통해 작품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사실 그리 특별할 것도, 또 단순히 잘못이라고도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라면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 뒤로 사라지는 사람이라는 플로베르의 발언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자산재보험공사'에서 법률가로 근무하며 카프카가 경험했을 법과 제도, 관료의 세계에 대한 인상으로부터 그의 작품이 구현하는 세계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또 어떤 식으로든 소수자 집단에 속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생애에서 그의 작품 속 등장인물의 모습이나 특징을 떠올리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카프카의 가족력에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권력과 복종, 죄의식의 문제를 연결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생각입니다. 예컨대 카프카가 태어난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방수도였던 프라하에는 45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독일어를 사용하는 상류층 인구는 4만 명 정도였습니다. 카프카는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사회적 인정과 성공만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아버지의 단호한! 결정에 따라 독일계 소년학교에 다녀야 했고, 반유대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오스트리아 사회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라는 특수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지요. 사회 대다수를 이루는 체코인들, 그리고 소수의 독일인들이 상류층을 이루는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으로 산다는 것은 카프카에게 있어 자신이 원래 속한 유대인 집단에도, 사회 대다수를 이루는 체코인 집단에도, 상류 사회인 독일인 집단에도 속할 수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이중, 삼중의 외부인이 되는 것이지요.

자, 카프카의 불운한 개인사를 언급하려면 얼마든지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겠지만, 이런 접근은 근본적으로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껏 작품 뒤로 사라진 소설가를 자꾸 작품 앞으로 내세워봐야 정작 그가 작품 뒤로 사라지면서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에서는 멀어지는 셈이니까요. 쿤데라가 겐자부로의 소설 <인간의 양>을 언급하며 소설이 말하는 방식, 소설만의 고유한 방식에 대해 제시하는 통찰을 참고해볼까요? 소설의 내용은 간단히 살펴봅시다. 어느 저녁 무렵, 일본인들이 잔뜩 탄 버스에 외국 군대의 술 취한 병사 무리가 올라탑니다. 그리고 이내 한 대학생을 칼로 위협하기 시작하지요. 병사들은 강제로 그를 붙잡아 바지를 벗기고 엉덩이가 드러나도록 만듭니다. 대학생은 억센 수치스럽지만 눈 앞의 폭력과 위협에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자신을 붙들고 있는 군인들을 뿌리치려 하지만 양 팔과 목덜미까지 완전히 붙잡혀서 꼼짝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대학생은 주위 승객들이 그런 자신을 보면서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다고 느낍니다. 어쩌면 험한 꼴을 당하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내심 안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병사들이 한 사람의 희생자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까지 하나씩 괴롭히기 시작하더니 승객들 절반 가량의 바지를 벗겨 버립니다. 이제 승객들은 같은 꼴로,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드러낸 채 버스의 중앙 통로에서 ‘양처럼’ 줄지어 엎드려 있게 되었습니다. 술 취한 병사들은 신나서 노래까지 불러댑니다. 어쨌거나 한 바탕 소동이 지나간 뒤 병사들은 버스에서 내렸고, 바지를 벗은 사람들은 도로 바지를 챙겨 입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가만히 있던 나머지 사람들이, 수모를 당한 사람들에게 경찰에 가서 외국 병사들의 행동을 고발하라고 부추기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어쩐지 피해자들은 누구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깊은 굴욕감 속에서 서로 시선을 피할 뿐이지요. 대학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사 한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람들을 부추기기 시작합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지켜만 봤던 우리들의 태도도 잘못되었다, 그런 녀석들에게는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한다, 이런 경우일수록 피해자들이 단결해야 한다며 수모를 당한 ‘양'들에게 소리칩니다. 다른 승객들도 동조하며 주억거리고요. 그러다가 양의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선생에게 다가가 멱살을 쥐고 주먹을 휘두릅니다. 깜짝 놀란 선생은 털썩 쓰러졌고 어수선한 가운데 사람들도 결국 하나둘 제자리로 흩어집니다. 대학생인 ‘나’는 얻어터지는 교사의 모습을 보며 어쩐지 조금 전의 굴욕감이 조금은 해소되는 것 같다 느끼기도 합니다. 또 그런 자신의 모습이 어쩐지 떳떳하지 못하다고 느끼기도 하고요. 또 이런 것들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지쳤습니다. 어쨌거나 소설에서 이 교사는 대학생인 나를 좇아와서는, 이런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희생자가 필요하니까 나에게 경찰에 가서 증언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애원하지요. 이름이 뭐냐, 신원이 확실한 사람이 경찰에 가서 피해자로 신고를 해야 하지 않겠나, 잊어버리고 싶겠지만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그러니 희생양이 되어달라고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압권입니다. 도대체 왜 이름을 숨기는 것이냐는 교사의 질문에, 주인공인 나는 말없이, 하지만 온힘을 쥐어짜내서 정신을 부여잡고자 노력합니다. 격한 감정에 떨리는 목소리로, 선생은 왈칵 눈물을 쏟으며 나에게 말하지요. “나는 기어코 내 이름을 밝혀내고 말겠어. 네 이름과 네가 당한 굴욕을 모두 밝혀내고 말 거야. 그리고 외국 군인들은 물론 너에게도 죽고 싶을 만큼의 수치를 안겨주겠어. 네 이름을 알아낼 때까지 나는 결코 너를 놓아주지 않겠어.”

겐자부로가 이 소설을 발표한 것이 1958년 2월이니까요, 외국 병사들이 누구냐는 질문의 답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미군이겠지요. 하지만 쿤데라는 겐자부로가 소설에서 ‘일본인 승객’이라고 꼬집어 말하면서, 병사들의 국적은 밝히지 않고 서두에서 ‘외국 군대'라고만 밝혀둔 이유에 주목합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정치 검열을 피하고자 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문체의 효과를 노렸을까요? 쿤데라는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볼 것을 제안합니다. ‘미국의 군대’라는 표현이 ‘일본인 승객'과 대구를 이룬다면, 즉 소설가가 그 지점에 초점을 맞춘다면 소설 전체는 통째로 일본인 승객과 미국의 군대가 대립하는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이 한 단어가 분명하게 언급됨으로써 소설은 정치적 텍스트로, 점령자에 대한 고발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 낱말을 포기함으로써 소설의 정치적 측면은 베일에 싸이고 인간 실존의 문제, 폭력과 수치심의 문제가 오롯이 소설의 주제로 부상합니다.

카프카의 경우도 정확히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작품을 종교적 우화로 파악하는 관점이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관점, 관료주의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카프카의 작품을 이해하려는 지극히 통속적인 관점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들은 결정적으로 카프카의 작품이 소설이라는 점을, 그가 그토록 쓰고자 고통스러울 만큼 노력했던 것이 소설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카프카의 소설을 산업사회에 대한 비판, 근대 관료제의 인간 소외,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일종의 알레고리로 이해하려 들지만, 정작 카프카의 소설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카프카의 소설에는 돈이나 돈의 위력도 등장하지 않고, 전체주의적인 당이나 이데올로기의 문제 또한 등장하지 않으며 계급투쟁도 소외된 인간의 고독 따위는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오히려 거꾸로 고독이 아닌 고독의 불가능성이자 소외가 아닌 소외의 불가능성이며, 카프카의 세계가 전체주의를 닮은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어느 세계든지 그것의 근간에 감추고 있는 거대한 농담의 풍경을 카프카의 작품은 선선하게, 담담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플로베르가 <부바르와 페퀴셰>의 초안을 투르게네프에게 이야기했을 때, 투르게네프는 곧 그 이야기를 아주 간단하게 다루라고 권고합니다. 거장다운 적절한 충고라고 볼 수 있겠군요. 사실 이 이야기가 희극적인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짧은 형태를 유지해야 하니까요. 소설은 절친한 친구 사이인 부바르와 페퀴셰 두 사람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갖겠다는 열정으로 매번 새로운 일을 배우고 실패하기를 거듭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들은 원예, 농업, 화학, 의학, 지질학, 고고학, 역사, 문학, 철학, 종교, 교육 등 온갖 분야의 학문을 두루 접하면서 매번 전문서적을 탐독하고 과학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려고 노력하지만 매번 실수를 연발합니다. 해부학을 공부하다가는 시체를 숨겼다는 오해를 받고, 통조림을 만들다가 폭발 사고를 일으키고, 엉터리 처방으로 병을 악화시키는가 하면, 화석을 채취하다가 연행되기도 하지요. 단조로운 구조 속에서 같은 모티프의 장면이 반복되는 이 소설을 생각해보면 투르게네프의 조언이 적절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플로베르는 이 주제를 세세하게 파고 들어서, 우스꽝스러운 우화나 기담이 아닌 신빙성을 지닌 이야기로 만들어내면, 심각한, 심지어 끔찍할 수도 있는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투르게네프에게 설명합니다. 카프카의 작품에도 이와 비슷한 성격이 있습니다. 카프카가 <소송>의 첫 장면을 친구들에게 읽어주었을 때 모두, 카프카 자신을 포함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는 일화는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농담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장면이니까요. 그러나 카프카가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영향력을 부여하기를, 그 주제를 세세하게 파고 들고 발전시켜 그럴 듯하게 보이게 만들기를, 농담의 밑바닥까지 내려가기를 원했을 때 이야기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실종자>의 풍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카프카가 완벽하게 불합리한,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을 짐짓 진지하게, 마치 정말 그런 것처럼 천역덕스럽게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현실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어떤 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실종자>에서 카를 로스만은 마침내 뉴욕에 도착합니다. 그는 짐을 챙겨 들고 혼잡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여객선에서 내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선실 바닥에 우산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뒤쪽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커다란 짐을 들고 인파를 거슬러 돌아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겠고요. 그는 여객선에서 내리려고 함께 이동 중이던, 옆의 남자에게 가방을 맡기고는 사람들을 헤치고 계단을 내려갑니다. 카프카가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이 장면은 명백하게 불가능한 장면입니다. 바삐 움직이며 하선하는 인파들 사이에서 낯선 사람에게 가방을 맡긴다? 그토록 도달하고자 했던 아메리카에 도착해서는 어디에 두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우산 하나를 찾아서 다시 여객선으로 돌아간다? 당연히 그에게는 가방도, 우산도 남지 않을 겁니다. 카프카의 이야기는 하나의 거대한 농담입니다. 단지 그가 사람들이 으레 농담을 건넬 때 사용하는 말투나, 농담의 소재로 보통 사용할 만한 주제들을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요. 카프카의 발견은 무엇보다 현실과 사람들이 현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대개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현실을 주의 깊게, 집요하게 들여다볼수록 실제 현실과 모든 사람이 현실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카프카의 오랜 응시 속에서 현실은 점점 더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이며, 따라서 비이성적이고 비개연적인 모습을 드러내지요. 요컨대 카프카의 작품은 현실에 대한 집요한 농담과, 그 농담을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장치들을 통해 현실이라는 거대한 관념에 균열을 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카프카가 책은 행복이 아니라 고통을 위해 읽는 것이라고 말하는 까닭, 한 권의 책은 또 얼어붙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말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상투화된 현실을, 얼어붙은 현실의 관념을, 그저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어떤 것에 직면하는 것!

벤야민은 카프카의 세계를 ‘곰팡내 나는 낡고 어두운 관방, 관료들과 서류함의 세계'라고 진단합니다. 다시 한 번, 여기에서 피상적인 근대 세계 비판을 읽어내는 것은 진부하다고 덧붙입니다. 진부할 뿐더러 도움이 되지도 않습니다. 설령 카프카의 작품에 그러한 비판을 읽어낼 수 있을 만한 요소가 있다고 해도 상관 없습니다. 소설의 정신은 정확하게 그 반대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것, 단순화하는 것의 반대편에요. 카프카의 소설을 어떤 비판으로, 혹은 비판을 위한 구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시시합니다. 소설은 단순하게 보이는 것 이면에 숨어있는 복잡한 것을 발견하는 것, 발견하고 직시하는 것, 외면하지도 달아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그것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방법이니까요. 오직 그런 소설만이 정직한 소설입니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비현실적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치에 맞지 않고 상식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발견한 현실이 그것이라면, 꾸미지 않고 거짓으로 감추지 않는 것. 이건 소설이 태생적으로 기대고 있고, 일종의 기법으로서 반복해야 하는 거짓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곰팡내 나는 관료의 세계는 무엇보다 익명성으로 드러납니다. 세 편의 장편을 가로지르는 주인공들의 이름에서 익명성의 문제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실종자>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카를 로스만입니다. 이름이지요. <소송>의 주인공은 요제프 K입니다. 성(姓)은 알파벳으로 지워진 상태입니다. 마지막 <성>의 등장인물은 K입니다. 이렇듯 관료적 익명성이 놓이는 자리는 주인공과 대립하는 것처럼, 갈등하는 것처럼 보이는 외부 세계가 아닙니다. 주인공의 이름부터가 이미 익명성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으니까요. 관료적 외부 세계와 실존적 개인 사이의 대립으로 카프카의 작품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가 여기에서부터 다 드러나 있습니다. 문학의 가장 오랜 심급인 ‘너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은 바로 너였다’라는 오이디푸스의 주제처럼, 주인공 역시 빠져나갈 수 없는 방식으로, 가장 결정적인 방식으로 세계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니까요.

관방의 세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어떤 고정된 장소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모든 장소는 본질적으로 부유하고 있습니다. 끝끝내 입장이 허락되지 않는 측량사 K의 성이나, (예정된, 지정된 장소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지불식간에 요제프 K의 재판정으로 변해버리는 뷔르스트너 양의 방이 그렇습니다. 즉 관료의 공간은 고정된 장소가 아닙니다. 마치 늪처럼요. 그래서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어디에 있어도, 심지어 <소송>의 경우에서처럼 자고 일어난 자신의 방에서조차 낯선 느낌을 떨쳐낼 수 없습니다.

벤야민은 부유하는 장소와 이름 없음이라는 카프카적 세계의 특징에서 전세적(Vorweltlich) 힘들이 부여하는 제스처의 문제를 포착합니다. 카프카의 등장 인물은 이전 시대의 힘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또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건 카프카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겠지요. 당대를 이루는 전세의 힘들은 그 기원과 과정이 망각된 채 오늘을 이루고 있습니다. 카프카는 그 힘들의 정체를 몰랐고 그 힘들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자신의 자리 또한 알 수 없었습니다. 카프카가 자신이 탄탄한 육지에서 배멀미를 느끼고 있다고, 그리고 그것은 농담이 아니라고 말하는 까닭은 카프카의 세계가 이 힘들에 의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벤야민은 카프카가 사물을 항상 제스처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었다고 진단합니다. 흔들리는 경험에 의해 만들어지는 형상들은 고정된 상을 가질 수 없고 언제나 일그러진 형태로서, 일종의 기형적인 제스처로서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알 수 없는 전세의 힘에 의해 끊임없이 흔들리는 세계,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거대한 늪과 같은 세계에서 애당초 탈출 따위는 불가능하다면,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떤 식으로든 자신 또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우선 이것이 바로 카프카의 세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카프카의 세계는 겹겹이 속임수에 싸여 있습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카프카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거대한 연극과 같습니다. 즉 부유하는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 세계가 철저한 현실도 아닌 이중의 함정입니다. 그저 하나의 거대한 연극, 커다란 극장에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가하고 있는 연극과 같은 상황일 뿐이지요.

하지만 카프카의 농담이 빛을 발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세계의 흔들림을 철저하게 간파함으로써 늪지대로서의 세계에서 연극 무대로서의 세계로 도약할 수 있으니까요. 본질적으로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일종의 연극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연기는 현실에서의, 실제 세계에서의 영향력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연기가 아닌 것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반면 자신이 현실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연기에서 한 순간도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그들이 자신들의 현실성을 의심하지 않는 만큼 무대 바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늪지를 단단한 육지라고 믿으며 그 현실을, 실은 현실에 대한 관념을 살아갈 뿐인 사람들은 정확하게 자신들이 믿고 있는 관념 속에 갇혀 머무를 뿐입니다.

카프카의 방법은 연극에 몰입하면서도 그것이 연기임을 끝없이 의식하는 것입니다. 카프카의 소설은 이러한 늪으로 변한 세계와 연극의 관계, 그리고 여기에서 어떻게 현실로 재도약할 것인가의 차원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카프카 자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카프카는 “나의 내면의 삶을 서술하는 것에 대한 의미가 다른 모든 것을 부차적으로 만들었다”고 고백하면서, “다른 글쓰기 방법도 있었겠지만 나는 이렇게밖에 쓸 줄 모른다"고 거듭해서 밝히고 있으니까요. 많은 곳에서 카프카는 자신의 글쓰기를 실패로 규정합니다. 하지만 늪과 무대와 현실이 이루는 알레고리를 통해 접근한다면 그 실패야말로 성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대 또한 벗어나야 할, 깨뜨려야 할 무엇이니까요. (물론 벗어날 수 없고,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도무지 멈출 도리가 없는 연극이지요. 현실을 산다고 착각하는 늪의 인간은, 세계의 연극적 성격을 깨달음으로써 늪을 무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카프카에게는 특히 그렇습니다. 한 번 더, 도약이 한 번 더 필요합니다. 현실에 대한 얼어붙은 관념이 아닌, 도달하고자 하는 현실의 진짜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서는요. 단순히 연기를 잘하는 것은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벤야민은 무대에서 배우가 각본의 인물이 아닌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면, 어떻게 실패할 수가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실패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카프카의 소설이 마지막 도약을 이루는 곳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카프카는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연기하면서 실패하는 것이지요. 벤야민은 카프카가 자신의 실패를 강조했던 그 열정이 카프카의 작품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카프카가 거듭해서 자신의 실패를 고백할 때, 그리고 진정으로 실패했을 때 거꾸로 카프카의 문학은 어떤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카프카가 물러간 자리에 카프카의 문학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소설가는 소설 뒤로 사라지는 사람이라는 통찰을 통해 플로베르가 구축하고자 했던 문학의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렇게 문학이 현실을 획득하는 것이지요.

정리합시다.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면서 연극을 현실로 착각하는 것에서 주어진 역할이 아닌 자기 자신을 연기하기로 선택하면서, 늪처럼 부유하는 세계는 일종의 무대로서의 견고함을 확보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아직 부족합니다. 내가 나를 잘 연기해도, 잘 연기할수록 어쨌거나 연극은 이어지니까요. 무대 또한 현실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막을 찢고 무대가 아닌 현실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잠시나마 연극이 아닌 현실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카프카를 통해 한 가지 가능성을 목격했습니다.

이것을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것에 마침내 실패하는 성공한 글쓰기라고도, 아니면 성공한 연기로서의 실패한 글쓰기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어느 쪽에 무게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의미는 조금 달라지겠지만 오늘은 이 모순된 표현들 사이의 의미 공간을 음미하는 것 정도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단순성에 저항하는 것, 이것이냐 저것이냐 묻는 세상 앞에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혹은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하다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보다 소설스러운 자세일 테니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8. 5. 15.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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