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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란 무엇인가: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는 (제목에서 곧장 드러나듯) 벤야민이 자신의 사상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기둥 가운데 하나인 언어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글입니다. 또한 벤야민이 가진 유대 전통적인 특징과 신비주의적 면모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글이기도 하고요. 흔히 신비주의라고 하면 합리적인 추론이나 탐구가 아닌 초이성적인 명상이나 계시, 초월적인 합일의 경험을 통해 세계를 이루고 있는 근본적인 힘이나 원리를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나 사상을 가리킵니다. 세계의 근본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회의주의나 허무주의와는 다르고, 또 이러한 원리가 존재하긴 하지만 인간은 절대 이것을 파악할 수 없다고 보는 불가지론의 입장과도 다른 나름의 고유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요. 오늘날에는 주로 합리적 탐구를 벗어난 종교나 명상에 관련한 맥락에서 많이 사용되는 개념이지만, 엄연히 철학의 중요한 지적 전통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철학적 전통에서 신비주의가 갖는 의미와 비합리적인 미신적 태도로서의 신비주의를 혼동해서는 곤란하겠지요.

한국어에서 신비라는 표현에는 낱말의 일부를 이루는 의미소 때문인지 ‘신(神)’이라는 의미 연관이 따라붙지만, 신비주의가 반드시 신이나 종교에 연관된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신비주의(mysticism)’의 의미소인 명사 ‘mystic’은 ‘신비’가 아닌 ‘신비로운 사람'을 가리킵니다. 즉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자신의 특징으로 갖는 사람이라고 풀어 설명할 수 있겠지요. 알 수 없는 것, 신비를 의미하는 ‘mystery’라는 낱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같은 의미소에서 파생한 낱말들이지요. 알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의미나 어떤 초월적 실체를 가리키는 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이 낱말은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의 ‘신비’라는 뜻을 가진 고대 그리스어 ‘mustikos’에서 유래했는데, ‘mustikos’는 ‘mustēs’에서 파생한 낱말입니다. ‘mustēs’는 어떤 일에 착수한 사람이나 무언가를 시작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게 신비주의와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조금 더 들어가볼까요? 이 ‘mustēs’의 기원은 다시 ‘muein’이라는 낱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muein’은 우선 시작하다, 착수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 덧붙여 눈이나 귀를 닫는다는 중요한 의미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눈과 귀를 닫는다, 라고 하면 어쩐지 벌써 신비주의의 냄새가 폴폴 나는 것 같은데요.

이러한 의미의 기원은 당초 이 개념들의 군사적 활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군대는 전투를 위한 조직이지요? 그런데 얼핏 보기에 군대에는 전투와 별로 상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역할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내용 모를 편지를 이곳저곳 전달할 것을 명령받은 병사나, 적의 군대와 상관 없어 보이는 엉뚱한 자리를 감시할 것을 명령받은 병사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자, 이 예시에서 이미 우리는 자신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하고 투덜대는 어떤 병사의 모습은 물론, 또 왜 그런 역할들이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까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다른 병사들이 중요한 전투에 참전하고 있을 때 편지를 옮기고 있는 병사의 경우라면 그 편지에 병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장군들 사이에 교환해야 할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으리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고, 이에 따라 병사들이 보기에는 엉뚱한 지점이지만 실은 반드시 경계해야 할 중요한 자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들 자신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각자 맡은 역할이나 역할의 이유가 보이지 않지만, 지휘관의 눈으로 본다면 이들은 분명 역할이 있고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사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 일을 지시받은 그대로 수행하는 것, 눈과 귀를 닫고 그 일에 착수하는 것이 바로 ‘신비'라는 낱말의 어원을 이루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신비라는 말은 알려지지 않은 것,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키지만, 어디까지나 아직은 알려지지 않은 것, 지금은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편이 타당합니다. 즉 그것은 다른 관점에서는 볼 수 있고, 언젠가는 알려질 것이고, 그래서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될 어떤 것을 가리킨다고요.

벤야민의 언어관이 갖는 신비주의적인 특징도 이와 유사하고 볼 수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불합리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주장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이를 단순히 무의미한 요설로 간주하거나 벤야민의 주관적인 생각이라 무시할 수 없는 맥락을 가지고 있지요.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의미와 까닭을 충분히 고찰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진 생각입니다. 이때의 다른 관점은 바로 벤야민 자신이 제시하는 관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살펴봅시다.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는 벤야민의 초기 저작에 속하는 작업입니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작성했던 1925년보다 10년 가량 이른 1916년에 작성한 저술이지요. <원천>의 맨 첫 장인 ‘인식비판적 서론'에서 그가 제시하는 이념과 언어, 인식과 진리의 관계에 대한 통찰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저술이기도 합니다. 벤야민에게 언어란 단순히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기호, 또는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표현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또 의사소통의 수단도 아니고요. 물론 언어는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기호로서의 기능,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로서의 기능, 의사소통에 꼭 필요한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이나 문자가 아닌 다른 것들도 언어가 될 수 있지요. 가깝게는 손짓, 발짓과 같은 몸동작이나, 색이나 형태도 얼마든지 언어로서의 기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언어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봐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내용들이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언어는 임의적 성격과 사회적 성격을 갖습니다. 임의성부터 먼저 짚어볼까요. 제가 들고 있는 이 연필을 굳이 ‘연필’이라고 부를 이유는 없습니다. 즉 연필의 이름이 연필이어야만 하는 필연적인 근거를 설정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똑같은 대상을 ‘pencil’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고, ‘crayon’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지요. 이것의 이름이 ‘pencil’어야 할 선험적인 이유도, ‘crayon’어야 할 절대적인 이유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같은 계통을 이루는 언어 체계 안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예컨대 한국어 표준어 ‘어머니'의 경우처럼 ‘어마씨’, ‘어머이’, ‘오마니’, ‘오마씨’, ‘오마이’, ‘오매’, ‘오모니’ 등 동일한 의미를 갖는 여러 표현을 지역에 따라 다르게 갖는 경우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나를 낳은 여성을 가리키는 표현이 ‘어머니’여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도, 그 여성을 ‘오매’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이유도 없습니다. 또 상황에 따라 ‘엄마’나 ‘모친', ‘어미’나 ‘자당' 등의 표현이 ‘어머니'의 자리에, 즉 ‘어머니'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호로서의 언어는 일종의 사회적 규약과 같은 성격을 갖습니다. 특정한 대상과 사태를 어떻게 지칭할지에 대한 일종의 약속이랄까요. (언어의 이러한 규약적 성격은 어떤 대상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명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문법 규칙처럼 언어의 사용 전체에 관련한 규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벤야민에게 언어의 의미는 그것의 임의적, 사회적 성격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성립합니다. (당연하게도) 벤야민 역시 언어의 기호적, 도구적, 수단적 기능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벤야민에게 언어의 의미는 이러한 기능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벤야민에게 언어란 무엇보다 사물의 본질에 연관된 어떤 것이자, 그것에 대한 참된 인식, 즉 진리와 분리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니까요.

그럼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에서 벤야민이 제시하는 언어관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논문에 나타난 큰 뼈대를 살펴봅시다. 벤야민은 언어가 가진 일종의 마법(Magie)과 같은 성격에 주목합니다. 마법이 달리 마법이겠습니까, 도통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법이겠지요. 앞서 ‘신비’에 대해 간단히 살펴봤던 것처럼, 이제 그 마법의 의미를 천천히 살펴보지요. (물론 그래도 마술사의 눈속임이 들통나듯이 언어의 작용이 허망한 속임수였다는 것이 드러나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벤야민이 주목하는 언어의 마법적인 성격은 먼저 그것이 자기 자신을 전달한다는 특성입니다. 언어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 자신을 전달하는 자기 자신이라는 특징을 우선 갖습니다. 따라서 언어는 어떤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 기호와는 구분되며, 내용과는 무관한 고유한 전달이라는 요소를 통해 자신의 성격을 근거짓습니다. 다시 말해 언어는 자신과 다른 것, 즉 어떤 사물이나 사태나 의미나 내용을 전달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전달하고, 따라서 그것은 수단이 아닌 매체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벤야민은 언어를 ‘통한’ 전달과 언어 ‘속에서의’ 전달을 구분하는데, 이 매체, 즉 언어라는 매체가 전달하는 것은 우선 언어 자신의 정신적 본질이며, 나아가 그 언어에 상응하는 대상의 정신적 본질이라고 벤야민은 파악합니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언어가 곧 대상이자 사태 그 자체인 독특한 관점이 성립합니다. 언어 속에서 전달되는 사물의 정신적 본질이 바로 그것의 직접적인 언어를 이루는 것이지요. 언어는 자신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전달하며, 이때 언어는 자신이 전달하는 것의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아직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접근입니다. 일단은 언어는 자신 속에서 스스로를 전달한다는 것과, 이 내용 없는 전달이 언어의 근본적인 성격을 규정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벤야민을 더 따라가 봅시다. 언어의 전달에서 언어가 자신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전달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보다 언어가 사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언어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구분되는 일종의 기호로 보는 관점과 달리, 벤야민은 지시 대상과 구분되지 않고 오히려 그 대상의 정신적 본질을 이루는 것이 곧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언어의 전달에 있어 어떤 지시 대상이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대상은 언어를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전달하는 것이고 이 본질이 곧 그것의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는 전달이라는 차원 외에 기호나 의미와 같은 별개의 차원이 아닌 언어 속에서 스스로를 완수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과정은 어떤 대상의 정신적 본질로서의 언어가, 자신 속에서 자신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벤야민은 이러한 언어를 가리켜 ‘이름언어(Namensprache)’라고 일컫습니다.

언어의 이러한 특징은 그것의 명사적 성격에 꼭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즉 하나의 대상이 자신의 본질로서 자신의 언어, 즉 이름을 갖는다는 차원만으로 축소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어떤 것의 정신적 본질이 곧 그것의 언어를 이룬다면, 인간의 정신적 본질은 곧 인간의 언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물이나 사태가 자신의 정신적 본질을 언어 속에서 전달하는 것처럼, 인간의 정신적 본질 역시 언어 속에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때 인간의 언어는 무엇보다 말로써의 언어입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말의 특징은 무엇보다 명명의 능력에 있습니다. 벤야민은 인간을 말을 언어 가운데 유일하게 명명(Namengebung)하는 능력을 가진 언어로서 파악합니다. 언어가 자신 속에서 자신을 전달하는 사태를 언어 일반의 특징이라고 본다면, 인간의 언어는 말을 통해 그러한 사태를 일으키는 것을 특징으로 갖습니다. 바로 명명의 능력을 통해서요. 명명하는 능력으로서의 말이라는 특징을 갖는 인간의 언어는, 언어가 자신 속에서 자신을 전달하는 것, 즉 언어라는 사태를 일으킬 수 있는 언어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언어적 본질은 인간이 사물을 명명한다는 것에 있으며, 인간의 언어가 갖는 이러한 특징은 무엇보다 신의 창조적 권능을 닮았습니다. 벤야민은 성서의 창조 신화를 통해 언어와 창조의 관계를 파헤칩니다. 벤야민은 자신이 파악한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가 갖는 특징을 성서에서 확인하고자 시도합니다. 벤야민이 속한 유대 공동체의 전통과, 벤야민 초기 사상의 신학적 면모가 도드라지는 지점이지요. 굳이 종교적으로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나, 이러한 접근을 통해서는 이론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덮어놓고 비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성서 자체가 반박 불가능한 절대적 보증을 이룬다기보다, 일종의 사유 지평으로 갖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 보다 흥미롭고 유용한 접근이 아닐까 싶군요. 벤야민이 성서를 논의에 끌어들이는 이유는 그것을 언어 이론의 기반으로 삼거나 전제로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 반대로 자신의 언어관을 통해 성서의 창조 신화나 유대 전통에서 신의 말씀이 갖는 의미를 해석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요. 벤야민이 성서를 경유하는 까닭은 언어의 전개 과정에서 고찰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 더 이상 설명할 수 없고 신비로운 현실로서 언어가 자신을 드러내는 최종적인 지점을 다루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접근을 위해 벤야민은 우선 창세기의 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창조의 고유한 리듬에 주목합니다. ‘야훼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기독교의 세계관이야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요. 창세기에서 야훼의 세계 창조는 우선 ‘있으라고 하셨다'와 ‘있었다/되었다', 그리고 무엇이라 ‘칭하셨다’는 3박자로 이루어집니다. 예컨대 야훼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칭하셨다’는 장면이 가장 먼저 등장하며, 천하의 모든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고’ 뭍을 땅이라 물을 바다라고 ‘칭하셨다’는 식으로 계속 이어지지요. 여기에서의 최초의 행위인 ‘하다’는 무엇보다 ‘말하다'를 가리킵니다. [이 고유한 리듬은 성서의 영역본에서 더 확연하게 나타나는데, ‘하셨다(said)’와 ‘있다/되다(be)’, 칭하다(call)가 반복해서 교대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리듬 속에서 창조와 일치하는 언어로서의 말과 그 말의 실행으로서의 창조, 그것에 대한 명명이 하나의 전체 과정을 이루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창조의 리듬은 가장 마지막에 와서, 즉 인간의 창조에 이르면 전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인간은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한 뒤 야훼는, ‘있으라’와 ‘칭하셨다’ 이외에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 것과 세계 속에서 인간의 가질 특권을 결정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인간을 축복한 뒤 인간을 창조하지요. 즉 인간은 ‘있으라고 하셨다'와 ‘칭하다’라는 언어의 작용을 통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다(create)’의 연쇄를 통해 등장합니다. 성서의 창조 신화에서 야훼는 야훼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create)’ 것을 결정하고, 그대로 ‘창조한(create)’ 것이지요.

벤야민은 이러한 신과 세계, 언어와 창조의 관계에서 신이 인간을 언어의 지배 아래 두지 않았다는 함의를 읽어냅니다. 나아가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부터 나누어 가진 특징과, 야훼가 인간에게 부여한 나머지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바로 언어라고 파악합니다. 이때 언어는 명명하는 힘으로서 창조와 유사하지만, 무한한 신의 권능을 담은 신적 언어와 달리 인간의 언어는 무(無)로부터의 순수한 창조가 아닌 인식으로서의 창조라는 힘만 가질 수 있습니다. 즉 신에게서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의 창조에 상응하는 행위이지만, 인간이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의 인식과 동일하고 동등한 행위라고 벤야민은 파악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에게 있어서 창조의 언어는 인간에게 있어 인식의 언어를 이룹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의 언어는 이름언어 가운데 신의 말씀과 일종의 마술적인 공동체과 같은 관계를 이루고요.

… (중략) …

우리는 야훼의 창조 신화가 어떻게 끝나는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뱀의 꾐에 넘어간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뒤 야훼의 저주와 함께 에덴에서 쫓겨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지요. 기독교적 맥락에서 인간의 원죄를 구성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야훼가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순수한 언어와 그것의 능력을 살펴봤던 것처럼, 벤야민은 원죄 신화를 통해 언어의 타락을 읽어냅니다. 벤야민에게 인간의 원죄는 언어가 인간에 의해 발화될 때 언어의 신적 성격이 상실된다는 사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의 상실은 단순히 무한한 신과 유한한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창조와 인식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순수한 이름언어로서 자신 속에서 자신을 전달하는 언어 일반의 성격 자체가 훼손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원죄 이전의 일종의 상상적 기원으로서 최초의 언어는 신이 인간을 창조하며 인간에게 위임한 언어의 권능, 어떤 것을 명명함으로써 그것의 본질을 인식하는 권능을 가진 언어였으나, 원죄 이후 인간의 언어는 어떤 것의 본질로서 그 자신만을 전달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 이외의 무엇인가를 전달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 처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발화 속에서 이름은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할 수 없으며, 언제나 자신이 아닌 어떤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오염되고 훼손된 형태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의 언어는 어떤 것의 본질을 전달하는 말이 아니라 그것과 간접적인 관계만을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지요. 언어의 이러한 변질로 인해 자연은 언어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수 없으며, 이러한 사태는 곧 자연과 언어 사이의 근본적인 슬픔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벤야민은 이름의 부여는 늘 슬픔의 예감을 남긴다고 지적하고요.

이렇듯 벤야민은 신적 권능을 닮은 언어의 마법적인 본성과, 그것의 타락이라는 언어의 훼손된 현실이라는 구도 아래 언어의 성격을 탐구합니다. 그렇다면 어쨌거나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쥔 것은 이 훼손된 언어일 뿐이므로 철저한 무기력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거나, 언어가 도구적 성격으로 방조되고 타락을 거듭하며 점점 더 훼손되는 사태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을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라고 벤야민은 생각할 겁니다.) 줄기찬, 돌이킬 수 없는 타락과 비관적 전망 속에서도 벤야민은 기를 쓰고 희망의 가능성을 정초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으니까요. 벤야민의 철저한 비관주의는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이는 절망으로부터의 탈출구를 모색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벤야민의 사상 어디를 펼치더라도 그의 비관적인 현실 인식과 만날 수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현실 인식에 기인하는 안일한 낙관이나 낭만적 도피와 달리,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현실에 대한 철저한 탐구의 결과물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언어에 관련한 사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에덴으로 직접 회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르는 것이 곧 이름이고, 이름이 곧 본질인 언어의 신화적 낙원은 이미 상상 속에서만, 혹은 상징 속에서만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사태로 남았고요. 그렇다면 다시 물어봅시다, 오늘날 우리는 이 훼손된 언어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도구적 성격으로 방조된 언어, 타락을 거듭하며 점점 더 훼손되는 언어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가?

벤야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번역의 가능성을 통해 밝히고자 합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모든 상위 언어는 하위 언어의 번역입니다. 언어의 상하관계는 다양한 차원에서 설정할 수 있습니다. 명명하는 권한을 가진 이름언어와 자신을 자신 속에서 전달할 뿐인 사물언어(Dingsprache)를 생각해본다면, 이름언어가 사물언어의 상위 언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또 타락의 정도에 따라 구분한다면 도구적 성격이 강한, 자신 이외의 것을 더 많이 붙이고 있는 언어는 그렇지 않은 언어보다 하위 언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또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신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 또한 상위 언어와 하위 언어의 관계를 이룬다고 볼 수 있고요. 언어의 성격을 이렇게 구분한 뒤, 벤야민은 번역은 언어 사이를 오가는 끝없는 작용으로 파악합니다. 이 과정에서 번역은 최초의 언어이자, 창조와 언어가 일치하는 신의 말씀 속에서 명징하게 자신을 드러낼 때까지 이어지고요. 신의 창조와 인간의 인식 사이에 절대적인 단절이 존재하듯, 따라서 번역은 무한한 연쇄를 이루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상위 언어를 지향하는 번역의 과정은 단순히 하나의 언어를 다른 하나로 옮기는 일, 즉 언어 사이의 수평 이동이 아닙니다. 동일한 층위의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동하는 과정, 언어들의 병렬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니까요. 쉽게 말해 번역은 단순히 한국어를 일본어로, 영어를 프랑스어로, 마오리족의 언어를 이누이트의 언어로 바꾸는 과정이 아닙니다.

벤야민에게 번역은 우선 사물의 언어를 명명을 통해 인간의 언어로 격상하는 일이며, 이름 없는 것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인식할 수 없던 것,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 즉 존재하는 것으로 바꾸는 행위입니다. 번역은 이렇게 불완전한 이름을 더 완전한 이름으로 옮기는 일이고, 이름에 인식을 덧붙이는 일이라고 벤야민은 주장하지요. 언어 일반에 대한 벤야민의 통찰은 이렇게 (타락한) 언어 현실 속에서의 번역이라는 문제로 넘어갑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돌아오는 다음 밤에는 이러한 맥락에서 벤야민이 번역자의 의무로서 제시하는 과제를 함께 살펴보시지요.

2018. 4. 17.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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