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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성좌(1): <베를렌 연대기>


어떤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텍스트의 직접적인 내용 만큼이나 텍스트의 이면에 있는 질문이 중요합니다. 예컨대 영수가 철수에게 “너는 약속 시간에도 번번이 늦고 내가 했던 이야기도 자꾸 잊어버리고 내가 싫어하는 행동만 반복하고 … ” 운운하고 있다면 중요한 것은 단순히 철수가 약속 시간에 몇 번이나 늦었는지, 철수가 어떤 이야기를 잊어버렸는지, 영수가 싫어하는 행동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영수가 철수에게 화가 났다는 사실이라는 뜻이지요. 우리는 벤야민의 질문을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길고 복잡한 벤야민의 텍스트들은 벤야민을 사로잡았던, 벤야민이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고자 씨름했던 질문들에 대한 답안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방금 언급한 예시에서 철수의 행동은 영수가 철수에게 화가 난 까닭과 쉽게 분리되지 않을 겁니다. 원인과 결과로서 이들의 성품과 감정이 결국 이들의 관계를 구성하고 있을 테니까요. 영수의 발언 속에서 철수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는 발화된 표현 속에서가 아니라 발언 이면에 있는 영수의 의도를 통해 완성됩니다. 즉 발언의 구체적 내용 속에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영수가 왜 철수에게 이런 말을 꺼냈는가의 차원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이를 테면 영수는 철수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화가 났고 앞으로는 약속을 지키기를 원한다는 의도를 함께 이해했을 때 ‘철수가 약속 시간에 매번 늦었다'는 사태가 이들의 관계 속에서 갖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벤야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 비애극에 대해 그가 말하는 내용은 독일 비애극을 선택한 벤야민의 물음과 뗄 수 없고, 일방통행로에서 벤야민이 말하는 내용들 역시 왜 일방통행로를 선택했는가라는 물음과 뗄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통해 발견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이념과, 멈추고 기다리고 우회하는 발견의 방법을 살펴봤지요. <일방통행로>, <파사주>를 통해서는 멈추고 기다리고 우회하는 산보객, 도시 산책자의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요컨대 대상의 설정, 방법의 제시, 행동의 구체화라고 정리할 수 있겠군요. 벤야민에 따르면 발견의 장소는 거리라는 공간입니다. 그렇다면 거리에서 드러나는 것, 거리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거리가 발견의 장소가 되는 까닭은 찾고자 하는 것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산책자가 거리에서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시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그 시대의 이념입니다.

시간은 벤야민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사는 동안 그가 가장 많은 노력을 할애한 작업이 바로 시간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라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벤야민의 기억을 따라 1900년경 베를린 거리로 갑니다. <베를린 연대기>에서 벤야민은 어떤 이론이나 사상을 체계적으로 개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한편으로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벤야민의 작업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예시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벤야민은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베를린 연대기> 두 작품에서 유년기의 기억을 직접적으로 다루는데, 두 저작 모두 벤야민 생전에 출판되지 못했습니다. 벤야민은 1931년 말 독일의 한 문학 잡지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아 <베를린 연대기>를 집필했지만 정작 잡지에는 싣지 못했고, 1932년, 33년에 걸쳐 이 원고를 보완해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을 완성한 뒤 출판을 기대하며 몇몇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지만 역시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이후 1938년 다시 한 번 출판을 위해 꼼꼼하게 수정한 원고를 완성했지만 역시 출판하지는 못했고요. 결국 이 원고들 가운데 일부 단편들만 잡지나 신문에 실렸을 뿐입니다.

벤야민은 유년기를 다룬 자신의 텍스트에 상당한 애착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인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그는 해당 원고가 다소 개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출판사를 찾기 어렵지만 출판만 이루어지면 큰 성공을 거둘 것으로 예상한다는 생각을 말한 바 있습니다. 또 자신의 저술이 나치즘의 확산으로 인해 이미 다른 지역으로 망명한 독일의 지식인들에게 큰 공감을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밝히고 있고요. 만약 벤야민이 자신의 텍스트가 정말 사적인 기억이나 체험만을 다룬다고 생각했다면 이런 생각을 갖기 어려웠을 겁니다. 유년기를 다루는 벤야민의 텍스트는 얼핏 지극히 개인적인 소재들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순히 감상적이고 회고적인 성격의 글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벤야민은 자신의 텍스트가 사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것임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벤야민이 최초로 작성한 <베를린 연대기>와 이후 수 차례 수정한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을 비교하면 이러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텍스트는 언뜻 동일한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반 이상이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 있으니까요. 이러한 변화에서 단순한 전기적 사실을 삭제하고 수정해서 기억에서 개인적인 성격을 탈색하고 그것의 사회적, 역사적 성격을 부각하고자 한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1938년 원고의 서문에서 벤야민은 “지나간 과거를 개인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우연의 소산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회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통찰”하고, “유년 시절의 이미지들 안에 미래의 역사적 경험이 미리 형상화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을 자신의 기획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억의 개인사적 면모들은 뒷전으로 물러난다고 밝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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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공간과 사물에 얽힌 기억을 통한 시간의 형상화를 시도합니다. 물론 이때 만들어지는 시간의 형상은 단순히 개인의 기억과는 다릅니다. 벤야민은 자신의 기획을 단순한 자서전과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앞서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다룬 바 있는 이념이 드러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어떤 대상을 포착하고자 노력은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활동이 아니라 우회하는 관찰 속에서 결실을 이루기 때문이지요. 자서전이 기억의 자발적인 재구성에 해당한다면, 유년기의 기억을 다루는 벤야민의 방법은 어떤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무언가를 ‘기억하는’ 것이 아닌, ‘기억 나는’ 것들을 추수하고 그것의 의미를 다시 읽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벤야민을 다루면서 나름의 우회로를 계속 경유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텍스트를 읽기 위해 벤야민의 다른 텍스트를 경유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텍스트를 경유하기도 하면서요. 기억하는 것과 기억 나는 것을 구분하는 벤야민의 생각을 다루기 위해서라면 먼저 ‘기억’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겠지요. 기억(이라는 정보 처리)에 대해서라면 오늘날 생물학이나 뇌과학이 상당히 흥미로운 연구 성과들을 제시합니다만, 그래도 기억에 대한 빼어난 통찰이라면 역시 니체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흔히 기억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어떤 능력을, 특히 인간이 어떤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하는 능력을 먼저 떠올립니다. ‘기억력이 좋다’와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지요. 반면에 ‘너는 그런 것도 기억 못하니’ 하는 표현에는 가벼운 책망이나 놀림의 의미가 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완벽한 기억력은 종종 뛰어난 지적 능력이나 천재적인 두뇌를 상징하기도 하지요. 이렇듯 기억과 기억하지 못하는 것, 즉 망각 사이에는 뚜렷하게 더 우월하고 탁월한 능력으로서의 기억이라는 구분이 존재합니다.

니체는 이러한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니체에 따르면 망각은 ‘천박한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단순히 관성적인 작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저지 능력이며, 바로 이러한 능력을 통해 인간은 경험을 소화시키고 그것을 자신의 육체에 동화시킨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인간이 지각하지 못하는 수천 가지 과정과 마찬가지로, 망각은 정신적인 질서와 안정과 규칙을 관리하는 관문 역할을 수행합니다. 인간의 정신은 이러한 능동적인 망각을 통해 더 고차원적인 과업을 수행할 수 있지요. (망각의 이러한 기능은 현대의 뇌과학이 밝혀낸 사실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니체는 망각이 인간 동물의 자연적인 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요. (망각 없이는 현재도 없다는 통찰은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당장 이틀 전, 1년 전, 10년 전, 언제든 기억에 떠오르는 것들을 생각해보세요, 시간 속에서 온전하게, 충실하게 자신을 연소한 경험들은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을 초과한 것들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너무나도’ 좋았던 여행지에서의 감상, 매일같이 나를 ‘너무도’ 괴롭혔던 옛 직장 상사처럼. 그래서 기억은 망각의 저지, 망각이라는 기능의 중단으로서 나타납니다. 일종의 소화불량 같은 것이지요.

니체는 이러한 고찰에서 시작해 책임과 도덕 감정의 기원에 대한 논의로 나아가지만 우리는 다시 벤야민으로 돌아옵시다. 누군가의 자서전이 그가 기억하는 것의 능동적인 서술에 해당한다면 벤야민의 회고는 일종의 ‘받아쓰기’에 해당합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한 개인의 능동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경험의 역량을 초과하는 압력이고, 그래서 그러한 이미지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경험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그러한 흔적을 남긴 압력에 대한 증언이 됩니다. 사적인 회고나 자의적인 진술이 아닌 시대라는 이념이 드러나는 장면이 되는 것이지요.

베를린이라는 도시 공간에서 벤야민의 기억이 출발하는 지점이 바로 최초의 방문지, 태어난 고향이 아닌 낯선 곳이자 안내자 없이는 갈 수 없었던 낯선 거리입니다. 벤야민의 기억 속에서 그 거리는 무엇보다 자신이 있는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지러이 펼쳐진 상점들, 위험천만한 횡단보도, 형편없는 자신의 방향감각이 맞닥뜨리는 공간이지요. 이후에 그의 기억은 강압적이고 엄격한 규율과 무질서하고 특징 없는 학생 무리로 이루어진 학교라는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또한 도시는 원래의 이름이나 유래가 어떻든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불러대는 지명으로 이루어진 공간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누군지 모를 상대방에게 소리 치던 장면,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 꼭 보고 싶었던 공연에 갈 수 없었던 좌절의 경험처럼 벤야민의 기억은 언제나 그를 초과하는 어떤 장면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초과가 반드시 부정적이거나 불행을 암시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장면은 대체로 어떤 불연속을 암시합니다. 관성이 지배하는 일상의 흐름이 아닌 그것을 깨뜨리는, 그것을 깨뜨릴 수 있는 힘을 내재한 일상 이면의 어떤 것이 표출하는 순간이지요. 일상에서 망각된 것들이 일상을 비집고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지난 밤 영원에 도달하는, 시간을 뛰어넘는 두 가지 방법을 언급한 바 있지요? 모든 시간을 통틀어 변하지 않고 지속하는 방식과, 다른 시간과의 단절 속에서 유일한 것으로 존재하는 방식이 있고, 그 가운데 벤야민은 후자에 관심을 기울인다고요. 일상의 지속적인 흐름 속에서 그것을 깨뜨리고 솟아오르는 어떤 것으로서의 불연속과 그것을 포착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물이나 상황, 사건의 일회적 배열 속에서 눈에 보이는 배치를 뛰어넘는 의미를 포착하는 것이 바로 시의 일, 시가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의미의 풍화와 무의미의 퇴적 가운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불연속을 포착하고 그것의 힘을 증언하는 일은 무엇보다 시인의 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산보객의 걸음은 시선의 시선과 겹칩니다. 천천히 대상의 둘레를 우회하는 산책자의 걸음은 대상의 본질, 또는 드러나지 않은 어떤 속성을 포착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시인의 시선에 비견할 수 있습니다. 유행가 가사 같지만 벤야민이 최초의 산보객으로 보들레르를 제시하는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닙니다. 산책자의 느린 걸음은 시인의 눈을 통해 비로소 시대에 닿을 수 있으니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은 보들레르와 함께 파리로 갑니다.

2018. 4. 3. / Rolli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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