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독일 비애극의 원천(참고)


트락타트의 개념

철학적 가르침은 기하학적 연역의 방식으로 불러낼 수 없다. 철학의 방향 전환, 즉 자신의 문제를 새로 설정할 때마다 철학은 언제나 다시 서술할 것을 요구하는 재현의 문제에 부딪힌다. 언어가 의미하는 진리의 영역을 제거하여 서술의 문제를 완전히 제거하는 수학적 진리와 달리, 철학적 진리는 방법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철학적 진리를 체계를 통해 포착하고자 했던 19세기의 시도는, 정작 진리가 체계 바깥에 위치한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따라서 철학이 진리의 인식을 위한 매개적 안내서가 아닌 진리의 재현, 즉 진리에 대한 서술로서 자신의 형식을 갖추고자 한다면, 체계 속에서 형식을 선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형식에 도달하기 위해 연습해야 한다. 형식을 위한 연습은 철학이 새롭게 자신의 방향을 정하고자 했던 모든 시대마다 일종의 입문서의 형태로 등장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언제나 간명성이나 수학적 증명의 명료함에 도달하지 못하고 ‘우회로’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냈다. 이 우회로는 불규칙한 조각들로 구성되며, 이 조각들에서 의미의 총체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정관, 즉 신중하고 오랜 관찰과 대상을 향한 몰입이 필요하다.

인식과 진리

우회의 방법은 산문의 고유성에서 유래하는 어려움을 갖는다. 목소리, 표정과 몸짓, 상황과 맥락, 관계에서 도움을 받는 말과 달리, 문자는 매 문장마다 새로이 멈추고 새로이 시작한다. 우회로는 문자의 이러한 특성을 따라야 한다. 우회로의 목적은 누군가를 열광시키거나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관찰의 단계에서 독자들이 멈추도록 강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회로의 산문적 냉철함은 철학적 연구에 적합하다.

철학적 연구는 이념을 다루며, 우회로는 이념의 재현을 서술한다. 이념의 재현은 인식과 다르다. 인식은 인식의 대상을 의식 속에서 점유하지만, 이념의 재현은 의식이 아닌 이념의 대상, 즉 진리 그 자체에 머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식과 진리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인식은 대상의 개별적인 속성을 향해 있으며, 그것의 총체성을 직접 지향하지는 않는다. 반면 진리는 대상의 총체성을 개별 인식이라는 분절 없이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진리는 분절된 인식들의 통일로서가 아닌 진리의 대상 그 자체의 통일로서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인식이 지향하는 모든 물음을 거부한다. 진리는 오성의 자발성, 즉 사유하고 탐구하는 자발성이 아닌 관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철학적 미

플라톤은 <향연>에서 진리를 미의 본질로 제시하고, 동시에 진리를 아름답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진리는 그 자체가 아름답다기 보다는 에로스에게 아름답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미는 대상의 고유한 내재적 특성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그 대상을 향한 욕망 속에서 드러난다. 진리 역시 그 자체가 아름답다기 보다는 그것을 추구하는 자에게서 아름답다. 진리와 미의 관계가 갖는 이러한 상대성은 아름다움이 진리에 대한 일종의 비유적 수식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에 대한 논의가 침범할 수 없는 진리의 고유한 영역이 있음을 드러낸다고 보아야 한다.

위대한 철학들을 세계를 이념들의 질서 속에서 서술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재현된 세계를 이루는 개념적 윤곽들은 허약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체계들은, 플라톤이 이데아론으로써, 라이프니츠가 단자론으로써, 헤겔이 변증법으로써 보여주었듯 세계를 기술하는 구상으로서 가치와 타당성을 잃지 않는다. 이 모든 시도들은 경험 세계가 아닌 이념들의 세계를 다룰 때 비로소 자신의 의미를 강력하게 획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석자는 체계 속에서 잔해로 남은 개념이 아니라, 그러한 개념을 산출한 불꽃으로서의 이념을 읽어야 한다. 구체적 경험의 세계는 이념의 세계에 용해되어 있고, 철학은 이 이념들의 세계를 기술함으로써 경험 세계를 보존한다. 여기에서 철학자는 세계의 재현이라는 과제를 떠맡으며 예술가와 결합한다. 색과 선의 단순한 조합에 저항하기 위한 예술에서의 모든 기법과 마찬가지로, 철학적 개념들 역시 연역의 단순한 연쇄에 반대되는 중단의 기법, 단편화가 부르는 단순화를 피하는 논설의 지구력, 천박한 보편주의를 거부하는 주제들의 반복, 부정하는 논쟁에 맞서는 철저한 긍정의 풍부함 등의 기법을 갖는다.

개념 속에서의 분할과 분산

체계는 그 토대가 이념 세계 그 자체에서 착상을 얻는 경우에만 타당성을 획득한다. 체계들, 철학의 거대한 분류들은 분과 학문의 이름이 아닌 이념 세계 자체가 불연속을 이루는 국경의 경계석이자 기념비로서 그 의미를 갖는다. 이념 세계의 불연속과 대비되는 경험 세계의 연속과 통일성은 여기에서 진리의 진정한 총체성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의 거짓 통일성을 벗어던지고 개념들에 종속된다. 체계 속에서 개념은 사물의 개별성을 해체하여 그것들을 자신의 구성요소로 삼는다. 이러한 개념을 이해하는 작업은 오로지 그것이 이념들 속에서 현상을 구제하고자 할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개념은 이념의 매개적 역할을 수행하고, 비로소 체계 속에서 기능한다. 개념은 이념의 체계를 서술한다. 이념의 체계 속에서 이념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오직 개념 속에서, 사물적 요소들의 배치 속에서 드러난다. 여기에서 이념은 사물적 요소들의 성좌로 등극한다.

성좌로서의 이념

어떤 이념의 재현에 사용되는 개념들은 이념의 성좌를 이룬다. 이념이 표상하는 현상들은 이념에 직접적으로 내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각각의 별 하나하나가 아닌 별들의 배열이 별자리를 이루는 것처럼, 이념은 현상들의 객관적이고 잠재적인 배열을 통해 드러난다. 이념과 사물들의 관계는 별자리와 별들의 관계와 같다. 이념이 성좌를 이룰 때 이념을 드러내는 요소들은 성좌의 점들로 나타난다.

이념은 현상의 극한에서 드러나고, 그렇기 때문에 일회적이다. 현상 역시 그것의 실현에 있어 현실에서 유일한 경험인데, 따라서 현상의 성좌로서 이념은 일회적이자 극단적인 것들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개념은 현상을 끌어 모으고 오성은 그것을 분류한다. 이러한 해석은 현상의 구제와 이념의 재현을 완수할 때 비로소 완성에 이른다.

이념으로서의 말

이념들은 현상들의 세계에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 때문에 이념을 파악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직관에 의존해야 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교에 속하는 모든 가르침들은 철학적 태도의 지침으로 직관을 중시한다. 그러나 이념들은 결코 어떤 직관의 대상이 아니며, 지적 직관의 대상이라고도 볼 수 없다. 진리는 직관이 의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지 않으며, 논증적이거나 직관적인 방법을 통한 인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념들이 표상하는 진리는 어떤 의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인식하고자 하지 않고 진리 속으로 몰입해 사라져야 한다.

이념으로서의 진리는 현상들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진리는 경험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어떤 견해가 아니라, 그 경험의 본질을 각인하고 확증하는 힘으로서 존속한다. 진리의 힘은 이름이다. 이름의 존재가 진리의 위치를 확정한다. 말의 상징성 속에서 이름은, 이념에서 외부로 향하는 모든 전달에 반대하는 자기이해에 도달한다. 철학적 탐구는 이름의 의미를 말의 전달적 의미에서 구제하는 것이다. 철학적 숙고 속에서 이념은 자신을 언어로서 드러낸다. 이 때 철학은 언제나 동일한 소수의 말들, 이념의 재현을 둘러싼 투쟁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철학은 새로운 용어들을 도입하는 일에 신중해야 한다. 이념의 이름이 아닌 현상에 대한 주관적 명명으로서의 용어들은 이념의 객관성을 훼손할 뿐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표현물에 등장하는 말들은 서로 다른 고립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있다. 각각의 이념들이 독자성과 불가침의 영역을 지키고 있으며, 이들의 본질은 불연속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연속에 대한 무지로 인해 낭만주의자들의 탐구는 진리의 언어적 성격 대신 성찰하는 의식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방식 역시 이념의 객관성을 훼손할 뿐이다.

분류적 사고와 배치되는 이념

비애극은 하나의 이념이다. 즉 비애극은 비극이나 다른 예술 형식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의미를 갖는다. 비애극을 하나의 개념이라고 본다면, 미학적 분류의 하위 범주로 매끄럽게 편입될 것이다. 그러나 개념과 이념은 다르다. 분류체계를 이루는 개념과 달리 이념은 본질상 분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개념을 통해 대상을 진술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일종의 귀납적 방법에 의존한다. 비극적인 것의 개념을 정의하고 그것의 사례를 수집하여 개념의 타당성을 검증하고자 하는 시도는 사람들의 진술에서 개념의 신뢰를 확증하려는 의도를 내포하는데, 이러한 방법은 어떤 대상을 비극적이라고 느끼고 있는 자아를 관찰하는 것과 동일하게 적절하지 않다. 즉 진리를 확증하기 위해 많은 사람의 진술을 뒤적이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진리를 길어내고자 하는 시도와 같이 무의미하다. 철학적 탐구에서 언어의 사용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느슨한 언술이나 사고를 통해 형식적 개념에 대한 접근으로 이어지는 것은 위험하다. 철학에서 언어는 오로지 이념에 대한 지시로 나타날 경우에만 의미를 획득한다. 귀납을 통한 대상의 탐구는 동시대 보통사람의 주관성을, 심리학적 자료는 연구자의 주관을 반영할 뿐이다.

콘라트 부르다흐의 명목론

다양한 형상에 집착하면서도 엄격한 사유에는 무관심한 태도는 오랫동안 무비판적 귀납법의 규정 근거로 작용해왔다. 많은 연구자들이 대상의 통일된 실체와 온전한 현실성을 의심 없이 설정하고 이를 마치 독립된 개체인 것처럼 다루어 왔는데, 이는 실상 무한한 계열의 다양한 정신적 현상들을 개관하고 파악하기 위한 일종의 보조 개념을 고안하고 거기에 만족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보조 개념은 이념의 거짓 표지라고 볼 수 있다. 인간에게 유사하거나 일치하는 것으로 보이는 어떤 특징들에 주목하는 이러한 관점은, 현상들의 본질적 통일성이라는 가상을 발명하여 휴머니즘, 르네상스인, 고딕인 등의 거짓 개념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거짓 개념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개념이 현상의 공통 요소를 긁어 모아 가상의 통일성을 만드는 반면, 이념은 극단적인 것의 종합을 이루며 현상의 총체성을 드러낸다.

극사실주의, 혼합주의, 귀납법

부르다흐의 명목론은 철학적 탐구가 거짓 보편성을 상정했을 때 발생하는 위험을 겨냥한다. 거짓 보편성의 반대 방향에서 등장하는 극사실주의는, 현상의 공통 요소가 아닌 개별 문제들에 천착한다. 그러나 연구 방법의 객관적 결함에 대한 단순한 회피로서 문제를 수정하는 것은 언제나 또다른 방식의 방향 전환을 요구받을 수 있는 한계를 지닌다.

사례들과 사람들의 진술에서 진리를 확증하고자 하는 귀납법의 한계는 여러 잡다한 방법들의 혼합주의라고 볼 수 있는 어떤 직관으로 결집한다. 그러나 이러한 직관 역시 해석되어야 할 무언가로 남는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또한 여기에서의 직관은 이념 속에 용해된 상태에서의 직관이 아닌 작품 속에 투사된 수용자의 주관적 상태에 대한 직관이기 때문에, 결국 감정이입이라는 귀착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크로체가 본 예술 장르

귀납법이 이념들을 분류하고 조직하는 일을 포기함으로써 이념을 개념으로 격하하는 반면, 연역법은 이념들을 가상의 논리적 연속체 속에 투사함으로써 동일한 일을 수행한다. 철학적 탐구는 개념적 연역을 중단 없이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세계에 대한 진술로서 전개한다.

크로체에 따르면 예술을 임의로 구분하는 이론은 모두 근거가 없다. 예술 그 자체, 혹은 직관이라는 하나의 장르가 존재할 뿐이다. 반면 개별 예술작품은 수없이 많으며, 이들 각각은 모두 독창적이고 어느 한 작품도 다른 작품으로 번역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은 예술철학이 작품의 역사, 또는 양식들의 사례 수집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타당하지만, 비극적인 것이나 희극적인 것과 같이 풍부한 이념들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장르와 달리 이념들은 단순한 규칙의 총괄이 아니다. 때문에 이념은 개별 작품을 규칙으로 포섭하지 않으며, 그것의 사례가 부재할 때에도 존속할 수 있다. 이념을 구현하는 위대한 작품은 장르의 한계 바깥에 있다. 중요한 작품은 장르를 세우거나 장르를 지양하는 작품이며, 완벽한 작품에서 이 과업은 합치된다.

원천

예술 형식들을 연역적으로 파악, 전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술 형식의 규칙을 파악하여 그것을 비평의 심급으로 삼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이러한 회의는 사유의 심호흡과 같아서, 해석자는 큰 심호흡과 함께 작품의 미세한 것에까지 몰두할 수 있다. 예술작품과 형식을 대할 때 단숨에 그것들을 거머쥐려 하는 성급함은, 작품과 형식의 고유함을 사라지게 만든다. 이러한 천편일률적인 접근은 예술에 무지한 속물들의 순박함보다 나을 것이 없다. 이에 반해 진정한 숙고는 연역적 방법을 기피하는 태도와 현상들을 더 깊이 소급하고 더 집요하게 추적하는 태도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술의 원천은 발생과 다르다. 원천은 생성이 아니라 생성의 흐름 속에 소용돌이로서 존재하고, 그 리듬 속으로 발생을 끌어당긴다. 원천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복원과 복구로서 그 리듬을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과, 리듬 속에서 미완의 것, 완결되지 않은 어떤 것을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원천은 사실의 적나라하고 명백한 존립 속에서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모든 원천적 현상에는 하나의 형상이 정해지는데, 그 형상 속에서 이념은 자신의 역사적 총체성을 완성할 때까지 자신을 둘러싼 역사적 세계와 갈등을 거듭한다. 따라서 원천은 사실적인 자료에서 추출해낼 수 없으며, 오히려 사실들의 전사와 후사에 관계한다. 철학적 관찰은 원천에 내재하는 변증법을 다룬다.

해석자의 과제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해석자는 사실의 가장 내적인 구조가 사실을 하나의 원천으로 드러나게 할 정도로 본질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에만 비로소 그것을 이념으로 확증해야 한다. 여기에서 개별 사실이 이념과 맺는 관계와 개념과 맺는 관계는 전혀 다르다. 개념과의 관계에서 사실은 개념 아래 귀속되고 과거와 동일하게 개별성에 머문다. 반면 이면과의 관계에서 사실은 이념 속에 위치하며 그것이 은폐하고 있던 총체성을 드러낸다.

단자론

원천에 관한 학문으로서 철학사는, 멀리 떨어져 있는 극단들이나 겉보기에는 발전의 과도한 형태들, 대립들로 보이는 총체성을 이념의 성좌로 제시하는 일이다. 하나의 이념을 온전히 서술하는 일은 잠재적으로 그 이념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극단의 영역을 모두 섭렵하지 않는 한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완전한 포착은 언제나 잠재적인 상태로 남는데, 원천의 이념 속에 포착된 것은 역사를 어떤 내용으로 갖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역사는 무한한 시간의 흐름의 차원에서의 순수한 역사가 아닌, 전사와 후사를 울타리로 갖는 이념의 역사를 의미한다. 때문에 이념은 자신만의 울타리를 지닌 단자와 같다. 이념은 자신의 후사를 잠재적으로 갖기 때문에, 이념 속에는 현상들의 재현이 객관적 형태로 미리 정해져 들어 있다. 요컨대 모든 이념은 세계의 이미지를 자신 안에 담고 있는 셈이다. 이념의 재현을 위한 과제는 무엇보다 이념 안에 담긴 세계의 이미지를 축소판으로 그러내는 것이다.

바로크 비애극에 대한 경시와 오해

드라마는 문학의 여러 형식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역사적 반향에 호소한다. 바로크 드라마는 이러한 반향을 결여하고 있다. 셰익스피어 드라마의 풍부함과 자유분방함은 동시대 독일 드라마 작품의 빛을 삼켰고, 독일 드라마 작품들은 극장에서 공연하기에 너무 진지했다. 바야흐로 자라나기 시작했던 당대 독일 문헌학의 관점은 독일 드라마의 노골적인 비민중성을 외면했고, 비애극의 뻣뻣한 형식은 문학 연구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바로크 작가들의 인상 역시 사람들이 그들에게 역사적, 전기적 묘사를 유도할 만큼 매력적이지 않았다. 요컨대 바로크 드라마는 동시대인들에게 고대 비극의 일그러지 모습으로만 보였다. 바로크 비애극은 고대 비극의 투박한 르네상스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비애극은 비극에 견주어 무수한 양식 상의 결함을 지닌 작품들로 간주된다.

가치 인정

그동안 바로크 비애극을 구제하려는 시도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기대고 있었다. 이러한 시도들은 바로크 비애극이 고전 비극의 핵심 요소를 충족한다는 점을 입증하며 바로크 비애극의 가치를 재평가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러 형태의 편견에 사로잡힌 연구자가 생산하는 평가는 대상에 대한 혼란을 가중할 뿐이다. 사정을 제대로 분별하려면 혼란의 시작까지 거슬로 올라가 그곳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효과를 두려움과 연민이라는 감정에서 찾았다. 심리적 효과에서 예술작품의 가치와 척도를 기대하는 이러한 논의를 예술철학의 방법에서 제외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오직 비극만이 두려움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고 보지 않았으며, 이 두 감정은 고유한 예술 장르를 형성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다.

한편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기지에 찬 말을 간결하게 늘어놓으며 바로크 드라마의 필연성을 입증했다고 평가하는 주장들 역시 제거해야 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필연성이라는 장식어는 우연과 대비되는 역사적 필연성을 의미하기도, 대가의 걸작에 대비되는 어떤 주관적 필연성을 의미하기도, 어떤 작품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선험적 필연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잘못된 장식어는 문학을 구제한다는 명목 하에 그것을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시키거나, 대상에 대한 혼란을 가중할 뿐이다.

바로크와 표현주의

이처럼 19세기 말에 이루어진 비애극에 대한 연구는 비애극이라는 형식을 규명하려는 작업과는 전혀 동떨어진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비애극에 대한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접근 방식인 혼합주의는, 문화사, 문학사, 전기적 관찰 방식을 뒤섞어 예술철학적 성찰을 대체하고자 시도한다.

한편 새롭게 등장한 표현주의는 이전의 세계나 멀리 떨어진 세계의 기록들을 헤집고 그것을을 억지로 파헤친 뒤 자신의 독단적 상상 아래로 편입하는데, 역사가가 창작자의 자리로 슬그머니 들어서려는 이러한 불길하고 병적인 암시성을 감정이입이라고 한다. 표현주의의 이러한 분출과 더불어 시작된 바로크 비애극에 대한 재평가는 비평가와 대상 사이의 관계를 드러낼 뿐, 대상 자체에서 새로운 연관관계를 해명하고 이를 통해 대상의 이념을 제시하는 진정한 통찰을 보여줄 수 없다.

몰락의 시대가 언제나 그렇듯 바로크는 본래적인 예술적 훈련의 시대라기보다 줄기찬 예술의지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예술에서 가장 현실적인 것은 고립되고 완결된 작품이지만, 예술의지에는 형식만이 접근할 수 있을 뿐 잘 만들어진 개별 작품은 결코 여기에 도달할 수 없다. 바로크 비애극은 바로 이 의지 속에 자신의 근거를 두고 있다. 언어가 세상사의 중압을 견뎌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어휘들, 새로운 정념을 표출하고자 갈망하는 신조어들 속에서, 바로크 작가들은 가장 강력한 표현들을 발견하고 사용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크 비애극은 기존의 문학 양식에 비교하면 미완으로 여겨질 만큼 투박하지만, 이러한 강압성은 어떤 문학적 생산의 징표이다. 바로 이 지점이 바로크적 정신상태의 이념을 재현하고 있다.

자신을 위하여

모순 가운데 소용돌이치는 이 시대의 정신 속에서 바로크 시대의 의미를 현재화하려는 시도는 현기증을 불러 일으킨다. 멀리서 다가가는 관찰, 총체성에 대한 조망을 우선 단념하는 금욕적인 훈련만이 정신을 견고하게 만들 수 있으며, 이 견고함만이 소용돌이치는 파노라마의 광경 속에 자기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게 해준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바로 이 훈련 과정을 기술한다.

#발터벤야민 #벤야민 #WalterBenjamin #독일비애극의원천 #라비린토스 #labyrinthos

© Labyrinth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