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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와 예수


“디오니소스와 예수에게서 순교자도 동일하며 열정도 같다.”

“En Dionysos et dans le Christ, le martyre est le même, la passion est la même.”

들뢰즈는 니체의 비극론을 재구성하면서, (니체가 나중에 <비극의 탄생>을 회고하며 밝히고 있듯이) 비극에서 진짜 대립하는 것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이 아닌,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라고 말합니다. 니체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만이 비극의 유일한 주인공,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유일한 긍정의 신입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삶을 정당화되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관념에 의해 재단되고 판단되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관념에 의해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아야 하는 어떤 것으로 뒤바꾸는 기막힌 몰락의 천재인 셈이지요. 그런데 들뢰즈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소크라테스 안에도 여전히 그리스적인 어떤 면모가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들뢰즈는 단순히 소크라테스라는 변증술은 비극의 진정한 적대자라고 보기에는 어쩐지 부족하고 애매한 요소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어떤 것의 진정한 적대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것은 거꾸로 그것이 본래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 들뢰즈는 반복해서 니체의 비극론이 정확히 무엇에 반대하는지, 그것이 무엇에 반대하면서 어떤 것을 정립하고자 하는지에 주목하고 있고요.

앞서 비극의 죽음을 거론하며 들뢰즈는 변증법에 의한, 소크라테스적인 것에 의한 죽음을 먼저 언급한 뒤 이어서 비극의 두 번째 죽음, 기독교에 의한 죽음을 거론한 바 있지요? 여기에서도 비극의 적대자로서의 소크라테스를 검토한 뒤 들뢰즈는 이제 예수라는 기독교적 형상으로 초점을 옮깁니다. 니체가 비극의 적대자로서 소크라테스의 형상을 제시할 때 그것이 실제 소크라테스라는 인물과 일치하는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요소일 수 있다고 논의했었지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니체가 제시하는 예수의 형상이 실제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혹은 그것이 기독교적 맥락에서 예수라는 표상이 갖는 의미에 얼마나 잘 부합하는지를 기준으로 니체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은 썩 도움이 되는 접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역시 그보다는 니체가 자신의 사유 속에서 ‘예수’라는 형상으로 무엇을 비판하고자 하는지 그 본질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 더 좋겠지요.

우리는 니체의 저작에서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 차례 발견할 수 있지요. 물론 니체의 비극론은 훨씬 더 심원합니다. 니체는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종종 자신의 서명으로 ‘디오니소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제까지 아무도 비극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의미를 자신이 비로소 밝혀냈다는 의미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비극의 발명자라고 선언했던 사람답지요.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힌 자’라는 표현 역시 니체가 자신의 서명으로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또 신은 죽었다고 말했으면서도 자신이 신의 후계자라고 말한 적도 있고요. 혹자는 이를 두고 전형적인 착란의 증상이라고 (예컨대 니체를 진단했던 오버베크의 정신과 의사처럼) 말하지만, 그보다는 디오니소스와 예수 사이에 존재하는 심층적인 관계, 표면적인 대립의 차원만으로는 그것에 담긴 모든 의미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어떤 관계, 즉 비극의 정수와 그 궁극의 적대자 사이에 존재하는 은밀한 관계를 드러낸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겁니다.

니체에 따르면 예수라는 상징 아래 기독교는 비극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삶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비극과는 정반대로 삶에 대한 태도를 정향하지요. 변증법으로 삶을 집어삼키는 소크라테스가 여전히 조금은 디오니소스적이고 조금은 아폴론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 (즉 여전히 그리스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 반면, 예수는 그야말로 비극과는 상극입니다. 흥미롭게도 니체의 비극론에서 소크라테스는 겉보기에 비극과 전혀 다른 반대자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그 아래에서 여전히 조금은 비극과 유사한 면모를 지니고 있고, 예수는 겉보기에는 비극과 흡사한, 이를 테면 같은 열정, 같은 죽음, 같은 부활을 지닌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비극과 전혀 상반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디오니소스가 삶에 대한 긍정을 말할 때, 예수는 삶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디오니소스가 비극 속에서 사지가 찢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지요.

비극과 기독교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큰 차이는 삶과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삶과 고통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비극과 기독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차이가 있어요. 비극이 궁극적으로 생의 고통을 긍정할 것을, 나아가 그 고통을 고통이 아닌 생의 자연스러운 요소로서 긍정할 것을 제시하는 반면 기독교는 그것에 대한 대속과 사랑을 제시합니다. 마치 변증법이 삶의 어떤 속성을 모순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부정, 극복, 지양하려 들었던 것처럼, 기독교 역시 삶에서 그 속성을 고통으로 파악하고 그것에 대한 대속, 용서, 사랑을 주장하지요.

물론 기독교는 사랑을 말합니다. 하지만 니체는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은 마치 독수리가 팔다리를 잃고 죽어가는 어린 양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랑이라고 비판합니다. 마치 용서라는 관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라는 관념이 선행해야 하는 것처럼, 기독교적 사랑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의 대상으로서 적합하지 않은, 사랑스럽지 않은, 무가치한 무엇이 존재해야 합니다. 사랑 받아 마땅한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이라면 특별할 것 없는 그저 정당하고 합당한 관계에 지나지 않겠지요. 그래서 기독교적 사랑의 의미는 대상의 무의미에 비례합니다. 즉 사랑할 가치가 없는 대상에 대한 사랑일수록 더 큰 사랑이 되는 것이지요. 기독교적 사랑의 무한성은 삶의 무한한 무의미와 정확히 대칭을 이룹니다. 더 큰 용서일수록 더 큰 죄를 함축하는 것처럼 용서와 사랑을 기준으로 삶을 바라볼 때, 삶의 의미를 더 커다란 용서, 더 큰 사랑에서 찾는다면 역설적으로 더 큰 죄와 더 큰 고통을 원하는 셈이지요. 결국 기독교라는 세계관은 (비극과 달리) 삶을 긍정하면서 고통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규정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사랑과 용서의 대상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에 앞서 삶이 고통이라는, 죄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셈이고 사랑과 용서를 기쁘게 여긴다는 것은 생의 고통과 생에 대한 부정을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니까요. 디오니소스가 고통을 긍정하면서 그것의 총체로서의 삶 또한 긍정할 때, 예수는 고통을 부정하기 위해 용서와 사랑이라는 관념에 기대기 때문에 결국 삶 역시 함께 부정 당하고 마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 (후략)

2018. 1. 31.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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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etzsche #GillesDeleuze #니체 #들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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