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변증법에 반대해서


“니체는 변증법주의자인가?”

“"Nietzsche est-il «dialecticien»?"

대상을 점유하고 있는 힘들의 관계는 왜, 어떻게 변화할까요? 또 변화하는 힘들의 관계는 정확히 무엇일까요? 니체가 말하는 힘들의 다수성은 때로 변증법과 유사한 외관(apparences)을 갖습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니체의 사유와 변증법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유사한 것은 외관, 즉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앞서 원자론만으로 세계를 설명하려고 할 때 직면하는 한계에 대해 언급한 바 있지요. 들뢰즈는 힘과 의지를 세계의 근본으로 파악하는 니체의 세계관이 무엇과 충돌하는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니체의 주장은 우선 원자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물리환원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즉각적인 비판인 동시에, 나아가 세계의 다수성을 부정하고 세계의 본질을 부정성으로 상정하는 헤겔의 주장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이룹니다.

우선 여기에 등장하는 헤겔의 일부에 대해서만 아주 간단하게 짚고 넘어갈까요? 헤겔은 세계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정신과 그것의 근본 속성으로서의 부정성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하나가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으로 나뉘고 이 갈등을 통해 자신을 다른 무엇으로 지양하는(aufheben) 과정을 변증법이라는 개념을 통해 파악하지요. 헤겔은 현실 세계의 모든 생명과 운동, 활동의 원리가 곧 변증법이라고 말합니다. 헤겔이 ‘절대정신(absoluter Geist)’이라 일컫는 근본 존재는 세계 속에서 처음부터 완전히, 완벽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다. 시간 속에서 자신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지요. 시원이 품고 있는 가능성 가운데 잠재적인 모순이 현실화하면서 원래의 것과 그것에 반하는 것으로 나뉘고, 갈등하고 투쟁하는 가운데 시원은 애초에 발생한 모순을 극복한 새로운 무엇으로 변화하지요. 헤겔은 이것을 어떤 대상의 단순한 변화와 구분하여 변증법적 지양이라고 일컫습니다.

거칠기 짝이 없게 간단하게 도식화했지만 이 도식에서 세 가지 정도를 상기하면 좋겠군요. 하나는 이렇게 변증법적 지양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대로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A가 ~A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해서 B가 되었다면, B는 다시 ~B로 나뉘어 자신을 C로 지양하고, C는 ~C를 지양해 D로, D는 ~D를 지양해 E로 … 하는 과정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지요. 물론 엄밀히 말해 헤겔은 이 과정에 끝이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의 정신이 자신을 온전하게 세계 속에 드러내는 것과 그 과정을 역사라고 본다면, 헤겔은 그것의 성취가 곧 역사의 종언이라고 믿었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헤겔의 관점에서는 정신이 자신을 드러낸 모습 그 자체가 곧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에 세계사가 곧 정신의 변증법적 자기 전개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주저 제목이 정신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는가, 즉 <정신현상학>이기도 하고요.

다른 하나는 A가 B, C, D, E … 로 전개하는 과정이 모두 ~A, ~B, ~C, ~D … 의 부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A는 ~A를 통해, B는 ~B를 통해, C는 ~C를 통해, D는 ~D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이 모든 과정은 부정을 통해 진행됩니다. A 안에 잠재되어 있던 ~A의 가능성이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즉 A가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B가 되고, B 역시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C가 되고, C 역시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D가 됩니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사실 너무 당연한 일일까요? 헤겔의 정신이 현상하는 과정을 절대적인 법칙으로 제시하고자 했는데, 헤겔의 가장 중요한 (동시에 최악의) 저작으로 꼽히는 저술이 <논리학>인 것도 이러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또 헤겔은 정신이라는 단일하고 유일한 실체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A가 ~A가 되는 것은 어떤 외부와의 접촉이 충격 때문이 아닌, A 자체가 이미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모순의 가능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B도, 또 ~B와 C, D, E … 도 모두 A 안에 잠재적으로 들어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따라서 세계 전체는, 당대에 펼쳐진 현실 이상의 모든 가능성은 절대정신 안에 들어 있고 절대정신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헤겔에 따르면 세계의 변화와 다수성은 그저 임의의 시점에, 겉으로만 여럿으로 보일 뿐 사실 모두 단일한 정신의 자기 운동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들뢰즈는 니체를 두고 변증법의 가장 강력하고 지독한 적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 니체에 천착해 변증법의 문제를 다루지요. 거꾸로 말하면 니체에게 있어, 그리고 들뢰즈에게 있어 변증법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고 지독한 적,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중요한 논적입니다. 오늘날 많은 곳에서 헤겔은 철학의 종언, 역사의 종언을 선고했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난삽하기 짝이 없는 문체 덕분에 아예 읽히지도 않은 채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상당히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헤겔 이후의 모든 형이상학은 그 자신이 인지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헤겔을 극복할 것을 출생의 조건으로 갖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미국의 한 철학과 교수는 헤겔을 두고 철학사를 통틀어 최악의 산문이라고, 헤겔을 읽는 것은 정신적으로 모래를 씹는 것과 같다고 언급한 바도 있습니다만, 하지만 오해는 금물입니다. 실소를 자아내는 이러한 선고의 배경에는 그럼에도 왜, 모래를 씹는 것 같은 최악의 산문이 왜 여전히 중요한가에 대한 강조가 들어 있으니까요.

들뢰즈는 사실상 니체의 가장 중요한 논적인 헤겔에 대해 니체가 잘 몰랐던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니체가 분명 헤겔적인 운동(mouvement hégélien)에 익숙했으리라 믿는다고 밝힙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헤겔적 운동은 운동의 원리로서의 변증법이라는 개념과 헤겔적인 사유의 움직임, 헤겔적 사조 모두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니체의 철학이 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 비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들뢰즈는 그것은 바로 변증법이라고 확언합니다. 니체의 저작 전체에 반헤겔주의(anti-hégélianisme)가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있다고, 또 우리가 힘에 대한 니체의 이론 속에서 그것을 따라갈 수 있다고 말하면서요.

자, 앞서 변증법이 담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언급했지요? 니체가 힘이 다른 힘을 대상으로 취한다고 말할 때, 또 서로 다른 힘들 사이의 경합과 위계를 말할 때 일견 표면적으로 그것은 변증법과 유사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A라는 힘이 점유하고 있던 대상 a를 B라는 힘이 점유해 그것이 대상 b로 변하는 과정을 생각해본다면, A와 B의 관계는 A와 ~A의 관계로 보일 수 있으니까요. (∵ B ⊂ ~A) 게다가 이 과정에서 힘들의 관계가 변화하는 모습은 마치 변증법처럼, 니체가 말하는 힘과 힘의 관계 또한 부정에 의존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요. 일견 유사하게 보이는 둘 사이의 차이를 확실하게 변별하고 심지어 니체가 반헤겔적이라는 것을 보이는 것, 변증법으로부터 니체를 구원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는데, 바로 여기에서 힘에 대한 니체의 철학 가진 요체와 함의, 그리고 들뢰즈가 니체를 통해 궁극적으로 펼치고자 하는 주장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어떻게 세계의 근본 속성을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바꿀 것인가? 어떻게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 환원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가? 어떻게 세계 속에서 서로 다른 차이가 공존할 수 있는 가능 근거를 확보할 수 있는가?

... (후략)

2017. 12. 20. / Alter Ego

info@labyrinthos.co.kr

#Nietzsche #GillesDeleuze #니체 #들뢰즈

© Labyrinth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