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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에서 가장 문제적 인물은 고른다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거리에서 채찍질 당하는 말을 끌어안고 우는 니체나 착란 상태에서 아내를 교살하고 법정에 섰던 알튀세르, 하숙집 방에서 혼자 유리알을 매만지는 스피노자, 자본주의의 심장부 대영제국도서관 구석에서 <자본론>을 집필하는 마르크스 같은 인물들이 당장 떠오를 겁니다. 시계 마냥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를 걷는 칸트나 세계대전 속 참호에서의 사색으로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선언한 비트겐슈타인은 어떻습니까? 나치 협력자라는 오명을 여전히 꼬리표처럼 붙이고 있는 하이데거나 방탕하게 생활하며 마니교에 심취했던 젊은 아우구스티누스, <에밀>을 발표한 뒤 존경받는 문필가에서 당장 온 국민에게 쫓기는 수배자 신세로 전락했던 루소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나라를 정복한 로마 장군의 부름을 무시하고 바닷가 모래 위에 자신이 펼쳐놓은 수학 문제와 씨름하다 병정이 휘두르는 칼에 맞아 죽은 아르키메데스나 멀쩡한 대낮에 사람을 찾는다며 등불을 키고 돌아다녔던 디오게네스, 화산 꼭대기에 올라 분화구에 뛰어들었다는 엠페도클레스 같은 인물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요. 물론 이런 예시들은 다분히 철학에 대한, 특히 천재나 위대한 인물에 대한 낭만적이고 신화적인 후대의 시선이 잔뜩 반영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만, (굳이 수를 매긴다면 예나 지금이나 요란한 소동 없이 성실하게 자신의 문제에 몰두하는 철학자들이 훨씬 많을 겁니다.) 대체로 철학은 문제적인 사람들의 문제적 생각들, 즉 뭔가 좀 이상한 사람들의 기록이라는 생각을 충분히 해봄직 합니다. 과장을 조금 보탠다면 철학사를 곧 미친 사람들의 계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도 그 가운데 특출하게 이상한 사람을 하나만 뽑는다면 소크라테스는 아마 수위를 다투는 인물일 겁니다. ‘가장’이라는 부사를 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요. 오늘날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그의 입을 통해 직접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철학자에 대한 당대나 후대의 평가가 주로 그가 남긴 저작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보통이라면,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저작도 직접 집필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다른 어떤 철학자보다도 더 생생하게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까닭은 그가 아주 훌륭한 서기(!)를 곁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이기도 한 플라톤이라는 인물이지요. 흔히 플라톤이 남긴 저작을 ‘대화편’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명칭처럼 플라톤의 저작은 모두 몇몇 인물이 등장해 대화를 주고받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바로 이 대화들을 통해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오히려 직접 살펴볼 수 있지요. 소크라테스를 포함해 대화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실존 인물입니다. 정확히 생몰 연대를 확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만 등장 인물들은 대부분 소크라테스가 활동했던 시대에,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이지요. 플라톤의 저작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나 고르기아스 같은 당대의 유명한 소피스트들과 만나 정의나 쾌락의 문제를 놓고 누구의 생각이 더 타당한지 담판을 벌이기도 하고, 그에게 관심을 보였던 메논이나 알키비아데스 같이 아테네의 창창한 젊은 청년들과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했던 격언으로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는 바로 아테네에서 본격적인 정치가로 활동하기 직전 소크라테스를 찾아온 알키비아데스에게 그가 했던 말이지요. (물론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정계에 입문합니다. 그리고 동서고금을 통틀어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화려한 성공을 거두지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법정에 서야 했던 혐의와 법정에서의 최후 진술도, 사형을 선고 받은 뒤 감옥에서의 마지막 모습 또한 대화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을 <국가>도 일단 다른 플라톤의 저작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는 주요 등장 인물인 폴레마르코스와 트라쉬마코스, 글라우콘 등의 청년들이 정의와 올바름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국가>의 도입부에서 어느 날 소크라테스와 청년들은 길을 가던 중 케팔로스라는 아테네의 원로와 마주칩니다. 그는 전날 아고라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정의란 ‘속이지 않고 빚지지 않는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이들에게 말하지요. 그리고서는 무책임하게(!) 그냥 가던 길을 갑니다. 자기 할 말만 마치고 바쁘다고 자리를 뜨는 건데요, RPG 게임에서 퀘스트를 던지고 떠나는 NPC처럼 ‘일단 내 생각은 그런데 사실은 나도 잘은 모르겠고 마침 똑똑한 소크라테스 선생까지 함께 있으니 남은 이야기는 너희들끼리 마저 잘 해보라’ 정도라고 할 수 있겠군요. <국가>뿐만 아니라 대화편 곳곳에서 등장하는 이런 연출들을 살펴보는 것도 플라톤을 읽는 재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예컨대 <향연>의 마지막 장면에는 한바탕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모두가 사랑 예찬의 여운을 음미하고 있을 때 다른 연회 자리에서 술에 잔뜩 취한 알키비아데스가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서는 ‘소크라테스 선생이 여기에 있다고 들었다!’며 소란을 떠는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고, <고르기아스>에서는 고르기아스와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끝난 뒤 옆에 있던 칼리클레스라는 인물이 불쑥 끼어들어 소크라테스에게 ‘지금까지 선생이 한 말은 모두 농담이지요? 설마 진짜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건 아니겠지?’라며 농담과 걱정이 섞인 어조로 ‘당신 그런 소리 하고 다니다가는 법정에 끌려가기 딱 좋소’하고 말을 건네기도 하지요. (그리고 이후에 이어지는 칼리클레스와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플라톤의 전체 대화편 중에서도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플라톤을 읽는 재미는 이것 말고도 많으니 앞으로 얼마간 함께 살펴보도록 하시지요. 모쪼록 ‘읽는 재미’를 발견하시면 좋겠군요. 서양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이라는 화이트헤드의 지적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극렬하게 플라톤을 비판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인 러셀조차 ‘어쩌면 철학은 플라톤처럼 생각하는 방법의 총합’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기까지 했던 사실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만큼 플라톤과, 플라톤처럼 생각하는 것이 의미심장하다는 의미겠지요.

본격적으로 <국가>의 내용을 다루기에 앞서 간단하게 번역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빼놓을 수 없겠군요. 좋은 번역은 어떤 번역일까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좋은 번역인가, 독자의 기준에서 읽기 편한 것이 좋은 번역인가에 대한 논쟁은 사실 쉽게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단순한 지시관계나 구체적인 수행성을 가진 내용이라면 사실 출발어와 도착어의 간격이 멀지 않을 수 있겠지만, 추상적인 의미나 어떤 이념, 매우 특정한 묘사 등의 경우라면, 특히 그것이 고유한 스타일까지 갖추고 있는 경우라면 번역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있어서 그렇지요.

번역의 문제를 살필 때에는 반드시 번역의 두 층위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바로 언어의 차원과 맥락의 차원이지요. 이들 각각은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 어떤 맥락에 있는 것을 다른 맥락 속으로 가져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을 <국가>의 경우라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고대 그리스어로 이루어진 저작을 전혀 다른 한글이라는 언어로 옮기는 문제와, 아테네라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특정한 맥락을 우리가 가진 당대의 맥락으로 옮기는 문제를 생각할 수 있겠지요. 이건 단순히 말을 옮기는 문제를 훨씬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예컨대 <국가>에서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시에 대한 논의가 많은 경우 ‘시인추방론’ 정도의 이름 아래 ‘플라톤이 생각한 이상 국가에 진정한 예술의 자리는 없다’라는 식으로, 어처구니 없는 수준에서 곡해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건 흔히 오역이라고 일컫는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문제입니다. <국가>를 한글로 옮긴 어느 번역문도 문자적인 수준에서 오역이라고 할 만큼 큰 오류를 보이지는 않으니까요. 이러한 문제를 단순한 오역이라고 칭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가 만큼이나 그 사람이 어떻게 말했는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라는 살피지 않고 문자 그대로만 덮어놓고 이해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오독이라고 할 만하지요. 말을 옮기는 번역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의 의미를 다시 옮겨 읽어내야 하는 독자가 안고 있는 번역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이 문제는 <국가>에서 해당 부분을 다룰 때 다시 한 번 논의하기로 하고, 아주 근본적인 수준에서 누군가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것은 전부 번역의 성격을 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어떤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번역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점 정도를 언급하고 넘어갑시다. 번역은 이해와, 해석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요.

… (중략) …

브레히트는 익숙한 것들도 새롭게 보게끔 만드는 연극의 힘에 주목합니다. 이에 따르면 일상에서 마주치는 상황들은 부조리와 모순들로 가득하지만 이것들은 늘 일상이라는 익숙한 틀 속에서 경험되기 때문에 쉽게 지각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일상이라는 경험 공간은 익숙한 만큼 무뎌진 경험들로 가득 차 있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일상을 무디게 만드는 이유에는 아마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익숙한 것들의 반복이라는 요소도 분명 작용하고 있을 테고 의외로 일상이 분주한 경험 공간이기 때문에 주위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만큼의 여력을 인간에게 허용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그래서 브레히트는 연극이라는 매체가 갖는 특징에 주목합니다. 예컨대 기억을 더듬는다면 길에서 하루에 한두 번쯤은 마주쳤을 법한 노숙인이라는 존재는, 일상이라는 안전한 틀 속에서 경험될 때 전혀 문제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연극이라는 창구를 통해 노숙인을 바라본다면 그의 존재를 비로소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면 피상적인 것들의 재발견이라고 할까요.

동서고금 사상과 종교를 막론하고 바로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참 한결 같습니다. 플라톤 역시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통해 사물의 실상을 똑바로 보는 문제를 다루고요. (이번 세미나에서 곧 나옵니다. 기대하시라.) 브레히트가 연극이라는 장치를 통해 현실을 직시할 것을 천명한 것과 비슷한 지점에서 우리도 플라톤이 만든 무대를 함께 즐길 수 있다면 좋겠군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9. 15. / Sutome Apothec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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