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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quid Modern World: I rebel, therefore we exist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삶을 기댈 안전하고 고정적인 원칙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개인들의 공존 또한 같은 규범을 공유하는 단단한 공동체의 그것이 아닌, 일종의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공존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바우만은 이를 가리켜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라고 일컫습니다. 영역하면 ‘mode of living’ 정도가 되겠군요. 한국어로 직접 옮기면 ‘생활방식’쯤에 가깝겠지만, 통상적으로 ‘잠정협정’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일상적인 용법이 아닌 외교 용어로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에 외교상 의미에 따라 옮기는 것이지요. 모두스 비벤디는 국제법에서 분쟁 해결을 위해 영속적이고 상세한 내용을 포함하는 정식 협약 체결 전, 분쟁 당사자들이 임시로 편의를 위해 체결한 협정이나 일시적 합의를 의미합니다.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법률상의 계약 같은 영속적이고 구체적인 합의를 삶의 공통 기반으로 확보할 수 없고, 다만 잠정적이고 일시적이며 느슨한 형태로만 공통의 규범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예컨대 그가 특정 집단이 공유하는 문화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를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오늘날 다양한 문화들 사이에 어떤 위계를 정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예를 들어 조선 시대와의 비교를 떠올려볼 수 있겠군요. 조선에서는 계층에 따라 입는 의복이나 먹는 음식, 취미와 교육의 내용, 사용하는 문자, 사회적 의례의 형식, 말씨와 태도에 이르기까지 개인이 속한 집단에 따라 유무형의 문화적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쉽게 말해 양반의 문화와 평민, 천민의 문화가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위계를 이루는 방식으로요. 물론 오늘날의 시선으로 과거를 거슬러 바라본다면 양반 계층의 문화나 평민, 혹은 천민 계층의 문화 또한 우리 역사를 이루는 등가의 문화적 유산이라고 볼 수도, 또는 이들 각각이 별개의 문화가 아니라 서로 얽혀 있는 한 시대의 문화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 시대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위계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문화적 경계가 뚜렷하게 존재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겁니다. 반면 오늘날에는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과 대중가요를 듣는 것, 조성진의 연주를 좋아하는 것과 도끼의 랩을 좋아하는 것 사이에 위계를 설정할 수 있는가, 즉 이를 우열로 나눌 수 있는가는 사실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또 과거처럼 신분이나 계층을 범주로 문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설령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에 우열을 구분한다고 해도, 클래식을 좋아하는 집단을 상위 문화 집단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또 설령 클래식 음악에 대한 선호를 기준으로 상위 집단을 설정한다고 해도, 이들이 문화의 다른 영역, 예컨대 복식이나 식문화에 있어서도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을 이룰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러한 관점에 대한 반론으로 계층, 특히 경제적인 자원을 기준으로 집단을 분류했을 때 이들 사이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문화적 차이에 대한 부르디외의 접근을 잊지 않고 참고할 수 있겠지요.)

일반적으로 문화라는 개념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며 자신들의 삶을 형상화하는 모든 행위를 포괄합니다. 인간이 공동체적 삶의 과정을 통해 실현하는 문화는 인간 삶의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요소들은 물론 학문, 예술, 종교가 이루는 업적이나 언어가 기록에 관련한 매체들, 관습과 생활양식들, 사회 규범과 제도, 전승된 체험이나 각종 선례들, 공동생활에서 발생하는 행위와 그 결과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이지요. 문화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통해 오늘날의 문화를 바라본다면 시대를 전부 포괄하는 하나의 단일한 문화를 설정할 수 있는가는 상당히 까다로운 문제가 됩니다. 굳이 떠올린다면 ‘유동성’이나 ‘소비 문화’처럼 굉장히 광범위한 차원에서의 접근만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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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 짐멜은 <돈의 철학>에서 돈이 갖는 종교적 기능에 대해 고찰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단순히 상품 교환의 매개물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인 무엇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목적이 된 돈은 원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일종의 신화적 존재로 자리매김하지요. 이제 돈이 일과 땀과 수고의 자연스러운 대가가 아니라, 돈을 얼마나 버느냐에 따라 일과 땀과 수고의 가치가 매겨집니다. 돈은 단순한 벌이의 대상이 아닌 숭배의 대상으로 격상하고요. 숭배의 대상으로 돈은 신처럼 전지전능합니다. 실제로 돈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신에 그랬던 것처럼 돈은 모든 행위와 가치의 보편적 기원이자 원천으로 자리하니까요. 짐멜에 따르면 신성화된 돈의 세계에서 인간은 사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쓰이는 돈이지, 돈을 쓰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끊임없이 소비와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의 또다른 특성을 감안한다면, 돈을 벌기 위한 노동에는 끝이 없습니다. 마치 소비와 욕망이 끝나지 않는 것처럼요.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은 대체로 엇비슷한 것이 되지요. 농부의 일과 사냥꾼의 일이, 미장이의 일과 소리꾼의 일이 비슷한 것이 됩니다. 노동을 구성하는 물리적, 사회적 행위의 질적 차이와 무관하게, 모든 노동은 돈을 벌기 위한 활동이자 노동의 대가로서 주어지는 돈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돈에 의해 환산된 노동은 생산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인간이 사라진 노동에는 당연히 인간적인 휴식도, 신학적인 차원에서의 은총도 없습니다. 다만 일과 일 사이의 불안정한 공백이, 잠깐의 휴지기가 있을 뿐이지요. 인간은 그저 이 작은 공백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고자 노력하면서 일과 일 사이를 왕복할 뿐입니다.

카뮈는 이러한 현대의 특성을 날카롭게 포착합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시지프의 운명에 빗대지요. 신화 속 시지프는 몹시 꾀가 많은 인물로 등장합니다. 도둑들의 수호신 헤르메스에게 도둑질을 배운 절도의 명수 아우톨리코스의 도둑질을 잡아내 그가 훔친 소를 돌려받기도 하고, 그를 벌주기 위해 제우스가 보낸 죽음의 신을 속여 토굴에 가두기도 하지요. 우여곡절 끝에 죽음의 신에게 잡혀 명계로 끌려가는 순간에도 꾀를 부려 다시 지상으로 돌아옵니다. 아내에게 자신의 시신을 매장하지 말고 대로 한복판에 던져두라 일러 놓고서는, 명왕에게 남편의 장례도 치르지 않는 부덕하고 경건하지 못한 아내를 벌주고 잘못을 바로 잡은 뒤 명계로 다시 돌아오겠다 허락을 받은 뒤 그 길로 지상으로 도망치기도 할 만큼 꾀가 많은 인물입니다.

신화는 이런저런 장면들을 전하지만 시지프는 생전의 일화들보다 사후 그가 받은 형벌로 더 유명합니다. 그는 생전에 저지른 속임수와 악행에 따라 무거운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습니다. 문제는 산의 꼭대기가 마치 바늘처럼 뾰족해서, 간신히 바위를 정상까지 밀어 올리면 이내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지프는 영원히 산을 오르내리며 바위를 굴리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영원히 노역을 반복하며 굴러 떨어진 바위를, 그가 다시 정상으로 올려야 하는, 하지만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그 바위를 바라보며 비탈을 내려가는 동안이 오직 그가 잠시 쉴 수 있는 순간일 뿐이지요.

카뮈는 현대인도 노동의 반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시지프의 운명에 빗대면서도, 그의 운명을 비참을 넘는 승리의 운명으로 새롭게 해석합니다. 마치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고 운명을 저주하지 않는 프로메테우스의 태도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괴로워하는 수동적 인물이 아니라 담대하면서도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는 모습으로 시지프를 그리는 것이지요. 부조리한 세계의 조건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실존적 인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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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에 따르면 부조리는 미덕이나 행복의 반대나 결핍이 아니라 같은 땅에 속하는 두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동전의 양면과 같은 세계의 두 측면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카뮈는 우리가 행복과 부조리(가 낳는 고통) 가운데 어느 하나만 선택할 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지옥에서의 시지프에 대해 그가 받은 형벌 외에 아무것도 전해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고통받는, 오직 고통 뿐인 모습으로 그리는 것은 부조리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나약함이 빚은 일종의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요. 카뮈에 따르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일에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하는 일은 이 땅에서의 정열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입니다. 그리고 시지프가 비극적인, 한국어에서 이 말이 갖는 관용적인 의미가 아니라 비극의 본래적 의미에서, 즉 자신의 역량을 초과하는 운명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그가 비극적인 까닭은 바로 그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고통스러운 것도 어디까지나 그가 깨어 있기 때문이지요. 카뮈는 부조리한 자신의 운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와 달리, 깨어 있는 가운데 자신의 운명을 감당하는 시지프야말로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 편지에서 카뮈를 인용하는 바우만도 이와 비슷한 인식을 공유합니다. 높은 담장과 보안 시설 속에서도 불안과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예를 들면서, 예기치 않은 일에 대한 관용과 공감이 희미해질수록 일상의 활기찬 모습과 생을 확장할 수 있는 다채롭고 풍부한 경험의 가능성 또한 줄어든다고 말하면서요. 유동성을 제거하는 것,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불안한 세상과 담을 쌓는 것은 해답이 될 수는 없다고 분명하게 못 박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바우만은 이러한 태도는 마치 아이들이 완벽하게 안전한 상황에서 수영을 배울 수 있도록 보호하기 위해 마치 수영장의 물 자체를 아예 빼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몇 번의 밤 동안 함께 읽은 바우만의 편지 외에도, 의외로(?) 그의 책들은 한국에 꽤 많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나 영국의 노동 문제를 다루는 초기 연구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책이 들어온 셈인데요. 그 가운데 유동하는 근대 세계의 문제를 다루는 바우만의 다른 저작 <유동하는 시대(Liquid Times)>는 제목처럼 본격적으로 ‘유동성’이라는 문제를 광범위하게 검토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는 <모두스 비벤디>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지요. 이 책에 등장하는 바우만의 생각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은 책의 머릿말에서 그가 밝히는 태도입니다. 책의 서문에서 바우만은 자신은 그저 질문을 던질 뿐, 명쾌한 해답은 고사하고 해답을 제시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당당하게도 밝힙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뻔뻔한데요.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문제만 잔뜩 늘어놓고 무책임하게 슬쩍 발 빼는 것 아니냐 따져 물을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처럼 정말 중요한 것은 해답보다 질문이니까요. 마르크스가 세계를 해석하기에 급급했던 이제까지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앞으로의 철학은 세계를 변혁시켜야 한다고 천명한 이래, 19세기와 20세기의 역사는 변혁을 향한 여러 해답과 그것들의 경합이 지배한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뭐 오늘날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군요. 쏟아지는, 말 그대로 쏟아지는 범람하는 삶의 여러 문제들이 앞다퉈 해결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해답이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니까요.

문제가 풀리지 않는 까닭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물론 현대의 경우라면 처리해야 할 광범위한 사태의 양도 이유가 되겠지만 대개는 질문이 절실하지 않거나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충분한 노력을 이끌어낼 수 있을 만큼 질문 자체가 절실하지 않거나, 그러한 노력이 유효한 수준으로 모을 수 있을 만큼 질문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시사가 아니라 미시적인 삶의 영역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러한 특성은 더욱 도드라질 겁니다. 동일한 질문이라고 해도 각자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적절한 방식으로 다시 물어져야 할 테니까요. 결국 어떤 문제에 대한 거창한 해결은 차치하고서라도 유의미한 작은 변화라도 모색하기 위해서는 해답을 찾는 것보다, 정답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해법을 확인하는 것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다시 묻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해답이 아닌 각자의 질문으로 다시 묻는 일이지요.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질문 또한 각자의 몫이 될 테니까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8. 18. / Sutome Apothec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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