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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승, <친애하는 사물들>


세계는 언제나 개인에 선행합니다. 개인이 탯줄을 끊고 세계에 등장하는 것은 자신에 앞서 ‘이미 있는’ 세계로 첫 발을 내딛는 것이지요.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세계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있고, 나는 그 속에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내 의지나 판단과 무관한 어떤 자리를 부여 받는 것으로 나의 삶을 시작하기 마련이니까요.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세계를 판별하는 것은 언제나 그 다음에 이루어지는, 나중 일이지요.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면서, 자아는 자신과 세계 사이를 왕복하는 운동을 끝없이 거듭합니다. 자아는 경험을 통해 세계를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확인합니다. 혹 이 과정을 자아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세계에 대한 경험의 총체가 바로 자아니까요. 의식적인 수준에서든 무의식적인 수준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와 자신 사이에서 경험과 사유의 교차가 바로 벗어날 수 없는 자아의 기본 구조입니다. (다른 한편 자아를 이러한 경험의 구성물 내지는 결과물로 본다면, 자아와 세계 사이의 왕복이 아닌 그저 세계를 반영하는 의식만 존재할 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 개별적인 자아의 독립성이나 개체성 따위는 증발하고 말겠지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과 세계를 확인하는 것,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는 과정인 것 같지만 실은 이 두 작업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자신을 확인하는 것은 언제나 ‘이미 있는’ 세계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고, 세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조망하고 분류하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어떤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바라보는 기준을 세우는 일에 다름 아니고, 자신 바깥의 세계에 대한 경험은 이 기준의 시험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혹은 진자운동하는 추처럼 동일한 과정의 두 측면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자아에 앞서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세계를 이루는 사물들이나 관념들 뿐만이 아닙니다. 자아가 미처 자신만의 기준을 확립하기도 전에, 세계를 분류하는 무수히 많은 기준들 또한 자아에 앞서 세계 속에 존재합니다. 자아가 세계에서 경험하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의 사물과 관념을 경험하는 것처럼 자아는 어떤 기준들 또한 경험하기 마련이지요. (한편 사물이 아닌 그것의 관념에는 이미 어떤 기준들이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사물을 관념으로 증류하는 어떤 기준이 혐의처럼 묻어 있기 쉬우니까요.)

이 기준의 기원과 출처는 다양합니다. 역사, 문화, 관습, 제도, 종교, 도덕, 학문은 물론 소소한 가풍이나 우연한 사회적 관계, 그날그날의 분위기에 이르기까지, 세계는 그 자체로 단순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누고 구분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격자 속에 존재합니다. 혹은 세계는 그 자체로 단순하게 존재하지만 인간은 그 단순한 세계를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어쨌거나 자아가 바라보는 세계는 사물과 그것에 대한 관념, 그리고 기준들로 가득합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그것도 여러 가지로 발생하지요. 사물의 객관성은 자명하지만 그것을 증류한 관념은 종종 사물의 자명성에서 벗어나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동일한 사물에서 서로 다른 여러 관념들이 나오기도 하지요. (이럴 때면 무엇이 ‘진짜’인지 대립이나 갈등이 빚어지기도 합니다.) 느낌에 대해서라면 사정은 더욱 복잡합니다.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구름과 달의 배치라는 동일한 사물을 경험하고도 그것에서 서로 다른 느낌을 떠올리는 것이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각자는 왜 각자의 느낌을 갖는가라는, 세계를 인식하는 기준에 대한 물음 앞에서라면 인간은 거의 속수무책입니다. 몇 가지 그럴싸한 해법이 존재합니다만 오래 전 데카르트가 선언했던 것처럼, 느낌에 대해서는 보편적인 기준을 확립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회의를 피하기 어렵지요.

시가 불가능해지는 장소는 수사적인 의미에서, 혹은 정치적이거나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아우슈비츠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말로 시가 사라지는 곳, 시가 불가능해지는 곳은 그것의 본령이자 토대로서의 자아가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반추하는 느낌이라는 영역입니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일단은, 그리고 적어도 자아에게는 자명한데, 그 경험과 그것의 의미를 부여하는 기준이 모두 의심스러울 때, 느낌이 있기 때문에 시가 가능한 것이 아니라 느낌의 근거를 확정할 수 없기 때문에 시의 근거 또한 함께 저울에 오르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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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성은 시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지만 서정성만으로는 시에서 시적인 것을 말끔하게 분리해내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사실 시적인 것은 좋은 시에서 그만큼 선명하지만, 선명한 만큼 시에서 쉽게 떼어낼 수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시와 시적인 것이 마치 한 몸인 것처럼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더 많지요.

대상과의 합일과 대상의 자리에서 그것을 선언한다는 서정의 기본 규칙은, 애당초 인간은 사물이 아니고 사물이 인간이 될 수 없다는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정을 주장하는 일, 즉 대상과의 합일을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입니다. 자아가 세계를 경험하는 근본적인 구도가 바로 대상을 전유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쩌면 서정과 ‘서정이 아닌 것’, 즉 비(非)서정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성공한 서정과 실패한 서정이 존재할 뿐이며, 성공한 서정과 실패한 서정을 나누는 기준은 모종의 ‘설득력’에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관점은 즉각 서정에 대한 전통적인 사유들을 소환합니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와 세계의 관계에 주목했고 톨스토이는 시인과 세계의 관계에 주목했으며 바르트는 시도 시인도 아닌 시를 읽는 독자의 감상에 주목했지요. 이들의 생각은 서정성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각각의 답과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와 세계의 일치라는 지점에서, 톨스토이는 시인과 세계의 일치라는 지점에서, 바르트는 독자라는 세계와 시/시인의 세계가 일치하는 지점에서 서정의 근간을 찾았지요. 이들의 생각은 마치 가위바위보 놀이처럼 서로 꼬리를 물면서 시와 서정에 대한 수수께끼 주변을 맴돕니다.

이현승 시인은 어느 대담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하니 시의 외연이 자꾸만 좁아진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서정을 표방하는 몽상이나 세계에 대한 약탈적인 낭만이 될 때 결국 시는 거짓이 되고 말겠지요. 남은 밤 동안 거짓이 아닌 서정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이어가기로 하시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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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7. 10. / Alter Ego info@labyrinth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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