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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훔쳐가는 노래>


계간지 <창작과 비평>은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문학 간행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1966년 1월 일부 문인들이 모여 간행한 동인지 성격으로 출발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문학 담론은 물론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화 현상과 사회 문제를 폭넓게 다루는 지면으로 성장했지요. 특별히 문학에 관심이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유명 출판사 ‘창비’나 창비에서 출판한 유명 소설 (혹은 소설가) 몇몇의 이름쯤은 알고 있을 정도니까요.

<창작과 비평>은 학계의 쟁점이 될 만한 시의성 있는 주제들을 논문이나 각종 기고문, 좌담이나 대담 등을 통해 다뤄 왔습니다. <창작과 비평> 창간호에 실린 백낙청 교수의 글부터 당대 문학의 대표적인 논쟁을 다루고 있고요. 창간호에서 백낙청 교수는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라는 글을 통해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다룹니다. 암울했던 당시 사회의 실상 속에서, 문학이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개입하고 목소리를 내며 참여해야 하는가 아니면 순수문학으로 머물면서 현실과 거리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와 같이 많은 문인들, 학자들이 치열하게 고민했던 문제에 대해 ‘창작’과 ‘비평’이라는 표제로 응답한 것이지요. 작품과 현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혹은 창작이라는 행위와 현실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와 같은 문제는 비단 문학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닐 겁니다. 또 60년대 그 시절에 국한되는 일도 아니겠지요. 성실한 작가나 독자는 어떤 식으로든 피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요, 해묵은 논쟁이라고 얼마든지 치부하고 무시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그것이 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지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어야겠지요.

어쨌거나 <창작과 비평>은 굵직굵직한 논쟁들의 전장이 되기도, 또 어떤 논쟁에 불을 붙이거나 논쟁을 널리 확산시키기도 했습니다. 문학을 넘어 사회, 정치, 역사 등의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루면서요. 한국 대중문화가 처한 상황을 진단하고 새로운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자 시도한 적도 있었고,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의 현주소를 비교하기도, 분단 현실과 민족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기도, 한국 자본주의 논쟁이나 새로운 동아시아 연대의 가능성 등을 탐구하기도 했지요.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비판하고 평가하고자 하는 <창작과 비평>에 대한 비판 역시 당연하게도 존재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나 유물론적 역사관 등을 다룰 때는 학계 내에서조차 <창작과 비평>이 지나치게 ‘좌편향’된 관점에 경도되어 있다는 비판도 있었고, 대중문화나 계급갈등 문제를 다룰 때 실제 생활인, 동시대 한국을 살아가고 있는 진짜 사람들이 아니라 관념화된 기호로서의 ‘대중’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는 한 인기 소설가의 작품에 관한 표절 시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의 미온적 태도 때문에 논란에 휩싸인 적도 있었지요. (하필 표절 용의자인 작가가 대중적인 인지도와 인기를 누리는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라는 점, 그리고 그가 표절한 것으로 의심되는 원 작품이 일본 소설가, 그것도 군국주의 논란에 연루된 소설가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어쩐지 더 극성스럽게 상황이 흘러간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문학에 거창한 식견이 없는 범인이 보더라도 동일한 상황을 묘사하는 거의 똑같은 문장들이 이어지는데도 제 식구 감싸기 식의 해명과 작품에 대한 판단은 전문가인 우리가 한다, 식의 해명으로 일관하다 한바탕 홍역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자 그리고 또 하나, <창작과 비평>이 논란의 직접적인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그로 인해 촉발된 흥미로운 논쟁이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다뤘던 시집들, 그리고 오늘 함께 읽는 시집 역시 ‘창비시선’에 포함된 시집인데요, ‘창비시선’은1975년 신경림의 <농무>를 시작으로 바로 지난주에 나온 박연준의 시집까지, 410권 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창비는 지난 2009년 시선집 통권 300권을 출판하면서 기념시집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를 출판했습니다. 고은, 권혁웅, 김근, 김사인, 김선우, 김수영, 김용택, 김중일, 나희덕, 문태준, 박연준, 신경림, 신용목, 안도현, 이병률, 정끝별, 정호승, 허수경 등 그간 창비를 거쳐 갔던 시인들의 시를 묶어 기념시집을 간행했지요, 말 그대로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는’ 것처럼 시대를 막론하고 이름도 쟁쟁한 시들의 향연입니다.

잔치인 만큼 축사도 빠지지 않았지요, 그해 가을 <창작과 비평>에는 ‘시는 어떻게 새로울 수 있는가’라는 기획으로 두 문학평론가, 박수연과 신형철의 글이 한 데 실립니다. 이 두 글을 살펴보기에 앞서 다른 글 하나를 짚고 넘어가지요. <창작과 비평> 2009년 가을호 앞서 <한겨레21>에 ‘시 읽어주는 남자’라는 연재물을 투고하고 있던 신형철이, 2009년 5월 창비 300권 기념시집 출판을 축하하며 기고한 글이 문제의 발단입니다. 이 글에서 그는 우선 시집의 출판과 창비의 성취, 그간의 발자취를 되짚으며 축하의 인사를 전하지만, ‘쓴 소리’를 곁들이는 것을 빼먹지 않습니다. 그에 따르면 ‘시는 언어를 다루는 전문적이고 특수한 노동’이며, ‘시를 시로 만드는 양보할 수 없는 핵심은 언어’입니다. 그런데 ‘기념시집에 수록된 시들 중 절반에 가까운 시들에서 그는 전문적이고 특수한 기예가 선사하는 긴장감을 느낄 수 없었다’고 토로합니다. 예컨대 ‘묘사와 발견과 교훈이 편안한 문장들로 엮어진, 백반 정식 같은, 단아한 서정시들’이 주를 이룬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모범답안처럼 단정한 시들에서 ‘이렇게 쓰면 감동적일 것’이라는 계산이 읽힌다고 덧붙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문인들이 미학적으로 보수적인 틀을 고수해온 것을 한국 문학 특유의 현상’으로 진단하고, ‘한때는 민중주의라는 이름으로 옹호될 수 있었던 미학적 보수성이 이제는 대중주의로 비판받게 될 것’이라고 규정하지요.

신형철은 ‘예술에서의 진보는 대중과 함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창조하는 데’ 있는데, ‘창비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거니와 실제로 변화의 조짐도 보여 고무적’이라는 말로 이 기념사를 마칩니다. 짐작할 수 있듯이 당연히 논쟁이 따라붙었지요. 일상에서의 소소한 발견을 고만고만한 묘사와 편안한 문장으로 엮은 시(와 그런 행위)는 어찌 보면 서정의 상극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당연할 수 있는 이런 시각이 논란의 중심이 되는 것은 그만큼 ‘찔린’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는군요.)

신형철의 축사가 불러일으킨 논란 이후 <창작과 비평>은 다음 호 기획을 통해 아예 보란 듯이 논쟁의 자리를 만들어줍니다. 박수연이 쓴 ‘오래 더불어 왔던, 더불어 가야 할 시’라는 제하의 글과, ‘정치적 진보주의와 미학적 보수주의’라는 신형철의 글을 같은 자리에 게재하면서요. 이 자리에서 박수연은 ‘언어 형식의 새로움만을 올바른 미적 척도로 삼는 태도의 낡음’에 대해 언급한 뒤, ‘전위적 미학에 대한 평가 자체도 전복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간 우리 시가 ‘새로움의 맹목에 휘둘리지 않도록 창비가 묵묵히 수행해온 일들’을 상기하며 ‘대중의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 새로움의 독재를 넘어설 것’을 주문하지요.

반면 신형철은 앞서 <한겨레21>에 기고했던 자신의 입장을 가다듬습니다. ‘서정에 대립하는 전위’ 따위의 따분한 구도에 앞서 시가 언어를 대하는 태도를 검토해볼 것을 제안하면서요. 그는 앞서 자신이 비판하고자 했던 소위 ‘민중적 서정시’들에는 언어에 대한 의심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이 시들은 ‘정형화된 서정적 문법 안에서 투명하고 편안하고 안이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 지니지요. 이러한 특징은 ‘때로 겸손함의 표지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신형철에 따르면 ‘(시적) 진실에 대한 경외는 언어에 대한 의심과 나란히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에 대한 태만은 곧 진실에 대한 오만’으로 이어지기 십상이고, 이런 시들은 대체로 ‘거의 가부장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태도로, 그저 독자에게 삶의 어떤 지혜를 전달하려고 할’뿐이지요. 당연히 그는 이러한 것들이 예술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술이 예술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 그 자체를 혁신하는 예술이어야 하니까요.

... (중략) ...

맨 처음 함께 읽은 시집에서 이시영의 글들은 때로 일상의 언어나 신문기사 같은 산문과 거의 구분되지 않습니다. 현실의 어떤 면면을 다루면서 그가 세공하는 언어는 어떻게 보면 굴절이나 경유 없이, 시를 위해 만들어낸 특별한 형상에 기대지 않고 현실의 윤곽을 최대한 가까이에서, 고스란히 포착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지요.

반면 권혁웅의 글은 거의 같은 대상을 포획하기 위해 겨냥하고 있습니다만 상징과 유비라는 틀에 기대고 있습니다. 이 틀은 ‘마징가Z’나 ‘드라큘라’, ‘선데이서울’이나 ‘비행접시’처럼, 얼마간의 의미를 이미 수신자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장치들이지요. 장치들의 도움으로 권혁웅의 문장이 그리는 형상들은 막연한, 그리고 피상적인 과거의 한 장면에서 벗어나 색을 입고 소리를 내고 약동합니다. 적당한 장면에서 적절한 장치를 작동시키는 것이 곧 그만의 고유한 관점이나 시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서정의 본질은 바로 이 시선, 시인이 자신의 고유한 무엇으로 어떤 대상을 시적 형상으로 다시 창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는 시인이라는 독특한 주체성이 대상이라는 세계의 어떤 지점에 접촉할 때 성립합니다. 이 접촉의 지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두 갈래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늘 있던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 다른 하나는 아직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은 것, 그래서 아직 이름 없는 것들을 찾아서 꺼내는 일이지요. (물론 어쨌거나 새로움에 관여한다는 사실에서 공통점을 가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떤 대상에서 알려지지 않은 새로움을 끄집어내는 일이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름 없는 것들을 불러내는 일 모두 시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회화나 영화나 노래나 무용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시에서 이 작업은 무엇보다 언어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언어는 인접하거나 유사한 의미들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래서 시에서 서정과 은유는 언제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공명합니다. 찾아내는 서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은유라는 구도 속에서요. 때로 은유는 (예컨대 권혁웅의 시처럼) 잘 알려진 것들, 익숙한 것들에 기대어 효과적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 이미 알려진 상징, 익숙한 관념과 이미지만으로는 이름 없는 것들 포착하기에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창백한 달빛에 네가 너의 여윈 팔과 다리를 만져보고 있다

밤이 목초 향기의 커튼을 살짝 들치고 엿보고 있다

달빛 아래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빨간 손전들 두 개의 빛이

가위처럼 회청색 하늘을 자르고 있다

창 전면에 롤스크린이 처진 정오의 방처럼

책의 몇 줄이 환해질 때가 있다

창밖을 지나가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여기에 네가 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가 있다

늪 위로 쏟아지는 버드나무 노란 꽃가루가 있다

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이 있다

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을 때가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깨진 나팔의 비명처럼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처럼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처럼

집 둘레에 노래가 있다

(‘있다’ 전문)

그래서 그저 있다는 것만을 알 수 있는 것들, 분명히 거기에 있는데 아직 언어의 짝을 만나지 못한 것들을 위해서는 그래서 항상 새로운 은유가 필요하지요. ‘깨진 나팔의 비명’이나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 따위의,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이나 ‘집 둘레의 노래’ 같은.

하지만 시적인 것을 포착하기 위한 시적 언어, 그리고 서정과 은유의 관계에는 언제나 모종의 긴장이 존재합니다. 앞서 언급한 박수연의 지적처럼 자칫 새로움이라는 함정에 갇혀서 말장난 같은 새로운 표현이나 새로운 낱말의 조화에만 맹목적으로 몰두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좋은 서정은 시적 주체라는 주관을 경유해서 대상의 시적인 것, 혹은 시적인 어떤 대상을 시를 통해 포착하지만, 실패한 서정은 주관에 대상을 가두고 오히려 대상의 퇴행과 신비화를 일으킬 뿐이니까요. 서정과 시적인 것, 은유의 관계, 또 성공한 은유와 퇴행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남은 밤 동안 이야기를 이어가 보시지요. 까다로운 만큼 흥미로운 주제이자, 사실 시에 있어 가장 선명하지만 끝까지 아리송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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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6. 26.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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