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The Human Condition: Ch. 5


...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유일한 활동입니다. 행위의 근본조건은 다원성(plurality), 즉 보편적 인간(Man)이 아닌 복수의 인간들(men)이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상응합니다.​"

...​

"인간의 다원성은 말과 행위를 위한 기본조건입니다. 이 다원성은 동등성(equality)과 차이성(distinction)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습니다. 한편으로 사람들이 서로 동등하지 않다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테고, 다른 한편 사람들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면 말과 행위의 필요성 자체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

"사람은 말과 행위를 통해 단순히 타인과의 차이를 식별하는 것을 넘어 능동적으로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합니다. 이때 말과 행위는 인간이 (단순한 물리적 대상이 아닌)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양식입니다."

...

"말과 행위는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질문인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각자의 응답은 그의 행위에 담겨 있는데, 행위의 이러한 계시적(revelatory) 성격을 지탱하는 것이 바로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말없이 어떤 일을 수행하는 로봇의 경우, 그것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특이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없겠지요. 인간은 말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행위자는 오직 그가 말의 화자인 경우에만 행위자일 수 있습니다. 말과 행위는 그 내용이 오로지 사물세계의 문제만을 다룰 때조차도 주체를 계시하는 능력을 갖습니다."

...

"인간사(human affairs)의 영역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간관계들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집니다. 말을 통한 인간의 자기계시(self-revelation)나 말과 행위의 결과는 모두 이 그물망으로 귀속되고요. 그 그물망 속에서 모든 인간의 개별적 삶은 그들 각자의 유일한 이야기로 나타납니다."

...

"제작과 달리 행위는 고립된 상태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고립은 곧 행위능력의 박탈을 의미하지요. 제작이 자연과 세계를 필요로 하는 만큼 행위와 말은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행위와 말은 타인들의 행위와 말이 이루는 그물망에 둘러싸여 그것과 끊임없이 접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

...

"행위자는 언제나 행위하는 다른 존재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는 단순한 ‘실행자(doer)’일 뿐만 아니라 ‘고통 받는 자(sufferer)’이기도 합니다. 행위와 고통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의 행위로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 행위에 따르는 행동과 수고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

"행위의 결과들은 문자 그대로 무한하다고(boundless) 볼 수 있습니다. 의미의 그물망 속에서 어떤 행위와 그것에 따르는 반응은 결코 폐쇄적이거나 행위자와 반응자 양편에만 한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우 제한적인 환경에서 행해진 가장 사소한 행동조차도 무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행위는 무제한적이고, 예측 불가능합니다.​"

... ​

"행위의 이러한 예측불가능성은 그것의 계시적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자신이 드러내는 것이 무엇인지 미리 헤아릴 수 없으면서도 말과 행위 속에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

"그리스인들은 행위의 이러한 특징을 극복하고자 폴리스를 구축합니다. 폴리스에서 인간의 행위는 구체적으로 고정되고 그것의 과정과 결과는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무제한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행위를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스인들은 폴리스를 통해 그것을 (폴리스 내의 활동으로) 고정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과정과 결과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지요. 이런 의미에서 폴리스는 단순히 지리적으로 자리 잡은 특정 도시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폴리스는 사람들이 함께 행위하고 말함으로써 발생하는 사람들의 조직체이며, 인간이 서로에게 현상하는(appearing) 공간입니다."

...​

"현상의 공간(space of appearance)은 말과 행위의 방식으로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그래서 공론 영역의 형식적 구조나 다양한 형태의 정부, 공론 영역이 조직화될 수 있는 다양한 형식들에 선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현상의 공간이 필연적으로, 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명의 흥망성쇠를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행위하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의 잠재적 현상 공간을 존재하게끔 만드는 힘이 바로 권력입니다. 권력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에서 발생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가깝게 함께 살기 때문에 행위의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권력은 공론 영역과 현상의 공간을 보존합니다. 권력은 세계의 생명줄과도 같습니다. 인간의 세계는 말과 행위, 인간사와 관계들의 그물망, 그리고 이것들의 산물인 이야기의 무대로서 존재하는데,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현상의 공간과 공론 영역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

"세계의 실재성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특징은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때 세계를 감지하는 ‘공동감각(common sense)’은 엄밀한 의미에서 개별적일 수밖에 없는 오감과 그것의 대상들을 (공통의) 현실에 적합하게 지각하도록 만드는 근거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공동감각의 현저한 감소는 세계에서 사람들이 소외된다는 사실의 명확한 징표입니다."

...

"노동과 소비에 의존하는 사회는 인간을 동질화 시킵니다. 이러한 현상은 노동하는 인간의 수고와 고통은 줄이지만 이 과정에서 인간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구성원으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셈이지요. 노동하는 동물이 서로 간에 차이를 만들지 못하고, 그래서 행위와 말을 할 수 없다는 무능력은 (시민혁명의 시대인) 근대에 심각한 노예의 반란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결과의 예측 불가능성(unpredictability of its outcome), 과정의 비가역성(irreversibility of the process), 작자의 익명성(anonymity of its authors)이라는 행위의 세 가지 좌절에 대한 분노는 기록된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행위의 이러한 특징에 기인하는 우연성과 도덕적 무책임을 극복하기 위해 행위의 가능성 자체를 제거하는 것은 정작 사유하는 인간, 행위하는 인간에게 퍽 큰 유혹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다원성에서 유래하는 행위의 불행은 역설적으로 공론 영역인 현상의 공간을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앞서 언급한 행위의 좌절을 넘어서기 위해 그것의 가능조건인 인간의 다원성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공론 영역 자체를 제거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행위를 도구화하는 것, 또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정치 역시 행위 자체를 없애지도, 행위가 인간의 중요한 경험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막지도, 인간사의 영역에서 행위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에 성공하지도 못했습니다. (생산과정과 같은) 다른 활동에서 인간의 힘은 최종적으로 생산품에 전적으로 흡수되어 고갈되지만, 행위 과정에서 힘은 결코 소진되지 않으며 오히려 행위 속에서 증폭합니다. 또한 행위의 산물은 여타의 모든 인위적 활동의 산물보다 월등한 지속 능력을 갖습니다."

...

"과정의 비가역성과 결과의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행위의 불행은 결코 다른 능력으로 치유될 수 없습니다. 행위의 불행이라는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것 역시 오직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

"자신이 무엇을 행했는가를 알지 못하고, 설령 알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되돌릴 수 없는 곤경으로부터 인간이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용서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또 인간이 용서를 통해 행위의 결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행위 능력은 하나의 유일한 행위로 끝나고 말 겁니다."

...

"인간 행위의 예측 불가능성은 ‘인간 마음의 어두움(darkness of the human heart)’, 즉 오늘 이 사람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에서 발생하며, 동시에 모든 사람이 동일한 행위 능력을 갖는 동등한 자들의 공동체 내부에서 행위의 결과들을 예견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 기인합니다. 약속의 능력을 통해 인간은 이러한 이중적 어둠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

"인간의 세계를 그것의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파괴과정(ruin)으로부터 구원하는 기적은 궁극적으로 탄생성(natality)에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이 기적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지요. 물론 물리적인 출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탄생은 무엇보다 행위하는 인간, 인간사의 의미망 속에서 말과 행위로서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드러내는 인간의 탄생을 의미하지요. 이러한 행위 능력의 완전한 경험만이 인간사에 희망과 믿음을 부여합니다."

​​

2017. 6. 2. / Sutome Apothecary

info@labyrinthos.co.kr​

#HannaArendt #Arendt #TheHumanCondition #labyrinthos #인간의조건 #아렌트 #한나아렌트

© Labyrinth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