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이중성 혹은 극단성


핀란드의 소설가 아르토 파실린나의 한 소설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합니다. 핀란드 사회가 얼마나 냉혹한지 사람들이 푸념하는 장면이지요. 이들에 따르면 삭막한 관습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사람들은 서로에게 잔인한 질투심에 찌들어 있습니다. 탐욕이 팽배한 가운데 다들 완강하게 돈을 움켜쥐는 일에만 급급하지요. 사람들은 의심이 많고 음흉하며, 이들이 웃는 경우는 기뻐서라기보다는 타인의 불행을 고소해하기 때문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어딜 가나 사기꾼, 협잡꾼, 거짓말쟁이들이 넘쳐납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눈앞이 핑 돌 정도로 많은 집세를 갈취하며 터무니없이 엄청난 이자를 수취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걸핏하면 소동을 피우고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망가뜨리기 일쑤였으며,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도 않았지요. 아이들은 그야말로 국가적인 애물단지입니다.

집이나 물건, 거리는 낙서투성이에 거리 곳곳에는 토사물과 용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관직에 있는 ‘나으리’들은 앞다투어 새로운 신청서 양식을 만들어서는 국민들을 욕보입니다. 이 창구에서 저 창구로 허겁지겁 달려가도록 강요할 뿐이지요. 소매업자든 도매업자든 남들 주머니에서 마지막 남은 동전 하나까지 우려내려고 다들 안달이었고, 투기꾼들은 갈수록 비싼 집만 거듭 만들어댑니다. 몸이 아파 병원이라도 찾아가면 교만한 의사들은 당장 도살할 늙은 말처럼 사람을 다루었고, 이런 걸 참지 못해 신경쇠약에라도 걸리면 정신병원에 험상궂은 간호사들이 주사바늘을 정맥에 꽂으려 달려들었지요.

개발업자들과 산림 소유주들은 발전을 구실로 조국의 재산을 갈취했고 그나마 남아 있는 나무들은 좀벌레들이 깡그리 다 갉아먹었습니다. 하늘에서는 산성비가 내렸고 농부들이 들판에 비료를 마구 뿌려대는 바람에 강과 호수, 바닷가에는 유해한 해초들이 무성하게 번식했지요. 공장의 굴뚝과 하수구에서 쏟아지는 오염물질은 사람들의 눈과 하천으로 스며듭니다. 물고기들은 떼를 지어 죽었고 새 둥지에서는 가련한 새끼들이 너무 일찍 알을 깨고 고개를 내밉니다. 도로에는 무모한 속도광들이 날뛰었고, 그 불행한 희생자들은 공동묘지와 중환자실을 채웠습니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죽어라 서로 경쟁했지만 이제는 기계와도 경쟁해야 합니다, 그러다 지친 사람들은 자리에서 떨어져 나갔고요. 상사들은 끊임없이 실적을 요구하며 직원들을 짓밟았고 여자들의 엉덩이를 움켜쥐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허풍스런 녀석들은 항상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남자들은 쉴 새 없이 능력을 증명해야 했고 혐오스런 직장 동료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혔습니다.

술을 마시면 간장과 췌장이 망가졌고 음식을 양껏 먹으려 들면 콜레스테롤 수치가 증가했으며 담배를 피우면 암세포가 폐 속에 둥지를 틉니다. 뭘 하든 결과는 항상 나쁜 쪽으로 나타납니다. 없는 시간 쪼개서 열심히 조깅을 하면 과로로 쓰러졌고 조깅을 하지 않는 사람은 비만으로 관절이 망가지거나 척추에 문제가 생겼으며 결국에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습니다.

어떻습니까, 가히 디스토피아를 연상시키는 대서사입니다만 어쩐지 친숙하지 않습니까? 우스꽝스럽지만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살인적인 풍경이지요. 요즘 같으면 핀란드가 아니라 한국이라고 얘기해도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모습들입니다. 뭐 이것 또한 변해가겠지요. 변해가면 좋겠군요.

지금 열거한 사태들은 소설 속 장면, 그리고 그 장면 속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입니다만 이들이 주고받는 다소 암담한 대화 이면에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사회 현상을 어떻게 인지하는지에 관련한 지점이지요. 어떤 사람은 ‘삭막한 관습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거나 ‘사람들은 탐욕에 찌들어’ 있고, ‘가난한 사람은 걸핏하면 난동을 부리’며 ‘타인의 불행을 고소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상사들이 실적을 요구하며 직원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하고, ‘의사들은 환자를 함부로 취급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 번 따져봅시다. 핀란드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 이렇게 생각할까요?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사람은 살면서 다양한 현상들을 부딪치고 통과하며 경험합니다. 그리고 저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경험에 대한, 경험에서 얻은 인상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요. 그런데 경험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예컨대 누군가 사람들이 탐욕에 찌들었다고 느낄 때 다른 누군가는 사람들이 사회적 성공과 목표 달성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상사들이 실적을 요구하며 직원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할 때 다른 이는 저마다 맡은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한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동일한 사태를 두고서 서로 다른, 심지어 정 반대의 생각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때로 이런 차이는 사과가 더 맛있나 바나나가 더 맛있나와 같은 수준이 아니라, 도저히 양립 불가능한 수준으로요. 뭐 바나나와 사과를 두고 뭐가 더 맛있나 때문에 드잡이 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만 다른 사회 현상에 대해서라면 사정은 조금 다를 겁니다. 우리는 요즘 지금 무수한 다툼의 풍경을 지나고 있지요.

경험의 주관성으로부터 어떻게 객관적 인식을 확보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사실 철학의 가장 전통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부터 이 문제로 골머리 깨나 썩였으니까요. 전통적인 문제라는 건 한편으로 가장 오랫동안 명쾌하게 풀리지 않은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여러 해법을 제시했지만 아직도 논의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셈이니까요. 객관적 인식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인식의 객관성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나아갑니다. 인식의 객관성은 인식이라는 사태에 있어 주체와 세계의 관계로, 세계의 객관성에 대한 물음으로 다시 나아가지요. 또 객관성의 근거로서 실재에 대한, 사실 그 자체에 대한 물음도 생각해볼 수 있겠고요. 사실과 인식 사이의 관계를 묻는 것도 따져볼 수 있겠군요.

... (중략) ...

흔히 요즘 한국 사회의 이런저런 문제를 다룰 때면 양극화 문제가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단순하게 접근한다면 양극화는 소득이나 재산의 불평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 이면에는 교육, 주거환경, 문화적 자원에 대한 접근성 등 수많은 문제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양극화를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고요. 김원식이 지적하는 것처럼 양극화는 일차적으로 빈곤과 불안정, 사회적 배제와 무시의 확대를 동반하며, 나아가 이러한 질서의 고착은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으로 이어집니다.

시장 경제는 (현대 사회를 이루는 다른 조건들, 또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과 마찬가지로) 진공 상태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특정한 문화적 맥락을 매개로 작동합니다. 즉 우리 사회의 양극화 역시 고유한 사회문화적 맥락을 배경으로, 혹은 매개로 하여 진행되었다는,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양극화와 그것에서 파생하는 사회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먼저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등장했고, 어떤 맥락 속에서 작동하는지에 대한 탐구가 필요합니다. 사회를 이루고 있는 힘들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면 그것의 원천과 변천이 있을 테고, (일견 날벼락처럼 보이는 사건조차 기상과 일기의 작용 가운데 발생한 현상이기 마련입니다.) 그 힘들이 이루는, 그 힘들을 이루는 당대의 정세 또한 앞선 힘들의 흐름과 닿아 있을 테니까요. 소용돌이치는 정세 가운데 그것의 줄기를 구분하고 가닥을 살피는 것이 그리 만만한 작업은 아니겠습니다만, 결국 가파르게 휘도는 급류에 자신도 모르는 새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급류의 흐름을 읽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남은 시간 동안 이어서 물살을 헤쳐봅시다.

2017. 4. 29. / 곰산당 info@labyrinthos.co.kr

#라비린토스 #labyrinthos #양극화 #Polarization #김호기 #김원식

© Labyrinth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