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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osiveness and Necessity


지난 시간 칸트가 제시하는 미감적 판단의 네 계기 가운데 두 계기, 무관심성과 보편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칸트는 미감적 판단의 특징을 무엇보다 만족(흡족)으로 꼽고 있는데, 취미판단은 무엇보다 특정한 관심이나 이해에 기인하는 만족이 아닌 판단 주체의 이해관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상태에서 그 자체로 만족스러운 판단을 의미합니다.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취미판단은 보편성을 획득한다고 볼 수 있는데, 특정한 개인의 관심과 이해와 무관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만족을 산출하기 때문이지요.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지점은 미감적 판단을 순수하게 주체의 역량과 능력에 속하는 일이라고 봐서도, 또 판단의 대상이 되는 주체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 세계에 속하는 일이라도 봐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판단력 비판>에 앞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전통적 이성주의와 경험주의가 봉착한 난관을 극복하고자 하는데, 인간의 이성과 사유를 통해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보는 이성주의적 관점과, 세계는 오로지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 뿐 이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보편 타당한 객관적 인식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경험주의적 관점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자 시도합니다. 바로 감각을 통한 경험과 이를 포섭하고 종합하는 순수이성의 작용이라는 해법을 통해서요.

칸트의 해법은 객관적 인식의 가능근거를 새롭게 제시하면서도 그 가능성을 인간의 선험적(a priori) 이성에 정초합니다. 통상 칸트의 철학을 ‘초월적(transzendentale)’이라고 지칭하는데,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내적 초월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칸트의 접근은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에 있어 주체과 객체 어느 한 쪽의 우위를 주장하기보다 둘 사이의 종합,이들 사이의 모종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시사점은 미감적 판단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미적인 것, 감각적인 것에 있어서 그것을 전적으로 대상에 기인하는 속성으로 보거나 순수하게 주관적인 것으로 보는 게 아니라 둘 사이의 관계로 파악한다는 것이지요.

칸트가 인식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성과 경험 각각은 필연적으로 독단이나 회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명확하게 지적했듯이, 미감적 판단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것을 순수하게 대상의 속성이라고 보거나 전적으로 주관의 작용이라고 본다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직면합니다. 예컨대 전자의 관점을 취한다면 미적인 것, 감각적인 것의 실재성과 속성을 정의하기 까다롭다는 난점을,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면 미적 판단에 있어 서로 다른 모든 취향이 동등한 위상을 갖는다는 난점 등을 피하기 어렵다는 문제들을 피할 수 없지요.

결국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가 제시하는 기획은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여 미감적 판단이라는 모종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요. 함께 읽는 책의 서문에 등장하는 표현처럼 <판단력 비판>은 전설적인 난해함을 자랑하는데, 우리가 세미나에서 다루는 내용은 사실 더 큰 차원에서, 칸트의 기획 전체를 놓고 바라보아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칸트는 단순히 취미와 감각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natur)’과 ‘자유(freiheit)’라는 철학의 두 영역의 종합이라는 차원에서 판단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성의 규제적(regulative) 작용과 반성적(reflective) 작용에 있어서 판단력이 갖는 위상과 원리를 이해하는 것 또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지요. 또 미감적 판단의 필연성을 다루면서 언급하는 공통감(sensus communis)에 대한 논의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취미의 문제를 다루는 칸트의 생각을 따라갈 때에는 이처럼 그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편이 좋습니다.

본격적으로 나머지 계기들을 다루기에 앞서 한 가지만 더 살펴볼까요, 미감적 판단에 있어 칸트가 순수이성의 네 가지 범주에 대응 시키는 네 계기들의 관계를 시간적 선후관계나 우선순위에 따른 차등관계라고 생각해서도 곤란합니다. 이를 테면 ‘날씨가 좋다’라는 판단에는 기온, 습도, 하늘의 상태나 햇살의 느낌, 체감하는 바람의 세기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러한 판단이 기온에 대한 판단을 맨 처음으로 먼저 내린 뒤에 두 번째로 구름의 양을 파악하고 세 번째로는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부는지 판단하고... 와 같은 순차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깥’이라는 대상에 대해 단번에 이루어지는 총체적인 판단인 것처럼요. 칸트가 제시하는 계기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개념적인 범주의 구분입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나머지 계기들을 다뤄봅시다. 지난 밤 살펴본 ‘주관적 보편성’ 같은 괴상한 개념처럼, 이번에도 칸트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해괴한 개념을 제시합니다. 바로 순수이성의 ‘관계’ 범주가 미감적 판단의 계기로 작용할 때 등장하는 개념이지요. 앞서 칸트는 미감적 판단의 첫 번째 계기로 무관심성을 제시하면서, 쾌적한 것에 기인하는 만족과 좋은 것의 만족, 그리고 미감적 판단에서의 만족을 구분한 바 있습니다. 좋은 것에 있어서의 만족과 취미판단의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비교해보면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이상한 표현의 뜻하는 바를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칸트는 미감적 판단에 있어서 인간은 만족을 느끼기 위해서, 어떤 의도나 목적을 지니고 일부러 판단에 몰두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습니다.물론 전시를 관람하거나 음악을 감상하는 행위 자체는 의도와 목적을 지닐 수 있지만, 그 대상 앞에서 ‘나는 꼭 즐거움을 느낄 거야’, ‘작품 앞에서 꼭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겠어’와 같은 방식으로 목적을 설정하고 감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즉 미감적 판단에 있어서의 만족은 계획이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칸트가 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감적 판단은 언제나 만족, 혹은 쾌감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는데,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성립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칸트는 미감적 판단의 목적을 만족과 쾌적함, 쾌감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에서의 판단은 개별적인 판단 각각이 아닌 그것의 순수한 이념의 차원을 가리킵니다. 즉 음악을 감상하는 행위나 회화나 조각품을 바라보는 행위, 무용이나 극을 관람하는 행위를 총칭하는 상위개념으로서의 미감적 판단은 그 자체로서 만족, 쾌라는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구체적인 현실에서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판단 주체는 만족이라는 목적을 상정하고서 작품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감적 판단이 이루어진다면 쾌나 만족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념으로서 미감적 판단의 본래 목적에 정확히 부합하는, 만족이나 쾌가 산출되는 것이지요. 칸트가 말하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이렇게 목적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목적에 부합한다는 미감적 판단의 특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한편 취미판단의 첫 번째 계기인 무관심성이 누구의 이해와도 무관하다는 측면에서 미감적 판단의 보편성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목적이 없음에도 언제나 목적에 부합한다는 합목적성의 특징은 미감적 판단이 개념의 도움 없이도 예외 없는 어떤 보편적 법칙처럼 성립한다는 차원에서 네 번째 계기인 필연성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칸트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판단력 비판> 곳곳에서 이성의 규제적 적용과 반성적 적용을 구분하고 있고요. 여기에서는 범례적 필연성과 공통감에 대한 논의를 덧붙입니다.

... (중략) ...

미학은 곧 미적인 것, 감각적인 것에 대한 탐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급하게 미학을 예술에 대한 학문으로 등치 시키는 것은 정작 예술에 대한 탐구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동시에 미학이 탐구해야 할 영토 또한 제한하는 결과를 낳지요. 예술은 미적인 것, 아름다운 것은 감각적인 것의 특수한 경우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단순히 감각의 가능한 여러 형식 가운데 하나, 또는 감각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여러 대상 가운데 하나라고 보기에 예술과 미적인 것, 감각적인 사이에는 분명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미학은 본래 감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학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있어 칸트가 성급했다고 지적한 바 있는) 바움가르텐은 자신의 저서 <미학>의 첫 번째 테제를 통해 미학을 ‘감각적 인식의 학문’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으로서 미학은 자유로운 예술들의 이론, 하위 인식론, 아름다움에 대한 사유의 기술, 이성의 유사 기술이라고 주장하지요. 반면 칸트는 (판단 대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은 오로지 순수이성의 초월적 작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감각적 인식’이라는 괴상한 표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다만 판단의 특정한 유형에 대한 비판적 검토만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때문에 미적인 것에 대한 성찰은 학문의 대상이 아닌 (칸트적 의미에서의) 비판이 되는 것이지요.

한편 칸트 이후 헤르더는 바움가르텐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미적인 것에 대한 문제를 전혀 다른 방향에서 바라봅니다. 바움가르텐과도, 칸트와도 다르게요. 헤르더는 미학을 감각적 인식으로 정초하려 했던 바움가르텐의 접근을 일종의 ‘헛디딤’이라고 비판합니다. 헤르더에 따르면 감각적인 것은 감정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지, 인식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헤르더는 바움가르텐이 감각적인 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다루는 바람에 미학이 다루어야 할 더 많은 대상들을 은폐하거나 놓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접근은 미학(과 미적인 것)을 주체와 관련 시키는 칸트와도, 그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객체화하는 바움가르텐과도 다른 방식으로 미적인 것, 감각적인 것을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지요. 이 부분은 남은 밤 동안 천천히 마저 생각해봅시다.

자 어쨌거나 이렇게 해서 칸트가 제시하는 이성의 네 가지 범주, 그리고 판단력에 있어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인 네 가지 계기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이들 각각은 미감적 판단과 미적인 것에 있어 무관심성, 보편성, 합목적성, 필연성이라는 속성에 해당하지요. 이러한 칸트의 생각에 동의할 수 있으신가요? 사실 칸트에게 있어 판단력(과 <판단력 비판>)의 중요성은 단순히 취미의 문제와 미감적 판단, 혹은 그 대상에 대한 논의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그가 <판단력 비판>의 서문에서 밝히는 것처럼 ‘자연’과 ‘자유’라는 철학의 두 영역을 하나로 결합하는 수단이 바로 판단력이기 때문이지요. 이번 세미나에서는 벤첼의 안내를 따라 취미판단과 예술에만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취미의 문제를 다루는 칸트의 본래 기획은 보다 큰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잊지 않고 참고하시면 좋겠군요. 돌아오는 밤에는 미감적 판단의 대상인 예술과 자연(natur)의 관계, 그리고 예술과 천재(genie)의 관계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시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4. 24.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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