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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경기를 보다 보면 어려운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멋진 득점이 나왔을 때, 예술적인 골이라는 해설자의 표현을 종종 접할 수 있습니다. 조미료를 쓰지 않고 천연재료와 신선한 해산물만으로 맛을 낸다고 자랑하는 어느 유명한 해물탕집에서는 저녁이면 국물 맛이 예술이라고 감탄하는 손님들의 탄성이 이어지고요. 산림 보호를 목적으로 오랜 기간 출입을 제한했다 최근에야 다시 탐방을 허용한 어느 등산로에서는 경치가 예술이라는 감탄이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사람들이 모종의 경험을 두고 예술이라고 표현할 때, 도대체 그 예술이 의미하는 건 정확히 뭘까요? 언뜻 보기에 운동 경기의 명장면과 맛있는 음식, 멋진 풍경은 전혀 상관이 없는 별개의 영역, 별개의 대상인 것처럼 보이는 데 말이지요.

뭐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 두고서, 이런 상황에서라면 일단 예술을 일정 수준 이상의 탁월함 내지는 훌륭함에 대한 관용적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은요. 다른 상황에서는 어떨까요? 바흐의 푸가나 베토벤의 교향곡이 훌륭한 예술이라는 사실에는 두말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고흐가 그린 별밤이나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이 최고의 예술품이라는 사실에도 이견이 없을 테고요. 자, 여기 바흐의 푸가를 감상하며 감탄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는 푸가 선율을 따라 펼쳐지는 바흐의 주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음악사에서 바흐가 갖는 독특한 위치와 다른 음악들과 바흐의 차이 또한 예민하게 감각하고 인지할 수 있는 보기 드문 밝은 귀를 지닌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회화나 조각 등의 시각예술, 조형예술에는 별 관심이 없으며, 이런 작품들에서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번에는 고흐의 그림을 즐기는 감상자를 떠올려봅시다. 그는 고흐만이 포착한 세계, 고흐의 그림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색감과 조형적 배치를 세심하게 인지하고, 모든 인간이 동일한 시각을 지니고 있음에도 고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한 세계에 감탄합니다. 고흐의 내면과 그가 표현한 세계의 관계, 또 고흐의 기법이 인간이 세계를 감각적으로 재인식하고 표현하는 방식에 얼마나 큰 변화를 주었는가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고요. 하지만 그는 바흐나 베토벤에는 무심합니다. 이따금 악기 소리가 듣기 좋다 내지는 웅장한 오케스트라 선율에 감탄하는 순간들은 있었지만, 이들의 음악에서는 고흐의 그림이나 다른 회화들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감흥이나 감동을 느낄 수 없었으니까요.

모종의 문제의식을 포착하기 위한 일종의 사고실험입니다만 현실에서도 얼마든 가능한 일입니다. 음악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혹은 음악만 잘 이해하는 사람), 또 회화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혹은 회화만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사례일 테니까요. (물론 지적, 문화적 허영에 기반한 소비적 감상 행위는 잠시 논외로 둡시다.) 바흐에 감탄하는 사람은 바흐의 음악을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고흐에 감탄하는 사람은 고흐의 그림을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차이는 단순히 관심과 취향의 차이에 불과할까요? 대체로 바흐든 고흐든 둘 다 예술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겠지만, 그렇다면 또다른 문제가 등장합니다. 바로 하나의 예술인가, 여러 예술인가 하는 물음이지요. 흔히 사람들은 예술이라는 단일한 영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흐와 고흐를 포함하는, 음악이나 회화뿐 아니라 무용, 건축, 시, 조각, 영상 등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의 모든 활동을 포함하는. 그렇다면 누군가 예술을 안다, 혹은 지각한다는 것의 의미는 이러한 하위 범주의 활동들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만약 위의 사례가 성립한다면 각각의 영역에서 예술을 이루는 별개의 특징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아니면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서로 다른 활동에 예술의 지위를 부여하는 모종의 속성이 있는 걸까요?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개념을 뭉뚱그려 사용하는 사례일 수 있습니다. 마치 요리의 경우에서처럼요. 일반적으로 누군가 요리를 잘한다고 말할 때, 사실 그는 김치찌개를 잘 끓이거나 잡채를 잘 만들거나 전을 잘 굽거나 파스타를 잘 만들거나, 어떤 음식을 잘 만드는 경우일 겁니다. 세상 모든 요리를 다 잘 만들지 않는 이상, ‘요리를 잘한다’는 표현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진술이라기보다는 관용적 표현의 성격을 갖지요. 한식을 잘한다, 중국식 요리를 잘 만든다, 반찬을 잘한다, 와 같은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조금은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일상에서 접하는 몇몇 음식을 잘 만드는 솜씨가 있다 내지는 음식을 만드는 행위 전반에 솜씨가 있다 정도의 관용적 의미로 음식을 잘한다는 표현이 쓰입니다. 그렇다면 예술이라는 표현 역시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도 있을까요?

관용적 표현은 바꿔 말하면 남들이 다 그렇게 쓰니까 나도 대충 그렇게 쓴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남들이 다 그렇게 사용하기 때문에 함께 그렇게 사용해도 의사소통에는 거의 문제가 없지만, 한 꺼풀 열고 문제를 들여다 보면 사태는 조금 달라지지요. 개념이 투박하다는 것은 결국 개념이 포착하고자 한 사태를 그만큼 헐겁게 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구를 잘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도구를 손에 맞게 꽉 움켜쥐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어떤 사태를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그에 필요한 개념들을 명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지요.

​하지만 여기에 관련한 경우라면 본격적으로 탐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까다로운 난관에 부딪힙니다. 바로 예술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문제지요. 탁월한 수준의 기예나 창작 활동으로 정의한다면 대번에 우리가 흔히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광범위한 영역의 활동까지 예술이라는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에 따른다면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술이라고 여겨지는 회화나 조각, 음악, 문학, 무용, 영상, 설치… 등의 활동뿐만 아니라 각종 공예는 물론 음식을 만드는 일이나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일까지도 예술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 역시 함께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영역들, 대상들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탁월하고 훌륭하게 잘 만드는 일이 가능하니까요.

반면 예술을 특정 영역에 국한하는 방식, 즉 회화, 조각, 음악, 문학… 등의 영역에서의 창작 활동이라고 규정한다면 해당 영역에서의 모든 활동을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사라집니다. 즉 아무나 아무거나 만들면 다 예술인가, 라는 문제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이 문제를 피하기 위해 해당 분야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권위에 의해 예술이라는 지위의 근거를 보장한다는 보완책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특정 영역의 구분과 누가 무엇으로 예술이라는 지위를 부여하는가 등의 문제에 부딪힙니다. 갤러리에 걸리면 예술이고 걸리지 않으면 예술이 아닌가, 문인들 사이에서 인정받은 문장은 시고 인정받지 못한 문장은 시가 아닌가, 영등위를 통과한 영상은 예술이고 통과하지 못한 영상은 외설인가 따위의 문제들이지요. 즉 개념에 보완적 속성을 부여해서 의미를 다시 한정하는 방식으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가장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의미에서 예술을 정의하기 위해 아름다움의 개념에 기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런 접근이 오히려 가장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의 속성이나 기준을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요? 또 모든 활동에 공통적으로 적용 가능한 미의 기준이 있을까요? 예컨대 그림에 적용할 수 있는 미의 기준과 음악에 적용할 수 있는 미의 기준은 동일할까요? 모든 시대, 모든 조건을 통틀어서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미의 기준이 존재할까요? 미가 예술의 기준이 된다면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특정 인물의 얼굴이나 자연 풍경까지 아름답기만 하면 전부 예술로 봐야 할까요? 아름답기는커녕 기괴하거나 고통과 불쾌를 유발하는 대상이나 행위들이 예술로 통용되는 사태는 그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당장 떠올려봐도 문제들이 쏟아져 나오지요.

이러한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 개념에 기댈 수 있을 겁니다. 가족 유사성이란 ‘가족’이라고 분류할 수 있을 만한 집합의 구성원들이 각기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면서 교차하는 방식으로 공유하고 있는 어떤 속성을 가리킵니다. 이를 테면 1번 구성원은 a, b, c의 속성을, 2번 구성원은 a, b, d라는 속성을, 3번 구성원은 b, c, e라는 속성을, 4번 구성원은 a, d, e라는 속성을 지닌다고 했을 때, 이들 넷의 구성원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공통 속성은 없지만 서로 교차하며 중첩되는 속성을 공유함으로써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있다는 개념이지요.

​예술은 가족 유사성 개념을 통해 정의가 가능한 대표적인 개념일 겁니다. 때문에 오늘날에는 예술이 무엇인지 직접 정의를 시도하는 탐구 방식보다는 예술이라는 장의 외적 구성과 내적 작동의 기능 원리를 탐구하는 사회학적 접근이나, 특정 작품이나 작업의 의미를 다루는 비평, 또는 비평의 가능 근거를 묻는 메타비평(metacriticism)의 관점에서 주로 접근이 이루어지지요.

반면 여전히 예술을 그 자체로 사유하려는 시도들 역시 존재합니다. 아주 고전적인 관점입니다만 그 방법이나 접근 방향은 다양했고, 다양하다고 볼 수 있지요. 예술의 핵심을 이루는 속성이 무엇인가, 예술의 근본 조건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떠올려 볼 수 있겠군요. 이에 관련한 다양한 논의를 모두 일별할 수는 없으니, 우선 이번 세미나에서는 칸트를 중심에 두고 간략하게만 함께 살펴봅시다.

우선 우리가 접근하고자 하는 영토의 이름은 미학(Aesthetics)입니다. 미학이라고 하면 흔히 미와 예술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미학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앞서 간단하게 짚어 본 것처럼 미와 예술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조차 정의하기 어렵다는 난관에 부딪히고 맙니다. 이것 말고도 문제는 많습니다. 예컨대 미와 예술의 전통적인 삼항관계라고 볼 수 있는 작가-작품-관객의 관계에 생산자-상품-소비자라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삼항관계까지 함께 고려한다면 미학이 다루는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지, 실체가 있는 독립된 영역이라고 볼 수 있는지, 결국에는 미학이 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지요.

미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미학에 관련한 사상가들 역시 피할 수 없었던 문제입니다. 칸트는 미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바움가르텐에게 성급했다고 일침을 놓았고, 헤겔은 이 영역을 다루면서 미학이라는 명칭이 적절하지 않지만 통상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도 사용한다고 푸념한 적도 있지요. 니체나 하이데거 등은 아예 미학이라는 용어를 일절 언급조차 않습니다. 우리도 따라서 이 용어를 기각하는 편을 택해야 할까요?

​미학은 미를, 정확히 말하자면 미적인 것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뜸 커다란 문제가, 시작하자마자 튀어나옵니다, 바로 미적인 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가요. 사물의 물리적 본성을 다루는 학문인 물리학이나 여러 가지 사회 현상의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으로서의 사회학 등은 그리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지만, 미적 대상을 다루는 학문이라면 도대체 ‘미적 대상’이 뭔지에 대한 정의부터가 쉽지 않으니까요.

​미학이라는 용어는 본래 감지하다, 감각하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αἰσθάνομαι(aisthanomai)’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성을 통한 인식이나 사유와는 다른 종류의, 지각으로서의 감각을 가리키는 표현이지요. 미학이라는 용어의 이면에는 이렇듯 감각에 관련한 탐구라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또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감각을 탐구의 대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감각 혹은 감각적인 것 그 자체가 합리적인 사유에 적합한가라는 생각이지요.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감각은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 불명확하고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며 모호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요.

따라서 우선 칸트의 미학을 다루기에 앞서 미학의 영토를 파악하는 작업이 급선무인 것으로 보입니다. 미학의 대상으로서의 미적인 것, 즉 감각의 특수한 사태로서의 미와, (전통적인 의미에서) 미적인 것의 영역으로서 예술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천천히 하나씩 생각해봅시다. 먼저 미적인 것의 역사와,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의 역사라는 두 방향에서 나누어 생각해보면 좋겠군요. 이러한 맥락 속에서 어떤 경로를 통해 칸트에 도달할 수 있는지, 칸트의 생각이 갖는 의의는 무엇일지 살펴봅시다.

… (중략) …

전통적으로 (서구의) 철학은 감각에 대한 모종의 의심을 은밀한 기원으로 두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떤 현상에 대한 감각적 경험에서 출발해 사물의 본성이나 사태의 보편적 원리라는 보이지 않는 속성을 추상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궁극적 목표이자 근본적인 탐구 방식이었기 때문이지요. 감각은 인간이 세계를 지각하는 첫 단계이지만 그 경험을 명석하고(clear) 판명하게(distinctive) 만들기 위해서는 지성의 매개가 필요합니다. 이런 관점은 세계의 다양한 측면을 다루거나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혹은 사유와 사유의 도구로서의 언어의 관계,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다루는 오늘날의 철학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고요.

이러한 의심은 철학사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합리주의의 전통에서 도드라지지요. 17세기 초 데카르트의 친구 마랭 메르센은 데카르트에게 아름다움의 근거(la raison)를 확정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데카르트는 여기에 대해 아름다움과 감각적 쾌적함의 문제는 오로지 어떠한 규정된 척도도 갖지 않는다고만 말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미와 감각적 쾌는 어떤 근거나 합리성을 결여한, 상상의 산물이자 상대적인 분류의 대상이었으니까요. 잘 알려진 것처럼 데카르트는 참된 인식을 위한 확실성을 담보할 수 있는 탐구의 방법을 정초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감각의 영역에는 어떠한 탐구의 방법도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능동적 사유를 가능케 하는 지성이 행위하는 능력에 기반한다면, 감각은 그 자체로 철저하게 수동적인 경험이며 따라서 경험 주체는 여기에서 어떠한 확실성도 확증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한발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에티카>의 1부에서 선, 악, 질서, 혼동, 찬양, 모독, 죄, 봉사 등의 모든 관념과 마찬가지로 미와 추 또한 상상의 산물이라고 말합니다. 외부 대상에 의해 자극 받은 상상력이 사람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촉발되면, 사물의 본성에 무지한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사물의 본래 속성에 속하는 것처럼 간주한다고 언급하면서요. 여기에서 어떤 감각 경험에 대해 미(쾌)라는 판단을 내리는 상상력은 일종의 판단 착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성이 아니라 상상력이 대신 작동한.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고대 그리스에서 활동했던 많은 소피스트들은 감각의 상대성을 주장합니다. (결과적으로 보편적 진리의 존재와 당위를 주장한 플라톤의 후예들이 시대에 이름을 아로새긴 것처럼 보입니다만) 대다수의 소피스트들이 이런 입장을 취했지요. 이들은 미나 쾌의 문제뿐만 아니라 인식과 실천 전반에 있어서 상대주의에 기대거나 상대성을 주장하는데, 이들의 생각은 결국 감각의 불확실성과 상대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황금률과 같이 질서와 조화를 중심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 피타고라스 같은 친구들도 있습니다만, 미와 쾌를 보편적 원리에 입각해서 정초하고자 한 시도들은 역사에서 그리 성공적이었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현대 미학이 미의 보편적 속성을 정의하는 방식보다는, 비평의 형태로 작품과 작업의 의미를 해명하거나 비평이 사용하는 개념과 논리, 비평의 작동 원리 등을 논의하는 데 주로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지요.

​하지만 반대로, 바디우 같은 사람은 (여전히) 예술이 비평이나 학문(특히 철학)의 도움이나 해석 없이도 고유한 진리의 갖는다,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이를 포착하기 위한 사유의 틀로 미학이 아닌 ‘비미학(d’inesthétique)‘이라는 용어를 제안하기도 합니다. 또 부르디외 이래 예술이 단순히 미나 취향에 관련한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산출하는 감각적 효과는 일종의 (혹은 정확하게)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미학의 가능성 자체를 강하게 의심하는, ’반미학(anti-aesthetic)’적 관점 또한 존재하지요. 랑시에르 미학이 단순히 어떤 학문이나 담론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감각적 식별의 체계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자, 이런저런 난관들을 살펴봤지만 아직 포기하기에도, 뭐라고 결론짓기에도 이릅니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니까요. 용감하게 도전장을 던지고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 사례들을 참고한다면 조금은 쉽게 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도구를 확보한 셈입니다, 이를 테면 칸트 같은. 오늘날 예술이나 미학에 관련한 논의는 칸트가 그것을 고민하던 시점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논의의 구도 자체는 칸트가 정리한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칸트 이전에도 미나 예술에 대한 논의는 많이 있었습니다. 칸트 이후에도 많이 등장하고요. 하지만 작품이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않은가, 혹은 작가가 어떻게 작품을 만들었는가, 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차원, 즉 인간이 어떤 대상을 좋다(아름답다, 즐겁다…)고 받아들이고 어떤 대상을 싫다(추하다, 불쾌하다…)고 받아들이는가, 의 방향으로 본격적으로 탐구의 방향을 전환한 것이 바로 칸트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문제에 접근하는 우리도 칸트를 일종의 이정표나 길잡이로 활용할 수 있을 테고요.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미와 감각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것들이 학문의 대상이 될 수는 없지만 이것에 대한 비판(kritik)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앞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자신의 기획을 밝히면서 칸트는 끝없는 착오를 종결짓고 그것의 합당한 한계를 제시하는 것이 바로 비판이라고 야심차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판단력(urteilskraft)이라고 지칭한, 취미(geschmack)의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겠지요, 미와 취향에 관련한 착오를 종결짓고 그것의 한계를 확정할 수 있다고요. 과연 칸트의 생각처럼 아름다움과 추함, 감각적 쾌와 불쾌의 문제에 있어 보편적인 원리나 규칙을 발견하거나 정초할 수 있을까요? 차츰 하나씩 살펴봅시다, 얼마간 함께 생각해볼 수 있겠군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4. 10. / Alter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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