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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am Chomsky: Politics / Philosophy of Language


푸코와 촘스키가 말하는 인간의 본성이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가진 인간 공통의 특성이라거나 타고난 성품 정도라고 해봤자 실은 단순한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을 테고, 이들의 대화를 보면 인간이 본래 기질이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따위의 공허한 도덕론을 논하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토론의 주제이자 이들이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을 전개하는 핵심 개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핵심 개념이 지시하는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가와 같이 중요한 질문을 놓친다면 당연히 이들 각각의 주장이나 의견이 엇갈리는 쟁점 역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겠지요. 1971년의 토론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나지만 책의 뒷부분에 이어지는 촘스키와 푸코의 추가 대담과 강연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질문에 조금 더 명확하게 다가설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 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기에 앞서, ‘인간의 본성’이라는 개념이 지시하는 것이 정확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 앞으로요.

지난밤에 이어 우리가 함께 읽는 책의 2, 3장에는 촘스키와 미추 로나의 대담이 실려 있습니다. 1971년 네덜란드에서 푸코와의 토론 이후 촘스키는 1976년 파리에서 프랑스의 언어학자 미추 로나와 만나 대담을 진행합니다. 대담이라기보다는 인터뷰가 더 정확한 표현이겠군요. 이들의 대화는 로나의 질문과 촘스키의 답변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공식적으로 이들의 대담은 (네덜란드에서의) 앞선 토론과는 무관한 자리었습니다만, 인터뷰 질문 가운데에는 이전 토론의 주제와 관련 있는 내용도 있고 또 로나가 푸코와의 토론 내용에 대한 질문을 직접 촘스키에게 묻기도 합니다. 촘스키의 인터뷰는 이듬해 <미추 로나와의 대화(Dialogue avec Mitsou Ronat)>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에서 출판되었고, 1979년에는 <언어와 책임(Language and Responsibility)>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도 출판되었지요.

로나가 인터뷰에서 맨 처음 촘스키에 묻는 것처럼, 언어학자임에도 촘스키는 자신의 본래 연구보다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70년대 프랑스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에서도 사정은 비슷한 것 같군요. 한국에서도 학자로서 그가 언어학에 기여한 부분보다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더 유명하지요. 애당초 그가 조금 늦게서야 한국에 알려진 까닭인지, 아니면 언어학이라는 분야에서 촘스키의 제시한 이론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촘스키의 관심이 주로 미국의 대외 정책에 대한 비판에 맞춰져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촘스키의 사상이라면 언어학에 대한 연구보다 주로 정치 논평이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촘스키는 1928년 12월 7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습니다. 90세 가량인 지금까지도 비교적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고요. 최근에는 주로 학문적 활동보다는 사회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촘스키의 공식 웹사이트(https://www.chomsky.info)나 페이스북 계정에서 그의 주요 발언이나 활동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촘스키가 직접 운영하지는 않는다고 하는군요, 여기저기서 연락이 너무 많이 와서 그렇답니다.)

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철학을 전공한 촘스키는 1956년에 MIT의 부교수로 출발해 지금까지 그곳에서 연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구문론과 변형생성문법 연구로 일약 언어학계의 ‘슈퍼스타’로 떠올랐지만 촘스키의 관심사는 비단 그의 연구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부터 대외활동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표명하기 시작했고, 특히 1967년 ‘뉴욕 리뷰 오브 북스(The New York Review of Books)’에 기고한 ‘지식인의 책무(The Responsibility of Intellectuals)’라는 글에서 ‘정부의 거짓말을 밝히고 정부가 제시하는 명분과 동기 이면에 감추어진 의도를 파악하고 비판하는 것’을 지식인의 역할로 주장하여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지요. 이후에도 촘스키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 냉전 당시의 외교 정책,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문제, 이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 대한 중동 정책,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정책 등 국제관계에서 미국의 행동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을 이어갔습니다. 미국이 자유나 민주주의 같은 명분 이면에서 어떻게 중남미 대륙의 국가들이나 아프리카, 아시아 국가들을 이용하는지, 또 정작 자신의 이익 앞에서 미국이 어떻게 국제 규범과 질서를 무시하는지 등을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고요.

촘스키의 이러한 입장은 지난 밤 함께 살펴봤던 푸코와의 토론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토론의 사회자 엘더스가 당대의 서구 사회가 민주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묻자, 푸코와 촘스키는 모두 아니라고 대답하지요. 그러면서 촘스키는 정치적 폭력을 비판하기 위해 사회 내 권력과 억압, 폭력과 파괴의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행정부, 경찰, 군대 등 국가기관이나 다국적 대기업들은 겉으로는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독재 권력의 한 형태라고 합니다. 촘스키는 이를 두고 불공정한 사회에서 시장 권력을 장악한 독재적 지배의 형식이라고 일컫지요. 또한 그는 미래의 정의로운 사회 유형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인도적 개념에 바탕을 둔 인본주의적 사회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이면서요. (여전히 인간의 본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푸코와는 대조적인 관점입니다.)

로나와 촘스키가 진행한 인터뷰를 담고 있는 책의 2장에는 ‘정치(politics)’라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나중에 촘스키는 대담 내용을 검토하고 편집하면서 해당 내용에 ‘민주주의의 승리(triumphs of democracy)’라는 제목을 붙였지요. 아이러니한 제목입니다. 대담 중간에 민주주의의 승리를 언급하며 등장하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촘스키는 워터게이트 파문에 따른 닉슨 대통령의 하야는 민주주의의 승리와는 무관하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으니까요. 앞서 1971년의 토론에서도 서구 국가들이 민주적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엘더스의 질문에 푸코와 촘스키 두 사람 모두 아니라고 대답한 바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도 촘스키는 민주적인 것처럼 보이는 서구의 정치 제도가 어떻게 비민주적으로 작동하는지 보다 확실하게 개관하자 합니다, 주로 미국에 초점을 맞춰서요.

... (중략) ...

촘스키가 주장하는 인간의 본성은 무엇보다 사고하는 능력, 바로 합리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분히 근대적 이상의 향기를 품고 있는 개념이지요. 촘스키 역시 자신이 제시하는 합리성이라는 개념이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며, 인간의 본성에서 그것을 필연적이라고 연역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순순히 인정합니다. 연역이나 귀납적으로 그것의 사실성을 증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귀추법에 기대어 설명하기도 하고, 또 역사적으로 인간의 합리적 본성을 전제했던 사상들에 기대기도 합니다. 언어의 습득 과정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사고의 특성과 언어의 활용에 관련한 창조적 역량에 주목하면서 모종의 합리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언어활동이라는 사태를 해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거나, 다양한 사회 제도의 창안과 관련해서 설명하기도 하면서요.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촘스키의 이러한 관점은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데올로기는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개념일까요? 옥스퍼드 사전은 이데올로기를 사고와 관념의 체계(A system of ideas and ideals)라고 소개합니다. 조금 더 들어가 보면 개인이나 집단, 사회계층 등을 이끄는 어떤 신조나 믿음의 요체(body)라고 정의하기도 하고요, 개인이나 집단, 사회에서 통용되는 신념의 집합(collection of beliefs)이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영국의 문화 연구자 존 피스크는 이데올로기를 크게 규범적(normative) 신념체계,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 실천(practice)으로서의 이데올로기라는 세 가지 의미로 구분하여 정의합니다. 규범적 신념체계로서의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개인들에게 특정한 심리적 태도를 만든다는 것에 주목하는 관점입니다. 이를 테면 가사노동에 대한 특정한 태도는 다른 활동에 대한 그의 심리적 자세와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즉 누군가 남자가 부엌일을 하는 것은 사내답지 못하다고 생각을 지니고 있다면, 이러한 태도에서 여자가 바깥일을 하면서 집안일을 소홀히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어른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나이 어린 사람을 건방지고 무례하다고 여길 것이라는 그의 태도를 예측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그것에 입각해 어떤 사고와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적 기준으로 작동하는 일종의 체계를 의미합니다.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다분히 마르크스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는 비판이론 계통의 사고방식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관점이기도 하고요. 허위의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마르크스가 독일 관념론과 당대의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피지배계급이 받아들인 현행 질서와 지배계급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일종의 세계관이나 가치관, 사고방식이 바로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당연히 현실에서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축소하고 위장하며 은폐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겠지요. 이러한 관점에서는 당연히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은 실천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일 텐데,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이나 그에 대한 비판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저마다 사용하는 정확한 용어나 표현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알튀세르나 바르트 같은 프랑스 현대 철학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개념이고요. 실천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적 실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차차 같이 생각해보기로 하고 우리는 우선 촘스키로 돌아갑시다. 촘스키가 언급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은 주로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시민의 자유와 권익을 위해 정부의 거짓말과 숨은 의도를 밝히는 것을 지식인의 책무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촘스키는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있어 사람들을 통제하고 현실을 왜곡하려는 시도들을 이데올로기를 통제하는 부당한 권력 작용으로 규정하고 앞장서서 이러한 현상을 비판하고 있지요.

촘스키는 이러한 비판적 사고를 위해 특별한 전문적 지식이나 학습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러한 노력을 요구하는 특정한 지적 작업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평범한 수준의 판단력과 응용력, 그리고 열린 마음과 건전한 의구심만으로도 충분히 중요한 사회적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고 말하면서요. 이러한 맥락에서 현실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 가운데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에 있어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에 속하는 지적 전통이 실질적으로 기여한 바가 없다고 생각하노라 단언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접근이 오히려 정확한 현실 인식을 어렵게 만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교조적인 경향까지 보이면서 비판적 기능을 상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반면 장피에르 파예의 전체주의 언어 연구를 인용하는 로나의 질문에는 이데올로기의 은밀성에 대한 의문이 담겨 있습니다. 앞서 간단하게 살펴본 것처럼 만약 이데올로기가 특정한 세계관이나 지배 질서를 옹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로서 기능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언제나 ‘이미’ 작동하는 사고의 틀이라면 단순히 ‘합리적인’ 지성의 사용만으로는 이데올로기와 그것의 작동 방식을 인지하고 비판하는 것에 제약이 있지 않겠는가, 나아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가라는 의문이지요. 왜냐하면 합리성을 결정하는 기준 역시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에서, 즉 무엇이 합리적인가라는 물음조차 이데올로기의 작용에 따라 결정될 수 있으니까요. 푸코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합리성을 의심하며 비판하는 지점입니다.

미국의 비평가 프레데릭 제임슨은 현재의 상황에서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이라는 데카르트적 이상이 오늘날 오히려 이데올로기적 목적에 종사하게끔 변모한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고찰합니다. 사고의 명증성에 대한 극단적인 요구, 그리고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든 종류의 사고를 오류나 요설이라 기각하는 시대적 흐름 자체가 당대의 특정한 상황을 반영하는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는 생각이지요.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는 다음 밤 푸코를 다루면서 다시 또 함께 생각해봅시다.)

현행 질서와 권력에 대한 촘스키의 비판은 권력이 어떻게 인간을 통제하는가, 어떻게 (권력을 가진) 소수를 위해 대다수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박탈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 이면에는 정의와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지요. 여전히 불완전한 관념임에도 촘스키가 정의와 보편적 가치를 고집스레 옹호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잠시 멈춘 (것처럼 보이는) 근대라는 미완의 기획에 대한 믿음,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조금씩 전진하면서요. 얼마나 큰 믿음인지 상상이 가십니까?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다는 쉬운 말 한마디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단순하게 기각할 수 없는 것처럼, 합리성과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 역시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겁니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지금은 작고한 한국의 어느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일기장에 적은 문구라고 합니다. 특별할 것 없이 뻔한, 여느 명언집이나 아침을 여는 글귀 따위에 어울릴 법한 문장이지만 이 말을 한 사람과 그가 겪은 시간들을 떠올린다면 사정은 조금 다를 겁니다. 수차례 죽을 고비와 온갖 부침과 영욕을 겪은 끝에 생을 마감하며 남긴 마지막 말이니까요. 그가 말하는 역사의 발전, 혹은 촘스키가 말하는 보편적 가치가 단순히 기술 발전과 풍요, 편리한 생활 따위를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요. 아마 저 선언은 그 말을 낳은 질문 앞으로 사람들을 불러 세울 겁니다. 당신은 이만한 삶을 겪고도 인생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전히 역사의 발전을 믿는가? 와 같이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2017. 3. 24. / Sutome Apothec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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