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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Nature: Justice vs. Power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말하고 듣는 것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구분합니다. 당연히 다른 것 아니냐고요? 물론 일상적인 용법에만 비춰 봐도 당연히 서로 다른 개념인 것처럼 보이지만, 고진이 차이를 지적하는 맥락은 이것과는 또 다른 특수한 지점을 가리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말하고 듣는 것은 일상적인 대화에,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수업이나 강의 같은 어떤 교육이나 정보 전달의 특수한 상황에 해당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고진은 이와 달리 사람들이 흔히 말하고 듣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대화는 실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해당하고, 진짜 말하고 듣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상황에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고진에 따르면 말하고 듣는 것은 대화의 참가자들이 대화의 규칙과 대화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을 모두 공유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 외의 경우는 한 쪽이 알고 있는 정보를 다른 한 쪽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요.

화자와 청자가 번갈아 바뀌는 일반적인 대화 상황에서조차 그렇습니다. 누군가 말할 때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혹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듣는 사람이 그가 말하는 내용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사용하는 개념들, 말의 규칙들, 표현의 방식들을 먼저 알아야만 하지요. 그렇지 않다면 의미는 쉽게 미끄러져서 전달되지 않거나 엉뚱한 의미로 전달되고 마니까요.

말하는 이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이 듣는 사람에게 전혀 생소하다면, 말하는 이는 먼저 개념들을 전달해야 합니다. 이때의 대화는 당연히 말하고 듣기가 아닌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대화의 규칙 역시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한국어든 영어든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같은 문법 규칙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말의 규칙은 문법 규칙을 초과하는 많은 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이지요. 이를 테면 사고방식이라거나 특정 주제에 관련한 가치 판단, 경험을 내면화하는 개인의 고유한 방식 등을요. 대체로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대화는 이러한 지점들을 적당히 눈 감고 외면하기 때문에 적당히 말을 주고받으면서 의미도 함께 주고받는다 생각하기 쉽지만, 대화에 등장하는 의미의 정확한 전달 여부를 추수하며 확인한다면 생각보다 많은 경우 잘려나가는 의미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의사소통은 대체로 언제나 제한적이고, 위태로운 오해의 가능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요.

대화에서의 정보 전달은 대체로 일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한쪽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다른 쪽으로 전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래서 고진은 대부분의 대화가 사실 말하고 듣는 것이 아닌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해당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말하고 듣는 것은 달라요. 말하고 듣는 것을 합쳐서 대화라고 본다면, 대화는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닌 일종의 변증술을 의미합니다. 대화의 과정을 통해 오가는 말의 의미와 내용이 변화하며, 대화는 항상 참가자들을 시작과 다른 어딘가로 데리고 가기 때문이지요.

대화를 의미하는 영어 낱말을 떠올려본다면 고진이 말하는 대화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dialogue’는 ‘dia-’ 와 ‘logos’가 결합한 단어인데, 익히 아시다시피 그리스에서 유래한 ‘logos’라는 개념은 이성, 지성을 의미하고 (그리스어 ‘logos’의 의미나 용법, 또 그것이 철학에서 갖는 함의에 대해서는 일단 넘어갑시다.) 역시 그리스에서 유래한 ‘dia-’는 ‘둘’이라는 의미와 ‘~을 통해’, ‘~를 지나’, ‘~의 사이’ 등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표현에서 대화(dialogue)가 지성(logos)을 통해(dia-) 이루어지는 무엇, 혹은 복수의(dia-)의 지성(logos)이 참예하는 무엇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요.

자, 이러한 맥락에서 이제 푸코와 촘스키의 대화를 살펴봅시다. 이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은 대화라고 볼 수 있을까요? 우선 이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대담을 진행합니다. 네덜란드 TV 프로그램에서 이루어진 이 토론에서 사회자인 엘더스와 촘스키는 영어로 대화를 진행하고, 푸코는 처음 말문을 열면서 불어로 발언하는 자신에 대해 양해를 구하지요. 엘더스는 촘스키와 푸코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같은 산에 오르는 두 사람에 비유합니다. 토론의 주제인 인간의 본성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요. 잘 알려진 것처럼 푸코는 정신병과 광기(madness)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에서 출발해 인식과 권력의 문제로 사유를 전개했다고 볼 수 있겠고, 언어학에서 출발한 촘스키는 차츰 정치와 권력의 문제, 또 활발한 사회 참여 등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 갔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이 두 사람은 출발점도, 접근하는 방식도 모두 다릅니다. 전공 분야에 다른 만큼 각자가 사용하는 주요 개념 등도 조금씩 차이가 나고요. 그래서 대화 사이사이 이들은 종종 자신이 사용하는 개념에 대해 설명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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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는 인간의 언어 활동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재적 역량에 주목합니다. 유아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이나 성인이 일상에서 언어라는 기호를 통해 사고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보라, 대체로 제한적이고 형편없기 짝이 없는 정보들만 가지고도 인간은 훌륭하게 지적 능력을 발휘하지 않느냐, 이것은 모종의 내재적 합리성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라고 주장하면서요.

반면 푸코는 이러한 관점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봅니다. 언어의 사용에 관련한 규칙이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 작동한다? 그럴 수 있다, 역사학자나 언어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도 좋다, 하지만 그러한 규칙이 반드시 인간의 정신에 내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라고 묻지요. 푸코에 따르면 오히려 인간 사회의 규칙은 경제적 조건, 과학기술, 정치제도, 문화나 관습 등의 사회적 기반의 영향 아래에 놓이는 것으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고고 합니다. 촘스키가 지식(체계)의 보편성에서 인간 본성의 보편성을 유추하고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사회 제도나 정의, 선, 정치적 실천의 문제를 사유하는 반면, 푸코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지식(체계) 역시 시대의 산물이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그리고 달라져 왔음을 주장하지요.

정치라는 영역으로 대화 주제를 옮기면 이들의 생각 차이는 더욱 도드라집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확인할 때 푸코와 촘스키는, 전문적인 부분에서 일부 이견을 보일 때도 있지만 대체로 상대방의 생각을 큰 무리 없이 받아들입니다. 촘스키의 표현처럼 인간의 본성이라는 문제에 있어 정신에 내재한 모종의 속성과 기존의 사회적, 지적 조건이라는 두 가지 모두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다만 푸코는 본성이라고 부를 만한 인간의 어떤 특징은 기존의 사회적, 지적 조건이 허용하는 가능성 아래에서만 발현된다는 입장, 그리고 주체로 가정된 개별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총체로서 시대와 세대, 집단의 규칙이 중요하다는 입장에 가깝고, 촘스키는 매우 제한적인 정보만을 제공하는 집단의 규칙에서 능동적 사고와 놀라울 정도의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을 볼 때 인간의 내재적 역량이 외적 조건을 초과한다는 입장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합리성과 창조적 역량을 인간의 기본적 능력으로 바라보는 촘스키는 정치와 권력의 문제 역시 소수에게 (혹은 소수의 이익에 맞춰) 편중된 권력을 다수에게, 다수를 위해 재편성할 것을 주장합니다. 구체적인 맥락과 상황 속에서 정의와 보편으로 특정한 입장이나 행동을 비판하기도 하고요. 반면 푸코에게 정의나 보편 등의 가치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 이래로 유럽의 비판적 지적 전통이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는 관점이기도 하지요. 푸코에 따르면 정치와 권력의 문제는 사회적 갈등을 둘러싼 계급투쟁의 문제이며, 정의라는 개념은 특정한 권력에 대항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라고 합니다. 정의라는 관념의 사회적, 역사적 변천을 떠올려볼 수 있겠지요. 적대 집단을 도살하는 것이 정의로 통용되는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용서하는 것이 정의로 받아들여지는 시절 또한 있었을 겁니다. 관용이 정의로운 미덕인 사회가 있는가 하면, 예외없는 엄격한 규칙의 집행이 곧 정의인 사회도 있을 테고요. 이러한 맥락에서 푸코는 정치와 권력의 문제에 있어 인간의 본성이라는 개념만큼이나 정의라는 관념 역시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계급 없는 사회, 평등한 사회가 도래한다면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전히 정의라는 개념이 오늘날과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고 덧붙이면서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세 시간 가량의 토론은 일단 이렇게 끝이 납니다. 우리는 푸코와 촘스키의 이야기를 따로 조금 더 들어보기로 하지요. 오늘 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돌아오는 밤에는 정치에 대한 촘스키의 입장과, 언어철학이라는 그의 지적 배경에 대해 함께 살펴봅시다.

2017. 3. 17. / Sutome Apothec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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